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중위의 솔직한 느낌을 듣고 나 역시 먹먹해졌다. 다시 물었다. 양심선언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았느냐고. 이 중위는 "양심선언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이 용기 내어 한 양심선언을 자신과 함께했던 부대원 500명 전부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을 때, 그래서 절망의 심정으로 헌병대 영창에 갇혀 있을 때였다.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한 헌병이 조용히 다가오더니 그가 갇혀 있는 철창 안으로 쪽지 하나를 넣어주고 황급히 사라졌다. 그것을 주워 몰래 펼쳐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지문 중위님, 저는 이 중위님이 말씀하신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반드시 그 진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고맙습니다."-<다시, 사람이다>에서

이지문 중위는 1992년 3월 22일, 국회의원 총선을 앞둔 시점에 총체적인 군 부재자 부정투표를 폭로한 인물이다. 당시 그가 폭로한 사실은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 그러나 그가 양심선언을 하기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아 계속되고 있었던 것. 부정투표 거부로 수많은 장병들이 희생되었음에도 말이다.

<다시, 사람이다>책표지.
 <다시, 사람이다>책표지.
ⓒ 책담

관련사진보기

군대 내의 이와 같은 부정투표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의 용기 있는 폭로 덕분에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여하간 중요한 것은 누군가는 그처럼 올바르지 못한 것을 폭로해야 했고, 그것을 이지문이라는 사람이 했으며, 이 폭로 때문에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리들 대부분 이지문 중위와 같은 사람들을 금방 잊고 만다는 것과, 이지문 중위와 같은 사람들이 대우 받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는 것이다.

인권운동가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 고상만의 <다시, 사람이다>를 통해 만난 이지문 중위가 그 후 당한 일은 너무 씁쓸하고, 안타깝다. 기자 회견 직후 구속된 그는 기소유예로 풀려나나 예정되어 있던 삼성 그룹 채용이 취소된다. 장교였던 그를 군이 이등병으로 강등해 불명예 전역시켰고, 삼성 측이 이를 핑계로 채용을 무효로 한 것이다.

동시대 사람으로서 이들에게 빚을 졌다

<다시, 사람이다> 이 책은, 이지문 중위처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중심에 있었으나 당사자가 아닌 까닭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잊혀진, 그러나 우리들이 알아야 할 이름들과 그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책이 무척 고맙기만 하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찌 알았으랴. 이지문 중위, 그에게 일어난 엄청난 일들을 말이다. 사실 그의 고발 덕분에 올 3월 11일에 전역한 내 아들이 부정선거의 수단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며,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그나마 덜 암울할 것인데 말이다.

이지문 중위를 기억하는 사람일지라도 저자가 책에 풀어놓은 이야기들 속속을 알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저자가 오랫동안 인권운동을 해오며 그들을 취재할 수 있었던 덕분에 알게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은 거의 유일할 것 같다.

바람직한 사회를 위해 용기를 내준 이지문 중위와 같은 사람들에게 동시대 사람으로서 빚을 졌다는 생각이다.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은 이와 같은 책을 통해서라도 알게 된 그들의 뜻에 동참하는 것.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며 책의 저자에게 책에 대해 물었다.

-<다시, 사람이다>란 제목이 참 와 닿는다. 뭉클한,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제목이다. 책을 읽을 예비독자들을 위해 책 제목 관련해 이야기해 달라.
"온전히 어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노동운동을 하던 전태일, 장애인으로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최정환, 영화 <변호인>속에 등장한 가공인물인 윤성두 중위, 군부대 내 부정선거를 고발했던 이지문 중위와 같은 내부고발자 등.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의 억울하거나 안타까운 사연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사람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함께 연대하여 누군가의 억울함이나 정의를 위해 싸우자'가 이 책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의심할 자유,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

-모두 아프고 씁쓸한 이야기들이다. 그래도 저자로서 좀 더 마음이 간다거나 아쉽거나 그런 이야기가 있다면?
" '영화 변호인 속 윤성두 중위 미안합니다.'다. 우리 시대 양심선언자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책에서 언급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크다.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정의와 진실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자초한 때문이다. 양심선언자가 거짓말하는 자보다 더 추앙받고 보상받을 때 우리 사회가 제대로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윤성두 중위와 같은 양심선언자들이 더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쓴 글이다.

또 하나는, '의심할 자유,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라는 글과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다'이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논외로 하고, 그 사건 자체를 의심할 자유조차 용납하지 않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현실에 대해 비판한 글이 '의심할 자유,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라는 글의 요지인데 정말 많은 분들이 꼭 한번 읽어줬으면 하는 글이다. 우리 사회가 경원시하는 동성애와 관련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글도 그렇다. 취재를 하고 글을 쓰면서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독자들 또한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

인권운동가인 고상만 시민기자.
 인권운동가인 고상만 시민기자.
ⓒ 고상만

관련사진보기

- 같은 시민기자로 기사를 읽을 때마다 '어려운 이야기들을 참 잘 해준다'란 생각이다. 기사도 책도 모두 민감한 문제, 민감한 이야기들이다. 쉽지 않을 것 같다.
"기준이 하나 있다. 사회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읽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다. 대학 다닐 때 이해 안 되는 것이 교지였다. 많은 돈을 들여 발행을 하는데 효용은 딱 하루밖에 안되더라. 발행한 당일 한권씩 들고 가 학교 스텐드에 앉을 때 깔고 앉았다가 그냥 놓고 가는 정도? 즉,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란 것이었다. 논문이라든가 어려운 용어가 가득한 글이 담겨 있으니 누가 읽겠는가.

그걸 보며 쉬운 글, 재미있는 글, 처음 한 줄을 읽으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글을 쓰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글을 쓰면 아내에게 제일 먼저 보여준 후 묻곤 한다, 재미있는가. 쉬운가. <다시, 사람이다>도 그렇게 썼다."

- 책에 미처 다루지 못한 문제나 그 주인공들도 있을 것 같다.
"사람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싶었다. 특히 우리 주변의 평범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많이 담지 못해 아쉽다. 그래서 내년쯤 '다시, 사람이다'에 이어 '또, 사람이다'란 제목으로 쓸까. 출판사 관계자가 웃더라. 그런데, 정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어떤 사건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생전에 뵈었던 법정 스님의 감춰진 이야기, 우리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운동권 친구의 아픈 이야기 등을 담은 책을 고민 중이다. 그냥 보는 세상은 참 재미없고 감동도 없지만, 인권 감수성을 가지고 바라보는 세상은 늘 감동이다. 그 감동을 더 많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전달하고 싶다. 그러자면 먼저 이 책 <다시, 사람이다>가 많이 팔려야 하는데…."

"내년 장준하 선생 40주기 맞아 <장준하 평전> 낼 계획"

- 어떻게 인권운동을 하게 됐는가. 인권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1991년 학생운동을 하던 당시 운동권 동료가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그의 분신자살 이유를 항의하던 중 구속되었다. 구치소로 끌려가던 호송 버스 안에서 '인권운동가가 되겠다. 정당한데도 힘이 없어 잡혀가는, 그리고 탄압받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심했다. 석방 후 직업적인 인권운동가로서 일을 했다. 그러면서 국가 기관의 조사관으로 장준하 선생 의문사와 군 의문사 문제를 조사하는 일을 했고, 또 친일 재산을 국가 귀속하는 조사관으로도 일하게 됐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정말 도와주고 싶은데 우리가 가진 힘이 너무 미약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때이다. 그래서 마흔 중반의 나이임에도 매일 꿈이 바뀐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경찰이나 검찰에 의해 피해를 입었거나 군의문사 사건 피해 유족을 접할 때는 특히 더 많이 아프다."

-앞으로 <오마이뉴스> 기사 쓰기, 혹은 집필 계획도 궁금하다.
"크게 두 가지를 생각중이다. 시기 별로 우리가 알아야 할 근현대사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쓰려고 한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양심선언자와 공익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쉽게 써보려고 한다.

또 하나는 개인적인 출판 계획인데, 2015년이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꼭 40주기가 되는 해다. 역사적 삶을 살았던 장준하 선생님과 의문사 조사관으로서 봤던 그 분의 생애를 담은 '장준하 평전'을 쓰려고 한다. 특히 중앙정보부가 기록했던 장준하 선생의 모습까지 담는 새로운 형태의 평전을 쓰려고 준비 중이다. 기대하셔도 좋을 것이란 약속을 드리고 싶다"

-<오마이뉴스> 독자들이나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출판사와 출간 계약을 할 때 '세상에 좋은 책은 없다'란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을 쓰는 사람들 나름 의미 있고 좋은 책을 쓰기 때문에 좋은 책과 나쁜 책이라는 분류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다만, 많이 읽히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이 있다. 그런 만큼 많은 분이 공감하는, 많이 읽히는 글을 쓰고 그런 책으로 만들자. 출판사와 약속했다. 그런데 좋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독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나 알아야 할 문제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에 많은 신경을 썼고 출판사 역시 그런 노력을 많이 한 것으로 안다. 한 꼭지만이라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그들의 이야기지만, 돌아 돌아 결국은 내 이야기'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걸 느끼고 공감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그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다시, 사람이다>(고상만)ㅣ 책담 ㅣ 2014.7.2 ㅣ 15000원



다시, 사람이다 -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뜨거운 이야기

고상만 지음, 책담(2014)


태그:#이지문 중위, #군 의문사, #군 부정투표, #고상만, #인권운동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