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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21%, 일제 강점기 끝난 해가 언제인지 모른다
직장인 가운데 21.1%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해를 모른다는 기사가 14일 언론에 실렸다. 한 온라인 강의 전문 기업이 직장인 535명을 대상으로 '광복절 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1948년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10.7%, 1950년 5.4%, 1951년 2.8%, 1919년 2.2%, 그리고 1945년 78.9%였다는 것이다.

8월 15일, 일제 강점기 35년이 끝난 '역사적인' 날이다. 이 날을 위해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버렸고, 가족과 함께 도란도란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포기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승만 등 권력집단은 친일파들과 손을 잡고 독재정치를 했고, 독립군의 자손은 가난과 저학력에 시달리며 아직도 고생 속에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8월 15일이면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을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자녀 교육을 실행하는 학부모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런 뜻에서, 빙하기부터 시작해 시대순으로 살펴보고 있는 '방학맞이 대구경북 역사여행'의 발길을 급히 항일운동 유적지로 돌렸다. 관심있는 학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시의적절한 안내를 위해 필자가 임의로 선정한 경북 10대 항일 유적을 소개드린다.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경북 3.1운동 시발지 기념 공원'의 기념탑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경북 3.1운동 시발지 기념 공원'의 기념탑 ⓒ 정만진

8월 15일을 맞아 경북 도내의 대표적 항일 유적지를 찾아본다. (1)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번지의 신돌석 생가와 기념관 (2) 구미시 임은동 산 7번지의 왕산 허위 기념관 (3)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96번지의 이강년 기념관 (4) 청송군 부동면 청송로 4123번지의 항일의병기념관 (5)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목단봉의 '경북 3·1운동 시발지 기념 공원'을 둘러볼 일이다(관련기사 : 책보 들고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 부르자).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40번지에 있는 (6) 독립운동기념관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전체를 엿볼 수 있는 총체적 답사지다. 물론 안동시 법흥동 20번지의 (7)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고택(임청각, 보물 182호)도 당연히 둘러봐야 한다. 임청각을 찾으면 집 바로 앞의 국보 16호 법흥사터 7층전탑을 보는 덤도 얻을 수 있다.

성주에는 (8) 심산(김창숙) 기념관과 그의 생가(대가면 칠봉리 504)가 필수 답사지다. 이곳은 (9)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4번지의 남자현 생가와 더불어 당신의 생애 이야기를 들으면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곳이다. (10)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376-6의 광복단 기념 유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곳에는 1910년대 국내 무장 독립투쟁을 선도한 분들의 피와 땀이 고이 배어있다(관련기사 : '여자 안중근' 남자현 지사 서거 80주년).

 (사진 위, 왼쪽) 영덕 신돌석 생가 (오른쪽) 구미 허위기념관 (아래, 왼쪽) 문경 이강년 기념관 (오른쪽) 청송 의병기념관 중 사당
(사진 위, 왼쪽) 영덕 신돌석 생가 (오른쪽) 구미 허위기념관 (아래, 왼쪽) 문경 이강년 기념관 (오른쪽) 청송 의병기념관 중 사당 ⓒ 정만진

의병 전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일어난 민족 구국 운동이었다. 비록 일본의 정규군을 물리치고 자주 독립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나아가 국권 회복을 위해 무장 투쟁을 주도한 의병 전쟁은 일제 강점기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이 됐다.

구한말 경북 출신 3대 의병장으로는 흔히 이강년·허위·신돌석이 거론된다. 1895년 을미의병 때는 이강년과 허위, 1905년 을사의병 때는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중 신돌석은 의병장의 대부분이 양반인 데 반해 평민 출신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였다.

허위는 특히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공했다 (그래서 지금도 서울에는 '허위로'가 있다, 구미에도 '왕산 허위 기념관'이 있다). 하지만 허위는 지원군이 늦는 바람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이후에도 허위는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일본군을 무찌르고 매국노를 처단했다. 대신이나 관찰사 자리를 주겠다는 이완용의 회유를 뿌리치고 줄곧 일본군과 싸우던 중 1908년 연천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10월 21일 순국했다.

이강년, 고종 밀명 받고 항일 운동 매진

단발령, 을미사변
1895년(고종 32), 김홍집 내각은 양력 사용, 소학교 설치, 군제 변경, 단발령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이는 매우 급진적인 내정 개혁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민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 이후 국민 감정은 일본에 매우 저항적이었다. 격렬한 배일(排日) 감정을 가지고 있던 국민들은 '친일'내각의 개혁에 강렬히 반대했다.

게다가 고종이 앞장서서 서양식으로 이발을 하고, 내부대신 유길준이 백성들의 상투를 강제로 자른 것은 불타는 섶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특히 '신체와 머리털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므로, 이를 상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고 가르치고 배워온 선비들의 반발은 극심하여 마침내 의병을 일으켰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민초들의 고통과 아픔을 잘 알고 있던 이강년은 동학군에 투신한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보고 의병부대 창설, 왜적의 앞잡이로서 양민들을 토색질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을 시장터에서 효수한다.

광무황제는 이강년에게 의병 소집권을 주면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일지라도 파직하고 내쫓으라는 밀서를 내린다. 이강년은 1908년 7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피체, 그해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다.

登樓遊子却行路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고
可歎檀墟落木橫
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터전을 한하노라
男子二七成何事
남아 스물일곱에 무엇을 이뤘나
暫倚秋風感慨生
잠시 가을바람에 기대니 감개가 새롭구나

 풍기 '광복단기념관'과 기념 '광복탑'
풍기 '광복단기념관'과 기념 '광복탑' ⓒ 정만진
1905년, 월송정에 올라 신돌석이 읊은 <우국(憂國)>이다. 그는 28세이던 1906년 4월 6일 고향마을에서 영릉(寧陵)의진을 창의한 것을 시작으로 울진 관아 점령, 영해 읍성 점령, 영양 관아 소각, 순흥 관아 점령, '13도 창의군' 때 교남 창의대장 피추천 등 맹렬한 항일 투쟁을 벌였다.

그후 그는 1908년 9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심하게 되고, 1908년 10월말 의진 해산을 결정한다. 하지만 1908년 12월 12일 영덕군 지품면 눌곡에서 현상금에 눈이 먼 외가쪽 친척 김도윤(또는 김상렬) 형제에게 피살된다.

1910년대 국내 무장투쟁의 중심, 광복단

 심산 기념관(성주군청 바로 뒤에 있는 김창숙 기념관)
심산 기념관(성주군청 바로 뒤에 있는 김창숙 기념관) ⓒ 정만진

풍기에는 광복단기념관이 있다. 광복단은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무장투쟁단체 조선국권회복단과 더불어 조선광복회를 결성, 1910년대 국내 무장투쟁을 선도했던 비밀 독립운동 결사체다. 조선광복회는 전국에 지부를 두고 곳곳의 친일파들을 처단했으며, 일본 관공서와 광산 등을 폭하는 투쟁을 벌였다.

성주군에는 김창숙 선생 유적이 여러 곳 있다. 종합적 답사지로는 성주군청 바로 뒤의 심산(心山)기념관을 추천할 만하다. 그리고 심산 선생이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던 성명학교(星明學校)와, 학교 앞 생가를 찾아야 한다. 

심산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매국 역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8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그 이후 국채보상운동과 시국강연회에 뛰어들어 국민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한다. 급기야 1919년에는 유림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품고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독립청원서는 만국평화회의를 비롯해 세계 각국과 국내에 배포된다.

1926년, 심산은 나석주·이화익 등에게 무기와 자금을 줘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하게 한다. 급기야 심산은 1927년 살인미수·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건국동맹사건으로 왜관경찰서에 갇혀 있던 중 맞는다.

심산은 1946년 민족분단을 걱정해 김구와 함께 남한 단독 총선거에 반대한다. 1951년에는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는 '경고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을 발표한다. 1952년에는 반독재 호헌 구국선언을 발표했다가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1962년 5월 10일 향년 84세로 타계한다.

 (왼쪽 사진)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게시 사진 중 압록강을 건너다가 일경의 건문을 당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 이상룡 고택 임청각
(왼쪽 사진)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게시 사진 중 압록강을 건너다가 일경의 건문을 당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 이상룡 고택 임청각 ⓒ 정만진

안동 임청각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민간주택 중 한 채로, 아직 70칸이 남아 있는 16세기 건물이다. 그런데 임청각은 철길에 붙어 있다. 당연히, 본래 그 곳에 지었을 리가 없다. 이상룡이 만주로 망명하자 일제는 민족 정기를 끊는다며 철길을 그렇게 놨다.

1909년 신민회 비밀 간부회의는 독립군 기지 확보를 위해 만주 망명을 결정한다. 그 방침에 따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향을 떠난다. 평소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을 꿇고 종이 될 수는 없다"라고 다짐해온 이상룡도 임청각을 팔아 마련한 독립운동 자금을 들고 1911년 1월 5일 안동을 떠난다. 온 가족이 걸어서 1월 12일 추풍령 아래에 닿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  2월 7일에야, 먼저 만주로 떠난 처남 김대락이 살고 있는 횡도촌에 닿았다.

이상룡은 1925년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활동하는 등 1932년 병사할 때까지 줄곧 항일투쟁에 매진했다. 본래 임시정부는 대통령제였는데, 임시정부 의정원이 미국의 조선 위임 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을 탄핵했고, 2대 대통령 박은식에 이어 이상룡이 직무를 물려받았다. 이상룡은 대통령제가 국무령제로 바뀐 뒤 취임했다.


#신돌석#김창숙#허위#임청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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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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