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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추석은 일년 중 내게 제일 바쁘면서도 신나는 날이었다. 종가 집이라 제사가 일 년에도 십 수번이어서 제사상 차리고 제사를 지냈다. 집 안에서 막내라 어머니를 도와 수발 노릇을 하느라 바빴어도 추석에는 일가친척들 뿐 아니라 아버지 손님들도 많이 와서 늘 새롭고 신 나는 명절이었다.

그리고 결혼해서 홀로서기 할 때까지의 17년 간도 나는 맏며느리이자 외며느리로서 추석은 참 바빴다. 제사는 하지 않지만, 수십 명의 일가친척 음식을 거의 다 맡아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만 해도 추석 명절에 여행 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이해도, 실감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추석 명절에 비행기를 타고 자유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동안 여행은 출장이나 문화 답사나 패키지로 했지만, 숙식과 가볼 만한 곳을 모두 자율로 선택해서 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모두 나름대로 의미있고 힘들게 살아가는 세 모녀가 각자 더치페이로 해서 가기로 한 여행이다.

행선지는 싱가폴이었는데 이번 여행은 내게는 치유와 세 모녀의 건강한 내일과 화합을 위한 멋진 오늘이었고, 치열한 직장생활을 하는 딸들에게는 충전의 시간이었다. 자유 여행은 정말로 패키지와 다른 게 있다. 참 많이 걷는다는 것이다.

지하철과 시티투어버스와 택시 등 대중교통을 적절히 이용하긴했지만, 아이들은 원하는 곳을 찾아서 이동하는 데 몇 시간 걷는 것은 예사였다. 작은 인도마을에서는 이전에 인도에 갔던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사원과 신에게 바치는 꽃가게가 참 많았다. 중국인들의 시장역시 중국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만큼 토속적인 냄새가 진하였으며 곳곳에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인도의 여신에게 바치는 꽃을 파는 가게.
 인도의 여신에게 바치는 꽃을 파는 가게.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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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은 나라이기보다 그냥 도시같았지만, 볼 거리와 즐길거리 등 오감만족이 되는 문화적이면서도 격조있는 토속의 느낌을 주는 것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즐겁고 깨끗하고 편리하게. 그래서 주머니를 아낌없이 털어도 아깝지 않게.

20여년 전 싱가폴에 살았던 지인들은 그곳은 볼 것이 없다고 말할만큼 단기간에 꾸며서 만들었지만,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은 바로 싱가폴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진솔함이 주는 강한 국력의 느낌이었다. 집안이 2대째 총리를 지내서 독재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투명하고 청렴한 수준높은 정치도 한 힘을 보탠 것 같다.

내가 서예가라서 제일 눈에 많이 들어오는 것이 대만과 중국처럼 이곳도 가게마다 있는 격조높은 다양한 서체의 한문글자였다. 국적 불명의 단어를 급조된 글자로 간판하여 거리를 장식한 우리나라와 완연이 다르다. 문화의 힘이란 것은 '온고지신'의 거름이 바탕이 되는 것을 간판이 잘 표현해 준다.

국적불명의 우리나라 간판용어와 급조된 글자체가 많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싱가폴도 대만이나 중국처럼 간판들은 멋진 서예 경지의 글자체가 많았다.
▲ 멋진 행서체의 간판글씨 국적불명의 우리나라 간판용어와 급조된 글자체가 많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싱가폴도 대만이나 중국처럼 간판들은 멋진 서예 경지의 글자체가 많았다.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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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는 한 여름 전교 조회 시간에 어김없이 기절하여 조회 분위기를 깨고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이 빈번해 아예 교실에 남아 있던 일이 많았던 특이체질인 나였다. 그래서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한 낮의 온도가 아직도 30도가 넘는 그 곳에서의 걷기는 내게 참 힘이 들었다.

걷기보다 더 힘든 것은 밖의 온도와 실내의 온도차가 너무 커서 내 몸이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후덥지근하게 진땀을 흘리다가 산소가 통하지 않고 에어콘이 장시간 켜져 있었던 택시를 타서 갑자기 호흡곤란이 일어나 기절할 뻔해 딸들이 기겁했던 일도 생겼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 후유증으로 입가에 포진도 생기고 조금 나으려고 했던 기침도 다시 재발해서 심해졌다. 여행 느낌은 산뜻한 치유와 새로운 활기를 주는 충전이었지만, 타고난 특이체질과 나이는 못 속이는지 몸은 정직하게 반응한다.

머리는 텅 비어지고 새로운 느낌에 신선하고 즐거워했고, 가슴 또한 따스한 온기와 더불어 묵혀놓았던 어떤 것들이 삭아진 느낌이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다.

센토사섬의 유니버셜 영화사가 세운 트랜스포드 4D체험과 이집트 나일강의 탐험같은 아찔하고 짜릿했던 기억도 강렬하다. 그리고 마리나샌드호텔의 57층의 새 세상같은 곳에서 본 일몰의 충만한 느낌과 정직하게 드러나는 몸의 후유증도 시간의 강 흐름과 더불어 떠내려가고 희미할 것이다.

센토스섬 안에 유니버셜 여행사가 만든 곳 입구.
 센토스섬 안에 유니버셜 여행사가 만든 곳 입구.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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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을 기억과 선물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은 기억 하나는 그 곳에서 주워 얻어 들은 한국말들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족 간의 미묘한 느낌들이 준 '선물'과 '흥'의 발견이다.

센토사섬에서 세계에 4곳 밖에 없다는 바이크를 헬멧 쓰고 스릴 있게 타고 산 허리를 구비 구비 돌며 내려 간 후 다시 리프트를 타고 올라와야했다.

영어를 잘해서 안내를 잘 들은 딸들과 달리 나는 그냥 평소처럼 다소곳이 앉았는데 안내 청년이 로프를 매야 하는데 내 자세가 못마땅했는지 갑자기 "아줌마! 다리쩍 벌려!"하고 한국 말을 했다. 딸아이들은 웃었지만, 나는 너무 놀랐다.

그리고 해가 질 때만 도심 한가운데 빌딩 옆 지하철 역 앞에 생기는 노천꼬치구이 거리에서 제일 맛있다는 블로거의 안내를 미리 검색해서 찾아간 7번과 8번천막에서 다양한 꼬치구이를 주문할 때 중국사람인지 인도네시아 사람인지 태생이 불분명한 싱가폴 사람이 "새우는 이모가 발가 벗겨 까줘!"하고 말했는데 그 말을 하자 마자, 딸들은 까르르 웃으며 내게 전해주었다.

그곳의 밤 식물원공원에서 본 중추절 달은 여새 내가 본 어느 달보다 밝고 훤했다. 식물원은 안에도 황제의 정원이상 가게 잘 해 놓았지만, 밖에도 꽃과 빛으로 이루어진 꽃탑을 열개 이상 만들어 맘 바다 꽃빛의 춤 축제를 펼쳤다. 참, 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시원한 공원바람을 맞으며 산책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 가만히 누워서 펼쳐지는 꽃의 빛춤 사진을 찍었다.

누워서 찍은 싱가폴 식물원탑. 이런 거대한 식물탑이 10개쯤 있었고 밤이면 여기서 다양한 빛의 꽃들이 움직이고 피었다.
 누워서 찍은 싱가폴 식물원탑. 이런 거대한 식물탑이 10개쯤 있었고 밤이면 여기서 다양한 빛의 꽃들이 움직이고 피었다.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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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그리고 서울과 충청도에서 살면서 명절이면 항상 손님치르고 음식 만들면서 지내와서 한 번도 제대로 중추절 달을 그리 본 적이 없었는가 몰라도 올해 추석달은 유난히 밝고 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올해는 슈퍼문이라고 부르는 달이었다. 그곳에 몰려든 싱카폴 시민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연등을 띄워 소원을 비는 모습이었다.

자유 여행에서는 정해진 패턴이 없어 돌발적인 일이 잘 일어난다. 그리고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미묘한 그러한 기류도 흐르기도 한다. 피곤이 극한에 달하면 조금씩 예민해져서 어떤 사소한 말 한 마디도 못이 되어 따금따금하게 심장을 찌른다.

일이 예정대로 잘 풀릴 때는 누구나 순하게 되기도 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누구나 조금만 건드리면 숨어버리는 달팽이나 아니면 자기방어를 하는 고슴도치가 되기도 한다.자유 여행은 따끔한 것을 견뎌내고 하고 또는 자기안에 든 달팽이와 고슴도치를 발견해가게 하는 참 좋은 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

막내 아이가 큰 아이와 내가 맥주를 먹었던 지난 일을 가지고 내가 언잖아하고 언성을 약간 높이는 것을 보고 말했다.

"엄마! 언니와 엄마가 아무것도 아닌 일과 말들을 가지고 그렇게 자존감과 감정을 드러내니 언니와 엄마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았어! 사실 나도 친구들과 또는 회사동료들과 그런 비슷한 일들이 있었거든!"

막내가 이 말을 하는 순간 나는 이번 자유 여행에서 싱가폴에서 많은 경비를 들여서 보러다니고 느끼고 맛 본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소중한 선물을 얻었다는 감사함이 들었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바로 보기가 힘든 것은 세상의 그 어느 험난한 산과 강과 바다와 나라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엄마와 언니가 있는 도시를 떠나 넓은 곳에서 사회생활을 한 지 아직 1년이 채 안 된 햇병아리 신입사원인 막내가 이러한 느낌을 얻어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조심할 수 있다는 것은 세파라는 파도를 잘 탈 수 있는 수영기술을 배워간다는 것을 말한다.

건강에 자신이 없고 가진 재산도 별로 없는 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것을 하나씩 깨달아 가는 것이 제일 소중하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면서 큰 아이가 다시 내게 말해준 것은 더 할 것 없이 참 고맙게 들렸다.

"엄마! 엄마는 귀가 안 들리는데도 이만큼 살아낼 수 있는 것을 보면 귀가 잘 들렸다면 분명히 뭔가 한 가닥했을 꺼야! 왜냐하면 우리 성인 집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빠에게도 없는데 엄마에게는 '흥'이 있고 나와 동생이 그 '흥'을 물려 받은 것 같아 너무 좋거든!"

노래도 춤도 못하고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내게서 이들이 보이지 않는'흥'을 느꼈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날 일몰이 지나고 한참 후 숙소에 들어가서 나는 베란다에서 싱가폴의 고즈넉한 강빛과 하늘빛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욕심에 마음을 기울이기보다 지금 현재에 충실하고 감사하기를. 더 나은 내일은 오늘의 충실함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숙소에서 본 일몰 후의 고즈넉한 강빛과 하늘빛.
 숙소에서 본 일몰 후의 고즈넉한 강빛과 하늘빛.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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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날은 이틀이나 났지만 달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새벽 6시에도 여전히 둥근 모습을 환하게 보여주고 있고 베란다에 씨를 뿌려 자란 허브도 바람따라 춤을 추고 있고 붓꽃도 빨간 나팔 노란 나팔을 여러개 불고 있다.


태그:#서예가 이영미, #추석여행, #싱가콜여행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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