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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길에서 다른 삶을 살다간 두 사람을 만났다. 우당 이회영과 윤덕영. 한 사람은 독립운동을, 다른 하나는 친일을 했다. 서울 서촌 신교동사거리에서 옥인동을 거쳐 사직단으로 이어지는 필운대로, 그 길에서 그들을 만났다. 

기념관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이한다. ‘잘 생겼다. 잘 생겼다.’ 이회영
▲ 우당 이회영 흉상 기념관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이한다. ‘잘 생겼다. 잘 생겼다.’ 이회영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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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맹학교를 지나 언덕이 시작되는 곳, 제법 굵은 은행나무에 가려 자칫 놓치기 쉬운 기념관이 있다. 우당기념관이다. 찾는 이 없어 일부 전등을 꺼두는 곳이다. 제 발로 들어오는 '자발형' 관람객은 드물고 주로 학생들이 단체관람하는 '학습형'이 대세인 기념관이다.

사진 왼쪽으로 휘어진 길이 옥인동 가는 길이다. 기념관은 은행나무에 가려 자칫 놓치기 쉽다
▲ 은행나무 옆 우당기념관 사진 왼쪽으로 휘어진 길이 옥인동 가는 길이다. 기념관은 은행나무에 가려 자칫 놓치기 쉽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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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만큼이나 우당 이회영의 삶 또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형이고 정치인 이종걸과 이종찬의 할아버지다. 이것도 겉도는 얘기다. 독립운동단체에서 일체의 보직을 맡지 않고 글도 남기지 않아 그렇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최근에 부인의 회고록과 일부 학자들의 평전, TV 방송을 통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이회영 6형제, 전 재산 독립운동에 바치다

우당은 1910년 "우리 형제가 명문자손으로 대의를 위해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생명을 구한다면 어찌 금수와 다르리오"라며 나머지 5형제를 설득, 명동 일대 전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떠난다. 우당은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대의명분을 확실히 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였다.

지금 돈으로 600억 원. 동참하는 종들은 함께 하고 나머지는 모두 해방 시켰다. 지금 유행하는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 그는 사회적 책임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노론 중심의 집권세력이 기득권을 지키고 나라 판 대가로 작위를 받고 호의호식할 때 그는 'No(노)'를 외쳤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나키즘의 선구’, 이회영을 말하는 대표적 문구다
▲ 우당기념관에 걸린 액자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나키즘의 선구’, 이회영을 말하는 대표적 문구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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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은 남녀나 신분차별 같은 폐습을 거부해 평등사회를 지향하고 양육강식의 논리로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제국주의 강권지배에 대항했다. 권력의 집중보다는 분권, 연합을 주장했다. 권력이나 조직, 강권에 의한 지배 없는 세상을 꿈꾼 아나키즘의 선구, 우당은 소신에 따라 독립운동단체에서 어떠한 권력이나 감투를 거부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고 국민계몽과 외교노선만으로 일본제국주의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 무장투쟁노선을 택했다. 6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이시영을 제외한 5형제 모두 객지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우당의 경우 묵비권을 행사하다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국내 신문에는 "60대 노인이 경찰서 삼노끈에 목 매달아 죽었다"라고 보도되었을 뿐이다. 비극적 현대사를 겪어온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기사로 들린다.

나라 판 돈으로 자기 땅을 산 윤덕영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기 땅을 판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라를 팔아먹고 챙긴 돈으로 자기 땅을 산 자가 있다.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이다. 그는 1910년 국권침탈 때 순종에게 강요, 한일합방조약(경술국치)에 옥새를 찍게 한 인물 중 하나다. 옥인동에 윤덕영이 흘리고 간 부스러기가 아직 남아 있다.

옥인동 군인아파트에서 인왕산 방향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땅 전부가 윤덕영의 것이었다. 옥인동 반이라 들었다. 별장 벽수산장, 99칸 한옥과 윤씨 가옥, 딸집(현 박노수미술관), 후처 과원댁 집이 들어섰다. 사람의 시야가 좁은 걸 고마워해야 하나? 욕심이 넘쳐 머리와 눈동자를 조금만 더 돌렸더라면 옥인동 전체가 그의 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벽수산장(碧樹山莊)은 프랑스 궁전을 흉내 낸 윤덕영의 별장이다. 인왕산 문인들이 즐겨 모였던 송석원(松石園)자리에 들어섰다, 몇 점 자국만 남긴 채 바람처럼 사라졌다. 벽수산장에 묻힌 송석원은 온데간데없고 그 표지석만 아무개 선산에 주인 잃은 비석마냥 군인아파트 건너편 도로변에 생뚱맞게 서 있다.

전봇대가 먼저야?, 표지석이 먼저야? 아무튼 아무 생각 없이 세워진 거는 매한가지다
▲ ‘송석원’ 표지석 전봇대가 먼저야?, 표지석이 먼저야? 아무튼 아무 생각 없이 세워진 거는 매한가지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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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수산장. 이름은 우리 정서와 어울려 그럴 듯하나 생김새는 근래 교외에 지어진 호화로운 모텔 같다. 프랑스 궁전을 흉내냈다고 하는데 이에 어울리는 이름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 이름은 '꿈의 궁전' 혹은 '드림팔레스', '한양의 아방궁'이라 손가락질 받을 만큼 돈 들여 지었지만 백성들에게 벽수산장은 딴 나라 세상, 그야말로 꿈속의 궁전이었다. 

화려하기보다는 사치스런 별장이다. 백성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비뚤어진 사회의식을 갖고 있는 자의 결과물이다
▲ 벽수산장 정경 화려하기보다는 사치스런 별장이다. 백성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비뚤어진 사회의식을 갖고 있는 자의 결과물이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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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수산장 입구로 보이는 돌기둥이 '송석원' 표지석이 서 있는 건물 뒤쪽에 남아 있다. 돌기둥 위에 매달린 가로등은 윤덕영을 조롱하는 듯하고 길 한편에 장식돌이 몸은 찢겨나가고 머리만 남은 채 나뒹굴고 있다.

가로등을 이고 있는 것은 평생 주변을 밝히라는 죄보(罪報)인가?
▲ 벽수산장 입구 기둥돌 가로등을 이고 있는 것은 평생 주변을 밝히라는 죄보(罪報)인가?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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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끝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굴곡진 인생마냥 좁고 구불구불한 옥인동 골목길 안에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잘 생긴 한옥이 있다. '옥인동 윤씨가옥'이다. 벽수산장과 함께 있었던 99칸 한옥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이 가옥은 윤기 잃어 푸석푸석하지만 그래도 살아 남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굴곡진 삶 마냥 옥인동 골목은 좁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
▲ 옥인동 골목길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굴곡진 삶 마냥 옥인동 골목은 좁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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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과 담, 처마 장식은 예전 그대로다. 돌계단은 'ㄱ'자로 꺾여 집 앞까지 이어진다. 아무나 장대석 돌계단을 만드는 게 아니다. 각 잡힌 시멘트계단 길과는 격이 다르다. 돌계단 입구와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세워진 장식돌 또한 돌계단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돌계단은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다. 돌계단 하나가 집의 격을 높인다
▲ 윤씨가옥 돌계단 돌계단은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다. 돌계단 하나가 집의 격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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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잘 다듬어진 장대석 위에 마름모와 네모, 줄무늬로 화사하게 장식하였고 처마장식 또한 예사롭지 않다. 한 때 순정효황후집이라 오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집과 주인의 품격은 닮는 법이다. 이 집의 품격을 감안하면 윤덕영과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편견일까?

장대석위에 마름모와 네모, 줄무늬의 담을 쌓아 화사하게 보인다. 사치스런 벽수산장과 달리 우리정서와 맞다
▲ 윤씨가옥 담 장대석위에 마름모와 네모, 줄무늬의 담을 쌓아 화사하게 보인다. 사치스런 벽수산장과 달리 우리정서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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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어줬다는 박노수미술관은 아직 건재하다. 윤덕영이 흘린 제일 진한 얼룩이다. 1970년대 박노수 화백이 구입하면서 친일파 후손의 집이라는 죄업을 일부분 씻어내 거리낌 없이 찾아가지만 이 집에 대해 칭송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한 게 사실이다.

예전엔 이 집과 벽수산장 사이에 시냇물이 흘러 구름다리로 건너 다녔다는 말도 있다. 그 말을 듣고 미술관 뒤 언덕에 올랐으나 담에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언덕에서 내려다본 풍경 하나는 건졌다. 언덕에서 바라다본 지붕과 굴뚝, 아래서 본 풍경과 사뭇 다르다. 이래서 사람들은 높은 집에서 내려다보면서 살려 하나 보다.
  
윤덕영 딸집으로 박노수화백이 구입하여 그나마 이 집에 쌓인 죄보는 어느 정도 씻어진 듯하다. 언덕에 올라보면 아래에서 보는 맛과 사뭇 다르다
▲ 박노수미술관 지붕과 굴뚝 윤덕영 딸집으로 박노수화백이 구입하여 그나마 이 집에 쌓인 죄보는 어느 정도 씻어진 듯하다. 언덕에 올라보면 아래에서 보는 맛과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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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은 명동에서 태어났지만 서촌은 기념관을 지어 잘 대접하고 있다. 윤덕영은 어떤가? 그의 얼굴 같은 벽수산장은 불타 없어지고 잔해들만 여기저기 떠돈다. 누구도 수습하려 하지 않고 시신에 남아 있는 금붙이 떼이듯 돌기둥과 담은 마을사람들의 집 자재가 되었다.

두 사람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명하다. 누구의 길을 좇을 것인가? 답은 누구나 같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필운대로(弼雲臺路) 옥인동 고갯마루에서 길을 물었다.

험난한 만주행을 택한 이회영이 닦아 놓은 평탄한 내리막길, '필운대로(弼雲大路)'로 갈 것인가? 윤덕영이 얼룩을 남긴 좁고 굽은 옥인동 골목길로 갈 것인가? 이제 옥인동 골목길도 대로로 만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깨어 있는 백성, 누군가가 먼저 그 골목길로 갈 것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합니다"라는 우당기념관에서 본 문구가 떠오른다. 이회영은 지금 다른 깨어 있는 백성을 요구하고 있다.


태그:#이회영, #윤덕영, #우당기념관, #벽수산장, #송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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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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