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4월 16일 세월호에서 가장 외로웠던 선원들의 이야기가 알려졌다. 2~3일 광주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임정엽) 심리로 열린 세월호 선원들의 공판에선 조리부원 김아무개(60)씨와 이아무개(56)씨의 이름이 언급됐다. 사고 당일 두 사람은 부상을 입은 채 동료들로부터 버려졌고,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아무개 조리수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고, 이아무개 조리원은 굴러 떨어진 충격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고 묘사했다. 또 "기관부 소속 피고인 7명은 9시 38분경 해경 구조단정이 세월호 좌현으로 접근하자 두 사람에게 아무런 구호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퇴선했다"고 했다.

2~3일 피고인 신문을 받은 기관부 선원 세 명은 대체로 공소장에 담긴 사실관계를 인정하는 편이었다. 다만 '디테일'에선 미묘하게 다른 진술을 했다.

"의식 없고 미동도 안해... 죽었다고 생각했다"

손아무개(57) 1등 기관사와 이아무개(25) 기관사는 두 사람이 의식이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 기관사는 "김 조리수가 살아계시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3일 "두 사람이 갑자기 우현 복도 쪽에서 날아오듯 굴러 떨어졌는데 김 조리수는 머리부터 떨어져서 재떨이에 부딪쳤다"며 "전혀 미동이 없었고, 신음도 하지 않은데다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아무개(56) 조기수는 같은 날 "김 조리수가 신음소리를 냈다"고 증언했다.

손아무개 기관사의 경우 다친 이 조리원을 직접 돌봤다. 그는 2일 "박아무개 기관장에게 '이 조리원 머리에 피가 나는데 뇌진탕 같다'고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손 기관사는 포개진 다리를 편하게 풀어주려고 하자 이 조리원은 '허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또 몇 차례 주물러줬는데,"기관장이 '식당아줌마를 다시 한 번 확인하라'고 해서 어깨를 흔들었더니 움직임도 없고,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그렇다해도 동료들을 데리고 나와야 하지 않았냐는 취지로 여러 번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들은 조리부원들을 놔둔 채 세월호를 빠져나왔다.

"생각을 못했다."

손 기관사와 이 기관사의 해명이었다. 다소 의사 표현이 불분명했던 이 조기수는 "모르겠다"고만 했다. 

검사 : "객실 선내전화로 조타실이나 안내데스크에 연락하거나 본인이 갖고 있던 휴대전화로 해경에 '응급환자가 있다'고 신고하지 않았나."
손 기관사 : "안 해봤다. 당시 그분들을 안전하게 옮기려면 들것 같은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방에서 침대보를 가져와 연결하려고 했는데 기관장이 '(객실로) 내려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또 변명 같지만… 제가 기관부라서 그동안 배를 타면서도 이런 사고가 났을 때 외부에 연락하는 걸 안 해봤다. 그래서 해경하고 연락한다는 것도 생각을 못했다."

검사 : "응급처치 교육을 받았는데, 왜 하지 않았나."
이 기관사 : "심폐소생술이랑 붕대 감는 법 등을 배우긴 했는데 막상 그런 걸 겪으니(피흘리며 쓰러진 모습을 보니)… 잘 못했다."

검사는 황당하다는 어투로 이 기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검사 : "김 조리수와 이 조리원, 전혀 모르는 사람 아니죠? 평소에 얼굴 다 알던 사람들이 다쳐서 바로 옆에 있는데도, 다친 모습을 보기 어려워서 응급조치를 안 했다는 말인가."
이 기관사 : "…음…그게 ……."

뒤늦게야 말한 이유는... 죄책감? 처벌이 두려워서?

기관부 선원들은 3층 좌현 갑판으로 나와 해경 구명보트에 올라탈 때에도 '부상 입은 조리부원들이 안에 남아 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 기관사는 경찰 조사를 받을 때에야, 손 기관사는 검찰 조사를 받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손 기관사는 죄책감이 커서 뒤늦게 진술하기도 했지만,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박 기관장이 '함구하라'는 뜻이 담긴 세 글자를 말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 기관사는 선원들끼리 입 맞춘 적은 없다고 했다. 또 자신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대기 중에 승객은 본 적 없는데 조리부 아줌마와 아저씨는 옆에 있었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기관사는 두 사람이 어떤 상태였는지, 자신들이 두고나왔는지 등은 "(경찰이) 바빠서 자세하게는 얘기 안 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피고인들이 버리고 나와서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돌아가신 것 같다'는 검사의 물음에 "네 무척 반성하고 있다"고 답했다.

동료들에게 외면당한 조리부원들은 한참 후에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김 조리수는 사고 발생 52일 만인 6월 6일, 이 조리원은 사고 94일째인 7월 18일에야 뭍으로 올라왔다. 김 조리수는 3층 선미 좌현 선원 객실 쪽에서, 이 조리원은 같은 층 식당에서 발견됐다. 모두 기관부 선원들이 대기하고 있던 장소 부근이었다.


태그:#세월호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