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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대구 출생이다. 1985년에 대구시에서 태어나 군대를 가기 전인 스물한 살까지 다른 지방으로 이사가지 않고 살았다. 2년간 육군 현역으로 군복무 후 2007년에 전역하고 나서도 대구에서 1년간 자취를 했다. 이듬해에 호주로 2년간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고 2010년에 귀국해서 현재는 4년 넘게 서울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대구에서 머물지 않지만, 이정도면 대구 토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대구는 매우 더운 지방이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의 날씨만큼이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수정당을 표방하는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그것 말고도 많은 부분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보수적인 편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자랐다. 흔히 표현하는 '보수적인 가치관' 말이다. "자고로 남자는 말이지"로 시작하는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못박는 말들과 "거 참 어린 녀석이"같은, 나이로 서열이 정해지는 사고방식. 혹은 권위주의적 발상에 부딪히는 때도 많았다.

쉽게 말해서 '진보적'이라 불리는 변화에 상대적으로 대구의 분위기는 많은 경우 반대편에 서있었다. '동성애'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듣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나쁜것'으로 전해들었다. 보수적인 사고와는 별개로, 전라도에 대한 지역감정도 비슷한 방식으로 '대물림' 되었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전라도 사람들은 안 된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으면서 지냈다.

어느새 진보적 성향으로 변한 나, 아버지는 우려하셨다

2008년 6월 28일 저녁 서울시청 인근 태평로에서 광우병 우려 미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마친 시위대가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며 이들을 막고 있는 전경차를 밧줄에 묶어 끌어내려하자 경찰이 소화분말과 물대포를 동시에 쏘고 있다.
 2008년 6월 28일 저녁 서울시청 인근 태평로에서 광우병 우려 미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마친 시위대가 청와대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며 이들을 막고 있는 전경차를 밧줄에 묶어 끌어내려하자 경찰이 소화분말과 물대포를 동시에 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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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광우병 우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촛불시위가 전국적으로 크게 벌어졌다. 그 시기에 나는 아직 대구에 있었다. 사실 그 시절에만 해도 나는 사회적인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고, 정치나 경제같은 분야는 나와 다른 세계의 이야기쯤으로 생각했다. 내 삶과 아무런 연결점이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당시 나는 내 삶의 다른 방향을 찾느라 분주한 20대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고, 더 넓은 세계를 보겠다며 호주로 출국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출국 날짜를 20일 정도 남겨둔 5월 말에 촛불시위를 다룬 뉴스를 보았고, 집회가 살수차를 동원한 진압에 무참히 짓밟히는 광경도 목격했다. 친구들 중 대학을 다니느라 서울에서 거주하던 누구는 "거리로!"를 미니홈피 대문에 적고서 집회의 열기를 현장에서 전하기도 했다.

그제야 나도 이것저것 사회적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보게 됐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접하게 된 시기도 이 때부터였다. 게임하고 웹서핑하는 일에만 쓰던 인터넷으로 뉴스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주위의 친구들에게도 내가 접한 소식과 뉴스를 공유하기도 했다. MB정권의 충격적인 작태를 고발한 기사와 영상을 온라인 메신저 등으로 지인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 대한 나의 관심은 호주에서 머물던 2년 동안에도 식지 않았다. 내가 귀국했을 때는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 방송이 열풍을 일으키던 때였다. 아버지를 따라 보수언론을 읽던 어린 시절에서, 인터넷을 통해 다른 정보를 추가로 접하면서 정치적 성향이 다소 진보적으로 변해갔다.

주변의 반응은 꽤 싸늘했다. 아버지는 대구의 경기침체와 줄어가는 가게의 수입에 침울해 하시면서도, 정치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 분이셨다. 그렇기에 유독 갑자기 정치와 사회분야에 관심을 키우는 나를 우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게 느껴졌다.

"쓸데없는 짓 말고 니 일에만 집중해라. 저런 데 나가면 못 쓴다."

촛불집회 장면이 공중파 뉴스에서 나오던 것을 두고 아버지는 내게 점잖게 타이르셨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얼버무렸다. 어차피 대구에서 나갔던 촛불집회는 서울의 격렬한 상황과는 달라서 촛불을 들고 번화가를 한바퀴 조용하게 돌고서 끝나는 수준이었다. 경찰도 해산을 요구하거나 진압을 시도하지 않고, 그저 시위대가 차도로 나오지 않도록 주위에 서서 지켜보는 것에 그쳤다.

"요즘 빨갱이가 설친다더니"... 멀어진 고향친구들

정치 성향을 두고 아버지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오히려 고향 친구들과 갈등이 심해졌다. 어릴 적부터 보수적인 발상을 '아무런 의심없이' 학습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느샌가 달라진 내가 튀어나온 못처럼 보였던 걸까?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돌연변이'나 '외계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 같은 분위기로 말이다.

물론 당시 혈기넘치던 것을 주체 못하고 너무 심취했던 내 탓도 있다. 자극적인 기사가 나오면 친구들에게 메신저로 보여주며 "이것 좀 봐라" 하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선거일이 다가와도 시큰둥한 친구에게는 "선거를 안 하면 시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훈계성 발언을 일삼기도 했다. 최근 거론된 '싸가지 없는 진보' 논쟁의 소재처럼, 도덕적 우월감을 표출하던 내게 친구들이 거부감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반복되고 2010년의 여름, 쌓이고 쌓이던 것이 결국 터진 것일까. 언론의 기사를 인용하며 목소리를 높여 MB를 비판하던 내게 가장 친했던 친구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빨갱이가 설친다더니... 준수야, 너도 조심해라. 북괴에 세뇌 당해서 정부 흔드는, 북한 좋은 일 하지말고."

나는 그 말이 무척 아프게 들렸다. 사실을 기반한 비판에도 내가 '빨갱이' 취급을 받아야 한다니. 그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결국, 그 친구가 페이스북과 메신저 등에서 나를 '차단'한 것을 발견한 뒤로는 더욱 씁쓸했다. 나는 비록 서로의 생각이 다를지라도 여전히 친구로 남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차이점이 있는 의견에 논쟁을 벌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늘 그랬듯이 다시 웃으며 소주잔을 같이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은 단지 나만의 바람이었던 듯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친한 친구들 중 몇몇은 나를 떠나갔다. "이명박 대통령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라며 내게 역정을 내고 연락을 끊은 애도 있다. 그 중 누군가는 나를 선동꾼으로 몰고, 다른 친구들에게 "요즘 준수가 빨간 물이 들었더라"며 뒷담화를 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소수였고 그저 조용히 "너무 편향된 정보만 접하는 거 아니냐"고 조언해주는 친구도 있었지만 말이다.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말고 '공동체의식' 갖자

일베 회원등이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단식농성장 앞에서 '도시락 나들이' 등 먹거리 집회를 예고한 지난 9월 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일베 회원들과 시민들이 피자와 치킨을 먹고 있다.
▲ 피자 먹으러 광화문 나온 일베 회원들 일베 회원등이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단식농성장 앞에서 '도시락 나들이' 등 먹거리 집회를 예고한 지난 9월 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일베 회원들과 시민들이 피자와 치킨을 먹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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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마냥 어릴 것 같던 나와 내 친구들도 어느덧 올해에 서른 살이 되었고, 그런 2014년도 11월이 되었다. 지금도 어른이라고 하기엔 왠지 모르게 아직 부끄러운 감이 있지만, 그래도 철없던 고등학생 시절에 비하면 더 멀리서 나와 내 생각을 다시 돌이켜 볼 수 있게 되었다. 멀어진 친구와는 지금도 다시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래도 당시를 돌아보면서 "내가 말을 조금만 더 부드럽게 했더라면"이나 "더 유연하게 생각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단톡방(카카오톡 메신저 단체대화방)에서는 과거에 내게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라"고 조언하던 친구가 최근 자신이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사용자임을 넌지시 고백하기도 했다. 고3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방황하던 시기에 날 도와준, 가장 친하고 고마운 친구가 말이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단지 '일베'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이 친구와도 연락을 끊고 멀어져야 맞는 일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의 '일밍아웃('일베'와 '커밍아웃'의 합성어, 일베 유저임을 고백하는 일)'은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단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와 더 멀어지는 일을 더는 겪고 싶지 않다. 물론 해당 커뮤니티에서 자주 거론되는 '범죄적 발언'을 직접 듣는다면 그것은 다른 상황으로 이어질 테지만, 다행히 아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저런 성향일지라도 모두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일원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적'이라 규정짓는 피아식별법이 아닌, 모두 같은 사람임을 먼저 인식하는 태도 말이다.

진보와 보수는 공존하면서 사회의 발전과 유지를 도모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보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함께 공유하고 서로 존중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하지 않나. 상대방의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할 지언정, 그것을 이유로 타인을 쉽게 괴물이라 부르지는 말자고 부탁하고 싶다. 선거에서 내가 투표하지 않은 상대진영에 서있는 존재가 한국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두자. 일단 나부터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리라 다짐해본다.


태그:#친구, #이념,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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