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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소중한 무언가를 타인도 소중하게 생각해준다면 좋겠지만, 살다보니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방에 대한 나의 바람일 뿐. 그래도 소심(小心)으로 감당하기엔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다루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달뜬 마음으로 뮤지컬 <프리실라>를 보러간 그날도 그러했다.

뮤지컬 <프리실라>는 드래그 퀸 3인방의 시드니부터 앨리스스프링스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뮤지컬 <프리실라>는 드래그 퀸 3인방의 시드니부터 앨리스스프링스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 설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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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달은 공연 관람 30분 전 J씨와의 대화에서 출발한다. 그와 대화를 이어가다 주제가 자연스럽게 뮤지컬로 전환됐고, 부담스러운 가격 때문에 볼 엄두조차 내지 못 한다는 게 이야기의 골자였다. 문제의 발언은 공연시간이 임박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작품이 엄청 재밌을 것 같아요. 시간 죽이기에도 좋고."

'내가 잘못들은 건 아니겠지, 시간을 죽인다니!' J씨를 한 스무 대 정도 쥐어박은 뒤 이 길로 곧장 공연장이 아닌 집으로 향하시라 인도하고픈 충동에 휩싸였으나 그보다 강렬한 것은 다름 아닌, 은근히 차오르는 오기 본능이었다. '공연을 보고 난 뒤에도 어디 그 따위 망언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는 생각과 함께, 조금은 불순한(?) 의도를 품고 프리실라에 올라탔다.

뮤지컬 <프리실라>는 좀 특별한 주인공, 드래그 퀸(여장 차림을 즐기는 남성 동성애자 또는 여장 남자) 3인방의 시드니부터 앨리스스프링스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소재 특성상 관람 전에는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 탓에 일단 색안경부터 끼고 바라볼 가능성이 높은데다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극의 흐름에 대한 막연한 불안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품을 수 있는 가정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눈과 귀에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 야무진 뮤지컬 <프리실라> 공연 사진
 눈과 귀에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 야무진 뮤지컬 <프리실라> 공연 사진
ⓒ 런던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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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공연 시작에 앞서 현란한 조명 아래 손과 목을 가볍게 풀어주는 워밍업(Warming up)을 거치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나 그 덕분에 들을 때마다 어깨의 들썩거림을 막아내기 힘든 <It's Raining Man>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시작된 무대는 150분간 마돈나와 신디 로퍼, 티나 터너, 도나 썸머 등 당대 최고 디바들의 히트 팝으로 구성된 신나는 곡들과 퍼포먼스,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형형색색의 독특하고 재미난 의상과 가발로 눈과 귀에 쉴 틈을 허락지 않는다.

물론 팝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이름만 들어선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다. 그러나 노래의 첫 소절이나 멜로디를 듣는다면 '아하'하며 무릎을 칠 만한 곡들이다. 설령 모르더라도 문제될 건 없다. 듣고 나면 단방에 디스코풍의 흥겨운 리듬에 박자를 맞출 수 있는 곡이 대부분이니까.

화려한 무대의 정점은 프리실라 버스 세트, 360도 회전도 모자라 수천여개의 LED조명으로 외부를 디자인해 시시각각 풍성한 색감으로 물든다. 전 세계에 단 두 대 뿐인 프리실라 버스가 온통 핑크빛으로 물드는 장면에서는 지금껏 만나온 여느 무대 세트들을 향해 '내가 제일 잘나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리실라 버스가 핑크빛으로 물드는 장면에서는 지금껏 만나온 여느 무대 세트들을 향해 ‘내가 제일 잘나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리실라 버스가 핑크빛으로 물드는 장면에서는 지금껏 만나온 여느 무대 세트들을 향해 ‘내가 제일 잘나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설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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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귀가 <프리실라>의 매력에 홀딱 취한만큼 마음이 열리는 건 시간문제, 마음과 달리 틈만 나면 할퀴고 아픈 상처를 건드리던 버나뎃과 아담 그리고 틱은 여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기 시작한다. 나아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선택한 자신의 진짜 모습 그대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자하는 그들의 용기어린 아름다운 모습에 뜻밖의 위로도 챙긴다.

시간을 죽인다던 J씨는 오히려 시간에 몸을 맡겼다는 표현에 더 어울려보였다. 신나는 음악을 즐기며 발로 박자를 맞추고, 반자동 물개박수로 배우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은 이가 바로 J씨였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며 <I Will Survive>를 콧소리로 흥얼거린 쪽 역시 내가 아니었다.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던 그는 더 이상 150분 전에 내가 알던 J씨가 아니었다.

내숭과 가식으로 무장하느라 하루가 피곤한 사람, 입에 착착 달라붙는 비속어가 그리운 사람,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들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뮤지컬 <프리실라>를 권한다. 삶의 예기치 못한 느낌표를 얻게 되리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공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지선의 공연樂서, #뮤지컬 프리실라, #김호영, #이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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