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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마낭의 풍경. 어린 아이 둘이 손을 꼭 붙잡고 설산 방향으로 걷고 있다.
 마낭의 풍경. 어린 아이 둘이 손을 꼭 붙잡고 설산 방향으로 걷고 있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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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여긴 또 어딘가. 공기가 서늘한 낯선 방. 아무렇게나 놓인 주황색 배낭과 회색 등산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차갑게 식은 침낭. 히말라야구나. 주황색 배낭은 몇 달 동안 끌고 다닌 내 짐. 옆에 누운 이 이상한 놈은 남편인가.

5분간 천장을 보며 누워 있으니 어제까지의 현실이 기억 속으로 되돌아온다. 설산. 바보 같은 말다툼. 브라가 산장의 커피. 독일 학생들. 익숙지 않은 느낌 하나만 돌아오지 못한 채 얼굴 주위를 맴돈다. 뭐지. 이물감이 느껴지는 곳을 따라가 본다. 입술이다. 손을 댔다. 입술에 볼때기가 한 근씩 붙어 있다. 잔뜩 부었군.

이건 또 무슨 증세지. 고산병 증세 목록에 입술이 붓는다는 건 없었는데. 건조해진 입술에 진득하게 바른 립글로스 때문인가. 무게가 두 근은 될 것 같다. 달고 다니다가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거 아닌지 몰라. 잠에서 깨어나니 거대한 벌레가 되어 버린 그레고르의 느낌이 이런 거였을까. 이건 벌레는 아니고 음. 그래, 오리. 오리가 된 기분이다.

'절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다짐했지만...

브라가에서 마낭으로 이어지는 길
 브라가에서 마낭으로 이어지는 길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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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브라가에서 마낭까지 한 시간을 걷는다. 마낭을 베이스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고도에 적응해볼 계획이다. 마낭은 긴 트레킹에 지친 트레커들이 짧고 길게 머무는 마을이다. 해가 많이 드는 경사지에 자리한 까닭에, 추운 겨울이 되어도 눈이 많이 쌓이지 않아 근방 지역 중에는 인구가 가장 많다.

그렇기에 마낭에는 산속에서 만나기 어려운 '도시 것'들이 즐비하다. 식료품을 파는 상점, 서양 음식을 취급하는 식당, 베이커리, 커피숍, PC방, 그리고 영화관까지. 사실을 고백하자면 고도에 적응하는 건 부차적 목표다. 우리의 속내는, 느긋이 쉬면서 이런 도시 것들을 즐기는 것이다.

고도가 높을 대로 높은 이곳까지 왔지만, 가이드북에서 기가 질릴 정도로 비싸질 거라고 겁을 주던 숙박비나 음식값은 그대로다. 가이드북은 고작해야 400루피(한화 약 6천 원) 하는 음식값이 비싸다고 투덜댈 게 아니라, 놀라서 턱이 빠질 정도로 저렴한 숙박비에 대해 찬양을 해야 할지어다. 단돈 100루피(한화 약 1천 5백 원)에, 볕이 잘 드는 커다란 창이 딸린 2층 방을 구했다. 방에 들어서니, 웅장한 설산이 창문을 가득 채우고 서 있다. 하얗고 눈부시다.

산장 식당에는 트레킹의 시작을 같이 했던 이스라엘인 엘리가 아멧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담요를 두르고 앉아 보드게임을 하는 헨드릭과 로레나도 보인다. 열흘간의 트레킹을 거치며 한두 번 서로를 스치다, 해발 고도 4000m의 고지 마낭에 모여든 트레커들. 삶의 어떤 중요한 순간을 같이 한 동지들 같아 애틋하다.

마낭의 풍경. 하얀 설산과 기암 절벽들이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마낭의 풍경. 하얀 설산과 기암 절벽들이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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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목표다. 절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라고 굳은 다짐을 하고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신다. 트레킹에 익숙해진 몸에 산행 시계라도 박힌 모양이다. 지금쯤 움직여야 할 시간이 아니냐며, 몸이 나를 다그치기라도 하는 듯 근질근질하다. 커다란 창문 사이로 스며든 바깥 날씨는 눈부시게 좋다.

마낭에는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이틀에 걸쳐 다녀올 수 있는 산행 코스들이 여러 개 있다. 마낭에 머무는 동안 한두 코스는 다녀오는 것이 좋다. 경치를 보러 가는 이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고산병 예방이다. 개인의 성별, 체력 등에 관계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고산병에 가장 확실한 예방법이 '클라임 하이, 슬립 로우(Climb-high, sleep low)', 즉 오늘 밤 잘 곳보다 고도가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치가 좋다는 아이스케이브에 가볼까. 6시간이 걸리는 험한 산길이라던데. 벌써 정오가 다 됐으니 오늘은 글렀다. 이삼일은 잡아야 한다는 틸리초 호수에 갈지는 조금 더 생각해보자. 한 시간이면 다녀온다는 곰파에나 갈까. 브라가에서 이어지는 산길이 하나 있었지. 밀라레파 동굴. 브라가에서 왕복 3시간이 걸린다니 오늘의 코스로 적당한 듯하다. 오늘은 배낭을 들 필요도 없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술렁술렁 걷다 와야지.

마낭 마을. 혹성 어딘가에 자리한 마을 같은 모습이다.
 마낭 마을. 혹성 어딘가에 자리한 마을 같은 모습이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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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부둥켜 안고 추위를 이겨내고 있는 듯한 모습의 집들.
 서로를 부둥켜 안고 추위를 이겨내고 있는 듯한 모습의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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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가에서 묵었던 산장을 지났다. 산장을 지나니 나타나는 넓은 평야. 긴 털을 복슬복슬하게 두른 거대한 야크 몇 마리가 체스 게임이라도 하듯 평야 지대 여기저기를 알록달록 장식하고 서 있다.

평야 지대를 지나니 산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등장했다. 그리 먼 길은 아니다만, 해가 지기 전까지 산장으로 돌아가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할 것이다. 산길을 한참 걸으니 등장하는 벼랑길. 이건 도저히 길이라고 볼 수 없는데. 떨어지면 죽지는 않겠지만, 팔다리 정도는 부러질 것 같은 2층 높이의 길. 발 하나 겨우 디딜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을 한 발 한 발 걸었다. 한두 걸음 걸어서 끝날 길이 아니다.

길은 30분 동안 이어졌다. 벼랑길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자니 욕이 방언처럼 터져 나온다. 왜 산장에 얌전히 있지 못하고 나와서 이 고생인가. 트레일을 누가 이 따위로 만들어 놓은 건가. 발을 디딜 때마다 후두두 떨어지는 흙과 자갈들. 길이 무너지나 안 무너지나, 한발 한발 확인하며 걸어가는 더스틴의 뒤를 바짝 쫓았다. 식은 땀을 흘리며 걷기를 이십 분. 다시 평범한 길이다. 운 좋게 굴러떨어지지 않고 오기는 했다만, 돌아갈 길이 걱정이다.

밀라레파로 이어지는 벼랑길.
 밀라레파로 이어지는 벼랑길.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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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가에서 묵었던 산장을 지났다. 산장을 지나니 나타나는 넓은 평야. 긴 털을 복슬복슬하게 두른 거대한 야크 몇 마리가 체스 게임이라도 하듯 평야 지대 여기저기를 알록달록 장식하고 서 있다.
 브라가에서 묵었던 산장을 지났다. 산장을 지나니 나타나는 넓은 평야. 긴 털을 복슬복슬하게 두른 거대한 야크 몇 마리가 체스 게임이라도 하듯 평야 지대 여기저기를 알록달록 장식하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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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레파 동굴엔 별것이 없었다. 티베트 승려들이 기도를 드리는 기도굴이라는데, 오늘은 기도드리는 날이 아닌지 조용하기만 하다. 벼랑에서부터 쫓아오던 산바람만 황망하게 불어온다. 밀라레파는 12세기의 유명한 승려로, 이곳에서도 얼마간 수행을 했다고 한다. 티베트에서 가장 존경받는 수행자라는데 그 이유인즉슨 아이러니하게도, 성불을 이루기 전 그가 행한 악의 크기 때문이다.

장사로 큰 돈을 번 밀라레파의 부친이 죽자, 백부가 모든 재산을 빼앗아 간다. 밀라레파는 복수를 위해 흑주술을 배우고, 주문으로 백부의 집을 무너뜨리고 가족을 몰살 시킨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을 죽인 밀라레파는 죄업을 뉘우치고 불문에 들어간다. 9년간 동굴에서 풀로 연명하며 수행을 한 후 깨달음을 얻는다.

티베트 불교는 아무리 죄악이 많은 사람도 한 생에 성불에 이룰 수 있도록 이끄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밀라레파가 가장 존경을 받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밀라레파처럼 극악무도한 악인조차, 수행을 통해 성불을 이룰 수 있다는 일종의 희망 때문이다.

21세기에 어울리지 않게 성불이라니. 이런저런 죄는 다 짓고 사는 거 아닌가. 성불한다고 악한 과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과거는 그대로 있다고 해도 성불은 가능한 걸까. 오히려 그렇기에 '선(善)'인 걸까. 죄 많은 인간이지만 수년의 수행을 통해 성불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불자들. 그렇게 믿고 행하는 승려들. 해도 안 될 거야, 피곤할 거야, 라고 이내 무기력해져 버리는 태도보다는 훨씬 성숙한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무기력함이야말로 악이다. 성불을 쫓는 삶이란, 끊임없이 수행하고 깨닫고 성숙해 가겠다는, 생동감 있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이다.

밀라레파 동굴에서 길을 잃다

밀라레파 동굴로 가는 길
 밀라레파 동굴로 가는 길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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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레파 동굴 주변
 밀라레파 동굴 주변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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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주위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안나푸르나 3봉의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나왈에서 봤던 그 봉우리. 여기서 이어지는구나.

"조금 더 올라가 보자."

동굴 위쪽으로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딱히 길이 나 있는 건 아니고, 겨우 발을 디뎌 올라갈 수 있게 자갈밭으로 이어진 경사로다. 올라가 봤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 지금 이 시간에 정말로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까지 갈 것도 아니고.

"난 안 가."

해도 안 될 거야. 피곤할 거야. 난 이내 무기력하다. 너 혼자 성불하고 오렴.

"그럼 여기서 기다려."
"어디까지 가려고? 베이스캠프까지 정말 이어진다고 어떻게 알아.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봉우리가 바로 앞에 보이는데? 베이스캠프까지는 못 가더라도 올라가 볼래."
"…. 알았어. 나왈에서처럼 너무 오래 있다가 오면 안 돼."

마낭 마을에 모여든 야크들.
 마낭 마을에 모여든 야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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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기도깃발과 하얀 설산.
 티베트 기도깃발과 하얀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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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에서 산 몸에 맞지 않는 싸구려 잠바를 입은 더스틴의 하늘색 뒷모습. 길 같지도 않은 길을 따라 점점 줄어들다, 이내 점이 되어 사라졌다. 표지판도 없는 분명하지 않은 길을, 안나푸르나의 환각에 이끌린 듯 오르는 저 남자. 사고라도 나는 건 아니겠지.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똑똑한 사람이니까. 오르다가 아니다 싶으면 포기하고 내려오겠지.

신이나 들썩이는 더스틴의 등쌀이 보이지 않은 지 30분. 이쯤이면 기별이 있어야 할 텐데. 가파른 경사길을 하염없이 올려다봐도, 파란 하늘 말고는 더스틴이 입은 파란 잠바의 조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걱정되네. 넘어지기라도 한 거 아냐? 벼랑길을 걷다 발이라도 잘못 디뎠으면? 눈 쌓인 길을 걷다 미끄러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눈사태라도 난 거 아냐? 어쩌다 눈 속에 갇힌 걸 나만 까맣게 모르고 구조에 필요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여기서 멍청하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머리에 조금씩 내려앉던 걱정들은 서로에게 덕지덕지 엉겨붙더니, 뭉치고 뭉쳐 산을 빠르게 내려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가만히 있기는 너무 불안하다. 올라가 보자.

바람이 분다. 세차게 분다. 대충 깔린 자갈에 발을 꼽아야만 제대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경사가 심하다.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든 길이다. 그만 내려가고 싶은데. 내가 이 정도 올라와 줬으면 정성을 봐서라도 뒤꽁무니라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야? 기다리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오지 않을 사람이 아닌데.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온갖 불운의 시나리오. 잘못될 수 있을 경우의 수들과 며칠 전 읽은 소설의 줄거리가 뒤엉켜 머리가 복잡하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가던 그 소설. 정말 잘못됐으면 어떡하지.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어디로 가서 어떻게, 누구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지.

더스틴이 오른 곳. 저 하얀 산 위의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까.
 더스틴이 오른 곳. 저 하얀 산 위의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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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

길은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정도로 험했다. 오르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한 채, 서 있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갇혀 어쩌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더스틴의 이름을 하염없이 불렀지만, 더스틴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내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마음만 초조하다.

"더스틴! 더스티이이이인!"

그러게 내가 가지 말랬잖아!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가긴 왜가! 이 나쁜 놈아! 더스틴의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니 배 안에 고여 있던 걱정들이 복받쳐 나와 눈물로 쏟아져 내린다. 더스티이이이인!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길.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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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었어요오오?"

사람이다! 50m 멀리, 가이드 한 명을 동반한 서양 트레커가 산을 오르고 있다.

"아니요! 혹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가시나요!"
"네!"

기회다. 나와 트레커 사이에서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대화를 방해했다. 두 손을 입 양쪽으로 오므리고, 온몸을 흔들며 크게 외쳤다.

"올라가셔서! 파란 잠바 입은 남자 보이면! 수지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 좀! 해주세요!"
"그 사람 이름이 뭔가요!"
"더스티이이인!"
"더스티이이인! 알았어요오오오! 수지이이이!"

죽으란 법은 없구나. 가이드도 있으니 더 믿음직스럽다. 이제 곧 오겠지. 어디 가서 고꾸라져 있지만 말아라.

20분이 지났다. 경사길 위로 고개를 바짝 쳐들고 더스틴의 흔적을 찾는 것도 지쳐 포기했다. 돌무더기 위에 걸터앉았다. 나쁜 상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동시에, 만약의 경우 혼자 걸어 내려가야 할 안나푸르나에 대해 생각했다. 쏘롱 라는 혼자 어떻게 넘어가지.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나.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가야 하나. 그것도 무서운데. 옆에 있으니 그냥 옆에 있구나 싶던 더스틴인데, 이런 상황에 닥쳐 생각해 보니 더스틴 없으면 한 마을도 혼자 못 넘어갈 것 같다. 근데 나 되게 못됐다. 더스틴의 안위를 묻다, 내 안위를 계산해보고 있어.

"수지!"

더스틴! 후진 하늘색 잠바와 덥수룩한 수염. 그렇게 깎으라고 잔소리해도 안 깎는 못생긴 수염! 반갑다.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난다.

더스틴이 본 풍경
 더스틴이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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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레파에서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길.
 밀라레파에서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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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으어어어엉! 나 기다리는 줄 알면서 왜 이제와으어어엉!"
"미안해, 미안. 그만 가려고 할 때마다 조금만 더 가면 꼭 베이스캠프가 나올 것 같더라고. 독일 아저씨한테 나 찾아달라고 했어? 바로 앞까지 갔는데 독일 아저씨 한 명이 오더라. 수지가 더스틴을 하도 찾아 시끄러워 죽겠으니까 빨리 내려가 보래."

이 자식이 그래서 지금 아깝다는 건가! 거의 다 갔는데 내가 찾는 바람에 못 가서 아깝다는 건가! 남은 속이 타는데 놀려대는 독일 아저씨는 또 뭔가!

철철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다시 마낭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렸다. 왕복 3시간이면 된다던 짧은 트레킹. 험한 벼랑길을 오르다, 더스틴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돌아온 더스틴을 부여잡고 울고불고하느라 힘이 다 빠져버렸다.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길에서 본, 마낭 방향의 풍경.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길에서 본, 마낭 방향의 풍경.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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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떠난 자리엔 남빛 하늘만 쓸쓸하게 남아 창문을 꼬박 채웠다. 낮에 서 있던 하얀 설산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차가운 남빛을 조금 머금은 설산. 그 위로 펼쳐진 남색 하늘에, 수많은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박혀 있다. 아름답다. 그리고 두렵다. 오늘 겪은 안나푸르나는 아름답지만은 않았어.

자연 앞에 나는 얼마나 약한지. 잘못 디딘 한걸음에, 잠깐 미끄러져 내려온 눈에 치여 너무 쉽게 스러질 수 있는 내 존재. 문명을 일궈낸 인간이지만,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눈앞의 풍경을 영상으로 저장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보낼 수 있는 인간이지만, 그 문명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진다면 단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게 인간이고, 나다. 겸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히말라야의 품에 사는 사람들이 신을 가까이하는 이유도 이런 거겠지.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에 대한 인정, 자연의 힘에 대한 존중. 쏘롱 라를 넘어 히말라야를 무사히 내려갈 때까지, 이 겸손함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겠다.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길.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길.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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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낭의 풍경.
 마낭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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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마낭, #밀라레파,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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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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