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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영현비(군이 복무 중 사망한 군인을 위해 지급하는 돈) 횡령을 의심하게 된 시작은 2013년 9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날 나는 아들을 군에 보낸 아버지 몇 분을 만나 술을 마셨다. 모두 평범해 보이는 50대 중·후반의 남자 어른이었지만, 사실 이들 가슴에는 깊은 아픔이 담겨 있었다. 바로 군에 보낸 아들을 다시 돌려받지 못한 군 사망사고 피해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이날 나는 참으로 많이 울었다. 자식 잃은 부모 사연 중 어느 것 하나 서럽지 않은 사건이 있겠냐만 이날은 더욱 그랬다. 아들을 잃고 처절하게 슬퍼하는 아내 앞에서 아버지인 자기도 그저 울고 있다면 어찌 될까. 그래서 내색도 못하고 살아오던 아버지들이 이날만큼은 마치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었다.

처음엔 소주 한잔 마시면서 조용히 눈물만 흘리던 아버지들은 마신 술병이 점점 쌓여가면서 꺼억 꺼억 소리를 내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런 아들을 보고 싶다며 울던 아버지들의 눈물은, 그래서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나의 아픈 기억이 되었다.

지난 8월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28사단 폭행 사망 희생자 윤일병과 군 사망 희생자 추모제에서 희생자 영정을 든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참가하고 있다.
 지난 8월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28사단 폭행 사망 희생자 윤일병과 군 사망 희생자 추모제에서 희생자 영정을 든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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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금 횡령 사건' 피해자 아버지를 만나다

그런데 그 중 그날 처음 뵌 분이 있었다. 바로 2014년 2월 세상을 분노케 했던 이른바 '군 조의금 횡령 사건' 피해자 김아무개 일병의 아버지였다. 2011년 12월 4일, 육군 모 보병사단 소속 김아무개 일병이 목매어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 20세. 군은 헌병대 수사 결과, 김 일병의 죽음은 부대 잘못과는 상관없는 개인적 원인으로 자살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즉, 관심 사병이었던 김 일병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신적 문제인 우울 증세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늘 이런 식이었다.

이후 처리 방식 역시 다르지 않았다. 군은 그 아버지에게 "일단 화장 후 조용히 기다리면 순직 방향으로 노력하겠다"며 설득했다. 아버지는 군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거대한 군과 맞서 싸워 이길 방법이 없으니 막연하게 그 말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들이 죽은 이유도 모른 채 화장했고, 헌병대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약 석 달여가 지나가던 어느 날, 그토록 기다렸던 처리 결과가 들려왔다. 하지만 기대했던 결론과는 달랐다. 일반사망, 즉 자살로서 국가 책임은 없다는 통보였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아들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만이라도 정확히 알아야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찾고자 군 헌병대 수사 기록 공개를 요구했고 어렵게 받아낸 자료를 분석하며 의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버지처럼 억울하게 숨진 김 일병을 잊지 못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 일병 사망 당시 선임이었던 또 다른 일병, 김준수씨였다. 2012년 3월 3일, 김 일병 사망 후 넉 달여가 지나가던 그 날 당시 일병이었던 김준수씨는 모두 잠든 내무반에서 작은 손전등을 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써 내려갔는데 이를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 … 2011년 12월 3일. 나는 부사관 필기 시험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그리고 후임인 김 일병을 만나) 오늘 하루 종일 뭘 했냐는 물음에 그 아이는 충성클럽(매점)에 가자며 내게 다가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무나 귀찮았다. 통합 막사와 먼 충성클럽까지 간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매우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었다. 그 아이가 내게 한 마지막 부탁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의 구조 요청이었음을. …


다음날이었다. 12시 40분경. 그 아이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뒤늦은 불안감에 그 아이를 찾기 시작했고 머지 않아 화장실 문 아래로 이상한 것이 보인다는 L 상병의 말을 듣고 그 안을 넘겨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었다. 그 아이의 목에는 녹색 빛의 로프가 감기어 있었다.

그날 아무도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미친듯이 부르짖었다. 자는 사람도 있었고, TV를 보며 과자를 먹고,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죽은 아이 수사로 인해) 자율 활동이 통제되자 그 아이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중대 간부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것이 두려워 입 단속을 당부했고 진실을 왜곡하도록 압박했다. 아니, 협박에 가까웠다. 나는 헌병대 조사에서 수많은 사실들을 왜곡했다. 군인이었고 당시 부사관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간 그 아이의 부모님을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하리라. 그렇게 다짐한다. 난 그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 아이의 자살을 방관하였고 지키지 못했다. 나는 살인자다.'"

아버지가 찾아낸 끔찍한 진실

이후 전역한 김준수씨는 자신이 쓴 이 글을 약속처럼 인터넷 밀리터리 모 게시판에 올렸다. 2013년 2월 18일이었다. "나는 살인을 방관하였고 나 또한 살인자다"라는 제목으로 올린 이 글은 운명적인 계기로 이어졌다.

"혹시 아들의 진실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리지 않을까"라는 대단히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자주 인터넷 서핑을 하던 그 아버지에게 이 글이 확인된 것이다. 불과 채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간격에 벌어진 일이다. 김 일병의 아버지는 이 글을 올린 김준수씨에게 만나 줄 것을 부탁하는 글을 남겼고, 김씨가 여기에 화답하면서 마침내 은폐되었던 비밀의 문이 열리게 된다.

아버지는 김씨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김 일병의 죽음에 있어 부대 잘못은 전혀 없었다는 군 헌병대 수사가 모두 조작된 것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숨진 김 일병은 그저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선임병으로부터 지속적인 가혹행위와 폭언 등에 시달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부대 지휘관도 알고 있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도 역시 밝혀졌다.

특히 김 일병을 괴롭힌 한 선임병은 김 일병에게 자신이 야간 근무를 나가면서 잠을 자지 못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숨진 김 일병이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고 몰래 잠을 자는 등 고통스러운 군 생활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 큰 문제는 김 일병이 가진 정신적 트라우마에도 그가 배치된 부대 조건이었다. 김 일병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신체적 약점이 있었다. 병무청 검사에서도 확인된 약점은 천둥소리 등 굉음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였다. 그런데도 군은 이런 김 일병을 기갑사단에 배치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배치였다. 이는 김 일병의 정신적 고통을 마치 상처 난 부위에 굵은 소금을 비비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김 일병에 대한 치료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군은 김 일병에게 우울증 약만 처방했을 뿐 매일 이 약을 실제 먹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이는 규정 위반이었다. 또한 수시 면담을 통해 김 일병의 상태를 파악하게 되어 있으나 이 역시 전혀 하지 않았다.

몰랐던 사실이 또 있었다. 김 일병이 자살하기 전, 이미 두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었다는 사실이었다.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고통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한 번, 그리고 커터칼로 손목을 긋는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끝내 군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나태하고 한가한 태도로 김 일병을 죽게 한 군부대 측은 사고가 나자 완전히 달라졌다. 김 일병의 죽음이 부대 책임이 아님을 제시하기 위한 은폐 과정은 놀랄 만큼 재빨랐다. 먼저 그들은 관심 사병이었던 김 일병에 대한 관리 소홀을 은폐하고자 허위로 면담 기록을 만들어 냈다.

또한 우울증 약도 정상적으로 지급하여 눈 앞에서 잘 먹었다고 헌병대 수사에서 허위 진술하게 했다. 이처럼 허위 진술을 강요한 이는 부대 중대장이었으며 그 지시를 받은 사람은 바로 김 일병에게 사죄 글을 썼던 김준수씨였다. 이런 방식으로 당시 부대 중대장과 분대장, 행정보급관, 소대장 등이 공모했고 결국 김 일병의 죽음은 철저히 조작되었다.

진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렇게라도 그 책임을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송 진행 과정에서 입수한 군 내부 문서를 통해 아버지는 새로운 사실을 또 알게 된다. 자신이 받지도 않은 조의금을 군 간부가 전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들 장례 과정에서 자신이 받은 돈이 없는데 무슨 말인가 싶었던 것이다. 이에 아버지는 국민 권익위원회(아래 권익위)에 이를 진정하게 된다. 죽은 아들을 순직 처리하고 조의금 의혹을 규명해 달라는 진정이었다.

밝혀진 조의금 횡령 내막

2011년 12월, 육군 모 보병사단 소속 김아무개 일병이 목매어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 20세. 군은 헌병대 수사 결과, 김 일병의 죽음은 부대 잘못과는 상관없는 개인적 원인에 의해 자살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1년 12월, 육군 모 보병사단 소속 김아무개 일병이 목매어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 20세. 군은 헌병대 수사 결과, 김 일병의 죽음은 부대 잘못과는 상관없는 개인적 원인에 의해 자살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2014년 2월 24일, 국민 권익위는 진정 받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세상에 공개했다. 보고서에 담긴 조의금이 실제 어디에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진실이었다.

권익위 조사 결과, 당시 모은 김 일병의 조의금은 158만5000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전달했다던 이 돈은 김 일병 사망 원인을 조사하던 사단 헌병대와 기무반장 등에게 격려비로 전달된 것을 확인했다. 이는 매우 부도덕한 행위였다. 죽은 군인의 사망 원인을 조사하는 헌병대가 조사 대상인 군부대로부터 사실상 로비 금품을 받은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조의금은 더 많은 이에게 전달되었다. 예를 들어 부대 대대장에게는 30만 원이, 그리고 대대와 여단 주임원사에게도 80만 원이 격려비로 전달되었다. 부하 군인이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지휘관들에게 조의금으로 격려비가 전달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조의금을 사용하도록 한 이는 바로 이 부대 최고 지휘관이었던 도아무개 여단장이었다.

권익위 발표 후 사실을 알게 된 국민들은 공분했다. 김관진 당시 국방장관까지 분노했고, 군 검찰의 수사를 지시했다. 그러자 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군 측은 2011년 연말에 부대 여단장과 주임원사, 인사행정관 등 부대 간부들이 전원 참석한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그 비용 역시 횡령된 조의금 중 일부였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인사 행정관의 경우는 군 조의금 외에도 일반 조문객의 돈 120만 원을 개인적으로 착복한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여단장을 비롯한 3명이 횡령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것이 바로 조의금 횡령 사건의 전모였다.

나는 이 사건 전말을 살펴보며 다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과연 김 일병 사건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래서 알게 된 군의 추악한 범죄, 바로 군 영현비 횡령 사건의 진실이었다. 영현비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지난 2001년부터 2014년 현재까지 군은 복무 중인 군인이 사망할 경우 세금으로 장례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이를 '영현비'라고 부른다.

그래서 2001년 이후 2011년 사이에 지원한 영현비는 크게 세 가지를 합쳐서 267만4000원을 장례 비용으로 지원했는데 이는 유가족 접대비 167만4000원, 장의비 80만 원, 화장비 20만 원이었다. 그런데 이중 유가족 접대비 167만4000원은 원래 유가족에게 지급해야 하는 돈이지만, 만약 유가족이 동의할 경우에는 장례 비용으로 합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장의비로 나온 80만 원만 가지고는 사실상 장례를 치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전 동의였다. 2001년부터 2011년 사이에 일을 당한 유족에게 유가족 접대비로 167만4000원이 지급되고, 다만 이를 사전 동의하면 장례 비용으로 군이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물어보자 대부분의 유족이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군 측에서 누구도 이런 사실을 유족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이 돈에 대해 무슨 사전 동의가 있었겠는가.

사전에 알려주지도 않았으니 사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 측은 유족에게 이런 돈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지 않은 채 제멋대로 돈을 쓴 후 자연스럽게 그 정산 결과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주인 없는 눈먼 돈처럼 쓴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일부 유족에게 정산 결과를 알려준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알려준 이유를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유족 주장에 의하면, 군인들이 무슨 돈인지 모르지만 제멋대로 술과 밥, 그리고 고기와 떡 등을 사와 조문을 이유로 장례식장을 찾아와 먹어 치웠다고 한다. 나에게 돈을 달라고 해서 사온 것도 아니니 간섭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례가 끝난 후였다. 발인하는 날, 군인이 찾아와 프린트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그 사실, 국가에서 영현비로 267만4000원이 나왔는데 장례 비용이 초과하였다며 그 초과분을 달라는 요구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유족은 황당했다고 한다. 유족 주장은 이렇다. 대부분의 유족은 자살로 아들이 죽었다는데 누구에게 부고를 알릴 수 있겠냐고 말했다. 그래서 고작 가까운 친형제에게나 알려 20~30여 명의 조문객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런데 가져온 정산서에서는 수백만 원의 영현비를 전부 썼다고 하는 것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 비용을 달라고 하니 어처구니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실상 그 비용이 매일 조문을 이유로 찾아와 술과 고기, 밥과 국과 떡, 과일, 음료수를 먹은 군인들의 음식값이라고 했다. 즉, 내 아들은 죽었는데 군 간부들은 회식을 한 것이라며 분개했다.

횡령된 유족 돈, 최소 68명... 그러나 더 있다

지난 9월 22일 JTBC <뉴스룸>이 군 영현비에 관해 보도했다.
 지난 9월 22일 JTBC <뉴스룸>이 군 영현비에 관해 보도했다.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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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2012년 이후 군 영현비 사용 실태였다. 일선 부대에서 유족에게 지원해야 할 영현비를 부정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국방부는 2012년부터 영현비 집행 계획을 다시 수립하게 된다. 그동안 지원해 온 영현비 267만4000원이 너무 적어 사실상 사전 동의를 받아 유가족 돈까지 다 쓴다고 하자 이를 현실화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2012년 이후 군은 이전까지 사전 동의를 받을 경우 장의비용에 쓸 수 있도록 했던 유가족 접대비 167만4000원은 건드리지 말고 무조건 유족에게 통장 입금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대신 부족한 장의비용을 현실화한다며 기존 80만 원이었던 장의비를 350만 원으로, 20만 원이었던 화장비는 50만 원으로 각각 늘려 총 300만 원을 늘려 영현비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내가 보좌관으로 일하는 김광진 의원실에서 그 실태를 확인한 결과, 육군의 도덕적 해이감은 여전했다. 유족 동의도 없이 유족의 돈을 제멋대로 써 왔던 군이 규정이 바뀐 이후에도 유족의 돈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 횡령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제일 처음 확인된 사례는 22사단에서 숨진 신아무개 이병 건이었다. 임 병장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지고 4일이 지난 2014년 7월 27일, 22사에서 신 이병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나는 그 부모에게 아들 장례를 마친 후 군부대 측으로부터 유가족 접대비 167만4000원을 받은 사실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자 다른 유족들처럼 신 이병의 부모 역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다. 그런 돈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역시나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신 이병 부모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육군본부에 2014년 영현비 집행 내역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려 받게 된 육군 문서에서는 한 명의 유족도 빠짐없이 167만4000원을 정상 입금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2014년 1월부터 7월까지 모두 69건의 영현비 집행이 있었는데 완벽하게 처리되었다는 자료였다.

나는 이 자료를 가져온 육군 관계자에게 "정말 통장에 입금한 서류를 다 확인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그럼 유족이 접대비를 받고도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냐"고 다시 묻자, 그는 "그런 것 같다"고 재차 확인했다.

그때였다. 나는 그가 가져온 자료 중 22사단 신 이병을 지목하며 "여기 이 유족에게 통장 입금한 영수증을 지금 당장 의원실 팩스로 받아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잠시 후, 확인된 진실은 거짓이었다. 그들은 입금하지 않았다. 허위 자료를 제출한 것이었다.

2014년 10월 7일, 김광진 새정치연합 의원이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더 놀라운 사실을 폭로했다. 육군의 거짓말은 1건이 아니었다. 육군이 집행한 2012년부터 2014년 9월 사이 영현비는 모두 360건이었으며 이중 유족에게 입금해야 할 돈 중 최소 68명의 돈이 횡령된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이는 아직 확인되지 못한 공군, 해군, 해병대까지 최종적으로 확인하면 더욱 늘어날 것이다.

집요한 추적 끝에 이 사실이 드러나자 군의 태도는 더욱 가증스러웠다. 유족 돈을 가로챈 것도 부족하여 이번엔 가로챈 이 돈을 유족 동의로 썼다며 새로운 거짓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정말 기가 막힌 거짓말이다. 먼저 2012년 이후 유가족 접대비는 설령 유가족 동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통장에 입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육군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돈은 무조건 유족의 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은 유족에게 이를 알려주지도 않고 장의비용에 전부 썼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는 형법상 유용죄에 해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유족에게 주지 않은 이 돈이 과연 장의비용으로 다 썼을까 하는 의문이다. 유족은 이 점을 의심하고 있다. 군이 정산 영수증을 보여준 적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족은 정말 군이 영현비를 어디에 썼는지 진실을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군이 아닌 국민 권익위가 전수 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달라고 지난 9월 24일 진정서를 제출했다. 권익위는 현재 육군뿐만 아니라 전국에 영현비 집행 관련 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했고 결과는 조만간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다시 시작된 추악한 조작, '유족 동의서'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군은 다시 두 번째 조작에 나섰다. 2014년에 유가족 접대비를 입금하지 않은 유족들을 상대로 "장의비용에 사용해도 좋다는 동의서를 받았다. 그러니 횡령은 아니다"며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나는 육군 측에 "그렇다면 그 동의서 사본을 전부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받은 동의서를 확인하며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모두 7명의 동의서 중 다른 6명의 유족 인적 사항도 알려주지 않아 정말 이 동의서가 자의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처음 우리가 확인한 신 이병의 유족 동의서도 거기에 같이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정말이지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이 돈은 유족 동의를 얻는다 해도 다른 곳에 쓸 수 없는 돈이었다. 그런데 유족 동의를 받았으니 괜찮다는 식의 변명을 하려고 규정에도 없는 동의서를 받아 근거라며 제출한 군의 행태는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더 끔찍한 비밀은 이 동의서가 어떤 경위로 만들어진 것인가였다. 8월 25일, 이날 육군이 의원실에 허위로 제출한 문서가 들통 났다. 나는 실제 지급하지도 않고 지급했다며 거짓 보고한 것에 항의하며 가져온 문서를 수용할 수 없다고 화를 냈다.

그러자 육군 측은 이를 어떻게 모면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9월 12일, 신 이병의 부모가 부대를 방문하겠다며 연락을 했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은 아들의 영혼을 사망한 장소에서 모셔와 위로하는 의식을 하고자 방문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의외로 부대 측이 반색을 하며 어서 오시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날 오후, 모든 의식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려는 아버지에게 부대 책임자가 찾아와 서류 한 장을 내밀며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바로 문제의 '유가족 접대비 사용 동의서'였다.

신 이병의 아버지는 처음에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의 혼을 모시고 빨리 가야 한다는 가족들의 재촉과 서명을 하지 않으면 보내 드릴 수 없다며 무작정 붙잡는 군부대 측 사이에서 그만 아버지가 서명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나와의 통화에서 "내가 순간 당황해서 큰 실수를 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서 화를 냈는데 아들 혼을 모시고 빨리 의식 거행을 위해 가려다 보니 판단을 잘 못했다"며 후회했다. 바로 이것이 육군이 정당한 집행이었다며 변명한 유족 동의서 작성의 전말이었다. 이것 가지고 동의를 받은 것이라며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국방부, 유족에게 사과하고 조치 취해야

마지막으로 권익위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의혹은 유가족 접대비 외에도 장의비로 집행되었다는 350만 원의 진짜 집행 내역이다. 정말 이 돈이 어찌 쓰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유족 누구도 영수증을 본 사람이 없다. 정말 이 돈이 장례 비용으로 전액 사용되었는지 누구도 모른다. 그래서 유족들은 바보같이 아들도 잃고 다시 또 속은 것이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중 신 이병의 어머니가 전한 사연은 듣고 있던 나 역시 원통하게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죽고 난 후 차마 목으로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고 한다. 영문도, 이유도 모른 채 원통하게 아들을 잃고 그 어미가 살겠다고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냐고 했다. 그래서 아들 장례 3일 동안 누군가가 권하던 커피를 몇 잔 마신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반면 군인들은 매일 조문한다며 떼로 몰려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술과 떡, 고기와 밥을 차려 식사를 했는데 그중 기억나는 것이 장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군 간부가 찾아와 부대 밖 식당에서 식사나 하자며 데리고 나간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엉거주춤 끌려갔는데 그곳 식당에서 군 간부들은 유족에게 드시고 싶은 음식을 선택하라고 하면서 마치 자기들이 밥을 사는 것처럼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자기들도 음식을 시켜 참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반면 어머니는 밥을 삼킬 수도 없어 비록 먹지는 못했지만 군 간부들이 밥까지 사주며 위로하니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돈이 전부 유족 돈이었고, 그런 돈으로 생색내며 군이 제멋대로 돈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격분했다. 만약 이 사실을 의원실에서 알려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속았을 것이라며 어머니는 고맙다고 했다.

나는 지켜줘야 할 남의 귀한 아들도 결과적으로 죽게 하고 또 그런 아들을 위해 들어온 조의금을 횡령하여 삼겹살 파티를 하는, 그리고 다시 유족의 돈까지 눈먼 돈 취급하며 흥청망청 사용한 일부 군인의 행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정말 말이 되나. 나는 끝까지 묻고 확인하겠다.

그리하여 지금,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거짓과 변명으로 다시 진실을 은폐하려는 행위에 결연하게 맞설 것이다. 다시는 부도덕한 행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함께 분노해 달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고상만 기자는 국회 김광진 의원실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군 영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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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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