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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을 달고 다닌 지 몇 달이 지나니 이제 주변 사람들은 내 턱수염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는다. 다만 아직도 수염 기른 모습을 처음 본 사람들은 꼭 한마디씩 거든다.

"왜 사회에 불만 있어?"
"무슨 결심을 그리 대단하게 한 거야?"

그냥 인사치레로 던지는 말, 진심으로 어울린다는 말, 우회적으로 비아냥대는 말까지 반응은 다양하다. 분명한 것은 턱수염을 통해 다들 내 신변 변화를 감지하려 한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수염을 통해 내면의 변화를 세상에 말하려고 하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이처럼 수염은 그냥 털 기르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강력한 의사표현 수단이기도 하다.

결단과 진심의 수염: 박원순의 수염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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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가에서 하루아침에 정치인으로 변신해 서울시장에 당선된 '원순언니' 박원순 시장에도 턱수염의 일화가 있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오랜 기간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해 온 시민활동가였다. 그 당시 야권의 서울시장 후보로는 안철수 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강력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어느 날 뉴스 속에서 '털북숭이' 박원순과 안철수 후보가 회동하는 모습이 나왔다. 일부에서는 박원순 변호사가 후보를 수락하지 않을 것이란 예측도 있었으나 결과는 안철수 후보의 양보(?)로 박원순 변호사가 단일후보로 추대되는 모양새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정치신인에 불과했던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그때 털북숭이로 나타났던 박원순 시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박원순 시장은 그 당시(2011년 7월부터 49일간) 지리산에서 설악동까지 백두대간 종주 중이었다. 그가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출마 결심하게 된 이유를 그의 저서 <희망을 걷다>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MB정부, 사사건건 일 방해... 출마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당시 MB 정부의 탄압이 있었으며 그런 이유로 시민운동가로의 삶을 마치려다가 정치권으로 뛰어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생의 큰 기로에서 고통스러운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고 그 고민의 결과물을 털북숭이 모습을 통해 보여준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털북숭이 박원순의 얼굴에서 정치신인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도전에 대한 결연한 의지, 박원순의 진심을 보았다. 이리 말하면 과장되겠지만, 박 시장은 어쩌면 '털'의 힘으로 승리했는지도 모른다. 살벌한 정치판에서 정치 초짜 박원순을 살린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털털한 수염 아니었을까?

이처럼 정치인에게 수염은 자신의 정치 인생의 중대한 결정과 결심을 보여 주는 표현수단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이와는 좀 다르게 어떤 수염은 국면전환, 현실 무마용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무마의 수염: 이주영의 수염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종합 정책질의를 지켜본 유가족이 증인으로 참석한 장관과 관계자들을 향해 불성실한 답변 태도에 항의하자,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나서고 있다.
▲ 울부짖는 세월호 유가족, 자리 뜨는 이주영 장관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종합 정책질의를 지켜본 유가족이 증인으로 참석한 장관과 관계자들을 향해 불성실한 답변 태도에 항의하자,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나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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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100일을 훌쩍 넘어 4달이 다 되어간다. 세월호 참사 초창기 무능한 정부 대책에 분노한 성난 유가족들은 해양 업무의 주무 부처인 해양수산부 이주영 장관에게 거친 항의와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 당시 정부는 세월호 참사 책임을 물어 몇몇 장관 교체를 시사했고 이 장관은 교체 1순위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지난달 있었던 개각에서 이주영 장관은 살아 남았다. 세월호 침몰 이후 사고 수습에 대해 정부의 전향적인 대책도 없었고 여전히 10명의 실종자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개각 대상자 발표가 났을 때 예상외로 이장관 유임에 대한 여론은 비교적 잠잠했다.

사태수습을 위한 한시적 조치라 여겨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 당시 인사청문회에 오르내리던 장관, 총리 후보자들의 자격이 워낙 출중(?)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가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간간이 뉴스를 통해 비친 흰털이 수북한 털북숭이 모습을 보며 측은지심의 발로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다. 여하튼 대부분의 예상을 깨고 이 장관은 살아남았다. 이 장관의 털북숭이 모습이 유가족의 분노를 무마하고 사고수습에 대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한 의중이었다면 이장관의 흰털북숭이 연출은 먹혔던 표현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처절한 절규의 수염: 세월호 유가족의 수염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2학년 고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씨가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22일째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다.
▲ 단식 22일째 유민이 아빠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2학년 고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씨가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22일째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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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간절함과 분노 그리고 마지막 생명을 담보로 처절한 절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수염이 있다. 단원고 2학년이었던 딸 유민이를 잃은 김영오씨 이야기이다.

딸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자 23일째(8월 5일 현재) 목숨을 건 단식을 하며 버티고 있는 한 아버지의 수염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 참사 100일이 지나도록 정부의 미미한 대책 때문에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유족들은 거리를 헤매다 지쳐 갔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와 정치권은 그들의 분노와 억울함을 조금도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참다못한 15명의 유가족은 지난 7월 14일부터 마지막 보루로 생명을 건 단식을 시작하였다. 목숨을 건 단식 농성은 23일이 지나는 동안 함께 시작했던 대부분 가족은 병원으로 실려 가고 이제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 혼자 남았다.

단식이 무엇인가? 최후 저항의 표시이다. 생명의 원천인 곡기를 끊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그런 어마어마한 일이 무려 23일째 진행되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무섭기까지 하다.

지난 4일 밤 JTBC <9시 뉴스>와 인터뷰에서 유민이 아빠는 단식의 이유를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세간에서 말하는 돈 몇 푼 받자고 하는 일이 절대 아니며 딱 하나 억울하게 죽은 유민이 한을 풀어주고자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세월호특별법은 제정되어야 한다고 있는 힘을 짜내 말을 이어 갔다. 이처럼 유민이 아빠의 수염에는 아이들에 대한 속죄의 마음과 분노와 억울함에 대한 처절한 절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평상시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 특히 기른 수염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고, 그 기른 수염을 보면서 그 사람의 다른 면이나 변화를 감지하려 한다. 여자들이 긴머리 싹뚝 자르고 나타났을 때 "너 실연 당했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재야의 투사 정도로만 인식되었던 박원순이라는 인물이 어느 날 털북숭이로 나타나 어눌한 말투로 기자회견 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그의 진정성 있는 결단의 마음을 읽어 주었다. 무능한 정부, 참사의 주무부처 장관에 대한 분노의 마음도 흰털북숭이로 변한 모습을 보면서 측은지심이 생겼는지 무마되기도 한다. 또 최후의 저항으로 곡기를 끊고 단식 중인 유가족의 턱밑에 돋아나는 수염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지 알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와같이 수염을 통해 말하려 한다. 주변에 누군가가 수염을 기르고 나타나거든 그 사람이 말하려 하는 것을 제대로 들어 주어야 한다.

23일째 단식 중인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수염을 보면서 그 수염의 말이 들린다. 누가 말하는 돈 몇 푼, 의사자 지정 이 따위 것들이 아니라 분노와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는 처절한 절규의 소리가 들린다. 김영오씨가 인터뷰 중에 했던 말이다.

"지금 몸이 망가지거나 육체가 힘든 건 아무 상관이 없는데요. 무능한 정부로 인해서 정신이 망가지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유가족들의 수염이 말하는 저 처절한 절규의 말들이 지금 그대는 들리는가?'


태그:#박원순, #이주영, #김영오, #세월호 단식, #세월호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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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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