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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책 <산에는 꽃이 피네> 표지. 법정 스님의 유언대로 지금은 절판되어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간혹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법정 스님의 책 <산에는 꽃이 피네> 표지. 법정 스님의 유언대로 지금은 절판되어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간혹 구할 수 있을 뿐이다.
ⓒ 동쪽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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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를 읽는다.

이미 수차례 읽었음에도 마음을 다스려야 할 시점에 다시 이 책을 책꽂이에서 해방시켰다. 오랫동안 책꽂이 틈바구니에 서 있느라 힘들었겠다. 책을 읽으려면 책을 뉘여야 한다. 책에게는 누군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편안히 누워 쉬는 일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읽은 책을 다시 읽기란 내겐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이 가물거리고 생각이 나지 않아도 나름 체득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웬만해서는 꺼내 들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책은 여전히 늘 가까이하고 싶은 책이며, 다른 책들은 지인들에게 나눠주곤 하지만 '무소유' 법정 스님의 책은 소유하고 싶은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소유욕 때문이 아니라 다시 펼쳐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법정 스님은 돌아가시면서 절판을 유언으로 남기셨기에, 살아생전에 출간된 책들을 쉽사리 구할 수도 없는 까닭도 한몫한다.

책을 읽기 전 사진으로 법정 스님을 뵙는다.

'동시대에 성인이 있었구나' '그런데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가 성인이라는 것을 차마 알지 못했던 것이구나'라는 반성을 한다. 스님이 살아계실 때에도 이 세상은 그리 편안하지 못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혼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혼탁하다 못해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분의 꾸지람이 없어도,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악한 세력들이 움츠러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꾸짖어도 콧방귀나 뀔 뿐이다. 거짓 눈물을 흘리고, 그것으로 다 된 것처럼 위선을 떨어도 그냥저냥 같은 부류라는 자괴감에 빠진 것인지도.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는 정채봉 선생의 일화가 소개된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이나 자면 좋을 것 같은 여름날, 불일암에 도착하니 법정 스님이 칼로 대나무를 깎고 있었다. 졸음에 빠져 삶을 무가치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서, 깨어있기 위해서라고 한다. 자기 스스로 매서운 스승이 되어야 '홀로 사는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리할 일들이 있어 책 몇 권을 챙겨 설악산 자락에 와 있다.

숙소에서 2박 3일 동안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책 읽고, 글을 쓰면서 앞으로의 삶을 구상하기 위해서다. 신학적인 문제들을 정리하기 위해 선택한 책은 로버트 메슬의 <과정신학과 자연주의>이고. 내 삶을 좀 더 유연하게 살아가기 위한 책으로 정호승 시인의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라는 에세이집, 깊은 성찰을 더하기 위해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를 택했다.

지난 4월 16일 이후, 마음 앓이를 심하게 했다.

나도 세월호 참사의 근본원인이라고 하는 맘몬의 노예로 살았으며, 나 역시도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고작 집회나 참석하고, 서명하고, 유족들이 단식 농성하는 곳을 서성이고, 교인들에게 울분에 찬 설교를 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세상은 민낯만 보여줄 뿐, 사고의 원인규명은 물론이고 책임자처벌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숱한 의혹만 증폭되는 중이다. 게다가 내가 발을 담고 있는 기독교계는 민망하기 짝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 운운하며 유족들의 생채기에 소금을 뿌리는 행동을 신앙의 이름으로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희망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왜 여전히 '내'가 아니라 '네'가 앞장서기를 바랄 뿐인가? 뭔가 답이 필요하다. 그동안 너무 외부적이고 외향적이고 표피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다 보니 마음이 황폐해졌다.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별똥별이 하나 떨어진다.

누군가 이 시대를 성인처럼 살아가던 이가 죽을 것일까? 아니, 이미 별똥별이 우수수 떨어졌음에도 우리는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세월호 참사로 피지도 못하고 살해된 아이들이 이 시대의 성인들이었다. 그렇게 보내고도 이렇게 냉담한 시대, 그 시대의 민낯을 우리가 보는 중이다.

법정스님은 버리고 떠난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살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버리기 위해서, 나답게 살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 온 것이다. 나를 살아가려면 낡은 탈과 울타리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에서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버리고 떠난 후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것은 내 몫이 아니라 절대자의 영역이다. 그렇게 남겨두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겸손이다.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한 것까지 좌지우지하려고 든다면, 낡은 탈과 울타리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증거다. 새롭게 살고 싶은가? 자기답게 살아가야 그 길이 열린다. 그 길은 좁은 길이지만,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길이 아니지만, 오직 그 길만이 생명살림의 길이다.

주옥같은 글들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미안하다.

몰라서 그리 못 산 것이 아니라 그저 읽는 것으로 다 된 것처럼 착각했기 때문이니, 결국 안 것도 아니다. 진정한 앎이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갈 때 비로소 앎이 시작되고, 받아들이거나 때론 수정하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래야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그 삶의 질은 '따뜻한 가슴'에 있다고 스님은 말한다. '따뜻한 가슴'이 아니라 '분노하는 가슴'만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따뜻한 가슴의 발로가 아닌 미움의 발로에서 타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하다 보니 변하지 않는 현실 때문에 분노심만 쌓여가고, 그만큼 개인적인 삶은 또 얼마나 황폐해졌는지. 분노하는 가슴은 품기 쉽지만, 따뜻한 가슴은 품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 사회가 이렇게 분노로 가득한 현실인 것은 아닌지.

'행복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에 있다'고 스님은 말한다.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행복의 조건은 이렇게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에 충만한데 늘 우리는 그것을 도외시하고 특별하거나 아주 큰 것에 행복이 있을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행복에 감사할 줄 모르는 데 절대자인들 어떤 행복을 줄 수 있겠는가? 아주 작은 장난감 하나에도 아이가 너무 행복해하면 또 다른 장난감을 사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듯 행복을 주는 이가 있다면 그도 그렇지 않겠는가? '나는 행복하다'고 주문을 걸어본다. 행복의 조건들을 하나 둘 나열해 본다. 이미 행복한 모든 조건이 충만하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입추가 지났기 때문인지, 태풍 때문인지 무더운 여름의 기운이 사라졌다. 서늘함에 몸이 긴장한다. 나른하고 무력했던 여름이 몸이 깨어나는 중이다. 법정 스님의 책과 어울리는 음악인지는 모르겠지만,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마도 법정 스님도 이런 분위기라면, 클래식보다 재즈 음악이 저속하다 말하지 않고 음률에 몸을 맡기고 흔들거리며 온몸으로 음악을 받아들이셨을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내일 아침에는 가을 초입에 피어나는 꽃들과 눈 맞춤이라도 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태풍으로 바람이 심하니, 내일 아침 이슬을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산이니 어느 구석에선가 꽃은 피어나겠지.


산에는 꽃이 피네 (소책자)

법정스님 지음, 동쪽나라(=한민사)(1998)


태그:#법정, #산에는 꽃이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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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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