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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물, 인천항 통해 조선으로

1883년 인천항 개항은 강화도 조약에 따라 외세에 의해 강요된 개항이다. 조선은 서구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기 못하고, 일본인의 시각에 의해 굴절된 문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강화도조약에 따르면, 조선은 3개 '포'를 개항하기로 했다. 바로 부산포, 원산포, 제물포다. 현재 우리는 항구라고 부르는데, 이는 일본말 '미나또'에서 온 것이다. 우리말로는 '포'라 불렀다.

'1883년 인천항 개항'은 국내 기록에 있는 게 아니라 일본 관보에 실린 내용이다. 1883년 1월 1일자 일본 관보에 "조선 제물포를 개항하니 상민들은 가서 장사해도 좋다"는 내용이 실렸다. 당시 조선은 통관·세관·관세·출입국 등을 몰랐고, 개항 준비 역시 일본 사람들이 맡았다. 그야말로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개항이었다.

개항 후 인천에 새로운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자장면과 사이다만이 처음 탄생한 것은 아니다. 국내 최초로 팔미도와 소월미도에 등대가 들어섰고, 선교사 아펜젤러 기록을 보면 1885년 4월 5일 국내 최초로 호텔(=대불호텔)이 들어섰다.

1898년 최초로 기차가 인천에서 출발했고(시발점은 노량진이 아니라 인천역이다. 뉴욕 brooks사가 제조한 걸 분리해 싣고 와 조립해 인천에서 서울로 출발했다), 1884년 11월 17일엔 국내 최초의 우정총국 인천본국이 개국, 우리나라 우정사(郵政史)에 신기원을 열었다.

1880년대에 국내 최초로 서양 사람에 의해 성냥공장이 탄생했고, 전화도 처음 부설됐고, 담배공장도 처음 생겼다. 국내 최초의 극장이 서울 '협률사'로 알려져 있지만, 인천에서 1895년에 애관극장의 전신인 협률사(훗날 축항사로, 다시 애관극장으로)가 문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1883년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제일국립은행 인천출장소를 인천 중구 중앙동에 개설(1883)하자, 외국자본세력의 진출에 자극받은 인천의 민족자본세력은 국내 상권 수호를 위해 1885년에 인천객주회(인천상공회의소의 전신)를 설립했으며, 오늘날 선물 거래소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미두취인소가 1896년에 문을 열었다.

이렇게 인천에 신문물이 들어설 때 조선의 민초들은 조정의 부패와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국의 민초들은 인천항 개항 후 생겨나기 시작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인천항 개항 후 20세기 ‘경제 개발기’형 산업체와 인재가 인천을 찾았다면, 21세기 인천국제공항 개항과 인천경제자유구역 지정으로 이젠 ‘21세기’형 첨단산업체, 물류ㆍ금융 등 서비스업체와 인재가 인천을 찾고 있다.
▲ 인천국제공항 인천항 개항 후 20세기 ‘경제 개발기’형 산업체와 인재가 인천을 찾았다면, 21세기 인천국제공항 개항과 인천경제자유구역 지정으로 이젠 ‘21세기’형 첨단산업체, 물류ㆍ금융 등 서비스업체와 인재가 인천을 찾고 있다.
ⓒ 시사인천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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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도 사람들 '해불양수'의 도시로

전국 8도에서 인천에 올라온 이들은 봉건체제 사고의 틀을, 전근대적 사고의 틀을 스스로 부수고 나온 개척자(프런티어)였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용기와 능력으로 누르고 인천에 오기 시작한 것이다.

인천에서 발생한 일자리는 농어업이 아니었다. 등대를 다루려면 기계와 전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호텔에서 일을 하려면 최소한 중국어나 일본어, 영어 중 하나는 해야 했다. 또 우편을 배달하려 해도 최소한 행서 정도는 읽을 수 있어야 했다.

이를 두고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은 "8도에서 능력 있고 용기 있는, 낡은 체제와 사고의 틀을 부순 이들이 인천에 오기 시작했다. 이게 오늘날 인천의 밑바탕이 됐다. 신문물이 도입됐는데 이에 대한 이해와 실력을 배제한 채 지역이나 학연, 혈연에 의해 인재를 선발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인천은 능력을 보고 사람을 선택했다. 그렇게 인천에서 새로 생긴 변화는 8도로 퍼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개항 후 인천의 풍경은, 사람을 출신성분이 아니라 그가 지닌 능력을 토대로 보기 시작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인천의 이 같은 특성을 '해불양수'라 했다. 바다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천은 살기 위해서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포용했다. 8도에서, 심지어 외국에서도 모여들다보니 따로 특정지역 세력이 주인일 수 없는 도시이며,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시가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개항 후 인천에는 군수산업·자동차산업·철강산업, 중공업, 수출산업공단 지정 등으로 일자리가 더 늘었고, 이 일자리를 찾아 각지에서 모여 들었으며, 인천은 인구 1만의 경기만의 제물포에서 300만 도시로 거듭났다.

인천공항 개항, 세계로 세계로

인천의 가장 큰 변화는 1883년 개항, 1960~70년대 수출산업단지 가동, 1985년 500만 평 규모의 남동공단 가동,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2001년 인천국제공항 개항, 2003년 인천경제자유구역 지정이다.

인천항 개항이 외세에 의한 강제 개항이라면, 2001년 인천국제공항 개항은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 스스로 결정한 개항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인천상공회의소가 매출액 10억 원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2003~2008년 인천의 전출입을 분석한 결과, 기업체 613개가 인천을 떠났고, 492개가 인천을 찾았다.

인천을 떠난 기업체들은 주로 경기도로 이전했다. 65.3%가 경기도으로 이전했고, 다음으로 서울(16.6%)과 충청권(8%)이 많았다. 인천에 온 기업은 경기도와 서울이 각각 49.7%와 42.0%를 차지했다.

이는 산업구조의 변화를 시사한다. 또 인천이 지닌 좋은 물류환경과 수도권 배후 시장의 이점, 노동인력 수급의 안정성 등이 작용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인천의 산업구조는 특히 경제자유구역을 선두로 재편되고 있다. 기존 자동차·철강 산업과 중공업, 전자·기계부품, 목재산업 이외에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 등 바이오산업이 문을 열었고, 스태치코리아와 앰코테크놀로지 등 반도체 업체가 영종도와 송도에 입주할 예정이다.

인천국제공항만 해도 공항 운영을 포함한 연관 산업에 4만 5000여 명이 종사하고 있다. 인천항도 인천남항 국제여객터미널과 인천신항이 개장하고, 이는 한-중 '해운 자유화' 협정이 체결되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더욱 활성화될 전망이다.

김재식 인천상공회의소 부장은 "인천항 개항 후 20세기 '경제 개발기'형 산업체와 인재가 인천을 찾았다면, 21세기 인천국제공항 개항과 인천경제자유구역 지정으로 이젠 '21세기'형 첨단산업체, 물류·금융 등 서비스업체와 인재가 인천을 찾고 있다.

이들은 21세기 프런티어다. 인천은 '21세기'형 인재를 육성하고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나아가 동북아는 물론 세계 각 지역의 인재들을 인천에 오게 해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 인천이 동북아 국제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하지만 인천을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인천은, 꿈을 찾아왔지만 때가 되면 언제든 떠나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다룰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인천, #개항, #인천항, #인천국제공항, #인천경제자유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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