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현재 7만 명 가량 남아있는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는 상봉 때마다 반짝 관심을 받다가 금방 잊혀지기를 십 수년째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이산가족 현상은 상봉행사 때만 피상적으로 잠시 보여지다가 잊혀지기에는 너무 아쉬운 비극이다.

1953년 7월 27일 종전 이후 가족들과 완전히 헤어지게 된 수백만 명의 사연은 이미 지난 60년간 대부분이 사망하며 소리 없이 묻혀 버렸고, 남쪽에 아직 남아있는 7만 명도 매년 수천 명씩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살아있는 현재가 아닌 교과서에서만 나오는 과거가 되는 것이다.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기억을, 그 중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5편 연속 내러티브 형식으로 생생히 되살려 본다. 대부분의 이산가족처럼 일제시대, 남북분단, 6·25 전쟁과 같은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이 가족의 사연도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으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기자 말

2014년 4월 경북 영주시 안정면

내줄리. 2014년 4월 3일.
 내줄리. 2014년 4월 3일.
ⓒ 김순옥 할머니 가족 제공

관련사진보기


4월 초의 야산은 아직 황량하다. 벌거벗은 소나무 가지 사이를 헤치며 일곱 명의 식구들이 잿빛 산을 총총히 걸어 올라간다. 머리가 하얗게 센 70대 사촌 오빠가 앞서 걷고, 중년의 자매 찬수씨와 순조씨가 방금 꺾은 긴 나무 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세 사람 한참 앞으로 아직 겨울 점퍼를 입은 순조씨의 남편과 젊은 조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가고 있다. 산기슭 동네 내줄리를 출발한 지 20분이다 되도록 다들 별 말이 없다.

소나무 숲 사이로 봉긋하게 솟은 작은 빈터에 두 자매까지 간신히 올라서고 나니 점심 때가 한참 넘었다. 따스한 햇빛 아래 두 자매 아버지의 산소 위 봉분이 깔끔하다. 아직 누런 겨울 잔디로 덮여 있긴 하지만 곧 초록 싹을 틔울 것도 같다.

"산소가 깔끔허네… 조카들 이렇게 봐줘서 너무 고맙네…"

찬수씨가 말했다.

순조씨의 아들 승일씨가 싱긋 웃고는 들고 온 비닐 봉투에서 주섬주섬 "백두산들쭉술"이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는 노란 술 한 병을 꺼낸다. 종이컵에 노란 술을 가득 따라 봉분 위로 훠이훠이 뿌렸다. 그렇게 몇 잔을 봉분 위의 누런 잔디가 흠뻑 젖을 때까지 뿌리고 또 뿌렸다. 

"그렇게 보고싶어 하던 큰 아들이 보낸 술을 받으시니 저 위에서 아버지가 좋아서 춤을 추시겄어."

순조씨의 남편 형배씨가 말하자 다들 피식 웃으며 절할 채비를 한다. 

"아빠, 이제 우리가 제사 안 지내고 큰 오빠가 한대요. 올해부터는 평양에서 제사음식 맛나게 드시요~"

고개를 숙이며 순조씨가 말했다.

산소 앞에 엎드린 여섯 명의 등 뒤 저 너머로, 아직 눈에 덮인 소백산 정상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같은 시간 내줄리. 큰오빠가 70년을 그리워했던 고향집 마루에 찬수씨와 순조씨의 큰언니인 순옥씨가 우두커니 앉아있다. 한때 큰오빠 무릎에 앉아 꺄하하 웃음을 터뜨리던 여덟살 박이 계집애는 이제 마을 바로 뒷산을 올라가기도 힘이 부치는 80세 할머니가 되었다.

"아버지 이제 한 푸셨겠네…"

순옥씨는 큰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소백산을 마주보고 있는 이름 없는 야산 기슭의 이 고향 마을은 그동안 많이 변했다.

게딱지같던 삼십여 개의 초가집들은 대 여섯 개의 슬레이트 지붕의 입식 집으로 바뀌고, 동네 구석마다 뛰어다니던 어린 아이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노인들만 지키고 있는, 예나 지금이나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산마을이지만 4월마다 활짝 피는 벚꽃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72년 전 오빠가 떠나던 그날도 벚꽃이 이렇게 눈처럼 흩날리는 4월이었다. 오빠가 다시 고향 동네를 볼 수 있을까? 순옥씨는 두 달 전 기억을 떠올렸다.

2013년 2월 북한 금강산

2013년 2월 25일. 북한 금강산.
 2013년 2월 25일. 북한 금강산.
ⓒ 김순옥 할머니 가족 제공

관련사진보기


번쩍거리는 카메라 플래시에 눈이 부시다. 넓은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노래가 귀에 윙윙 울린다. 삼백여 명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앉아 웅성거리는 소음이 점점 커진다. 검은 차림을 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오자 곧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진다.

"아이고 형!"
"누님, 누님, 우리 누님!"
"아버지?!"

정신없이 서로를 안고 금세 느티나무 뿌리처럼 엉킨 채 운다. 순옥씨는 옆에 앉은 여동생 찬수씨의 팔을 꼭 붙든 채 고개를 빼고 연회장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금세 알아보았다. 순옥씨와 똑같이 하얗고 동실한 얼굴. 실처럼 길고 가느다란 눈. 얇고 가느다란 입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봉 신청서에 붙은 손톱만한 사진 두 개를 번갈아 바라보던 적십자 아가씨들이 하던 말이 맞았다.

"어머 할머니, 똑같네요 똑같아. 볼 것도 없어." 

까만 양복에 회색 중절모를 쓴 작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 다가와 순옥씨가 있는 9번 테이블 앞에 섰다. 까만 양복이 눈물 너머 흐릿하게 어룽거리는 듯 싶더니 순옥씨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순옥씨는 비척비척 다가온 노인의 팔을 붙잡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주저앉았다. 

"오빠아. 오빠아."

기억도 흐릿한 큰 오빠다. 여덟 살 이후로 본 적도 없다. 하얗고 해사한 얼굴에 늘 웃는 얼굴. 머리가 좋아서 늘 학교에서 일등을 했다던 우등생. 엄마 아빠의 보물. 동네 사람들이 하나 같이 부러워하던 똑똑하고 잘생긴 큰 아들. 할머니, 엄마, 아빠, 둘째 오빠, 셋째 오빠가 평생 전해주던 큰 오빠의 이야기는 오롯이 그녀의 기억이 되었다. 그렇게 순옥씨는 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마지막 생존자로 이곳에 나왔다. 

큰 오빠를 평생 그리워하고 기다렸던 할머니, 엄마, 아빠, 둘째 오빠, 셋째 오빠는 지난 70년간 차례대로 죽었다. 오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들의 얼굴이 같이 떠올랐다. 이곳엔 내가 아니라 그들이 있어야 했다.

"오빠. 오빠. 오빠."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북에서 나온 가족 중 최고령자인 89세 오빠는 어디 몸이 불편한 듯 한쪽 입꼬리가 굳어 있다. 입술을 달싹여 보지만 말은 나오지 않고, 눈시울이 빨개지는 듯 싶더니 살짝 검버섯이 난 뺨 위로 눈물이 흐른다. 고향에서의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 두 명이 만났다. 70년의 시간 동안 하나하나 하늘로 떠나버린 가족들의 한과 소망을 어깨에 지고.

1942년 경북 영주시 안정면 내줄리

소백산 험한 산밭을 벗어나 조금만 나가면, 푸른 소나무들이 무성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협곡. 자동차는 고사하고 달구지도 들어갈 수 없어 건조기에나 마을 앞에 흐르는 개울 따라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곳. 게딱지같은 초가집들 3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김영 김씨 집성촌의 맨 위 산비탈 집이 순옥씨네 집이었다.

할머니, 엄마, 아빠, 열일곱의 큰오빠 수덕, 열세살 둘째 오빠 팔성, 열 살 셋째 오빠 창덕, 여덟 살 순옥. 가진 것이 없었지만 어차피 다들 가난한지라 서러울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작은 초가집이지만 그래도 방이 세 개나 되고, 동네에 많지 않던 디딜방아도 하나 있었고, 마당도 컸다. 봄이면 소작 받은 논에 모를 심고, 밭에는 보리, 수수, 콩, 보리… 이름도 다 기억나지 않을 온갖 잡곡들을 해다 심었다.

여름엔 나무에서 삼을 벗겨 삼베옷을 해 입고, 겨울엔 목화에서 실을 뽑아 무명옷을 해 입었다. 밤낮 길쌈을 해서 이십 리가 넘는 영주장, 풍기장에 옷감을 내다 팔면 그럭저럭 일곱 식구 입에 풀칠을 할까 말까, 늘 배가 고팠지만 다들 그랬으니 불평할 일도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매일매일 착한 소처럼 묵묵히 일했다. 늘 해가 뜨기 전 새벽녘에 논밭으로 떠났던 부모님은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무명옷이 땀과 흙에 물든 채 아침보다 굽어진 듯한 등을 두드리며 초가집 마당으로 들어서곤 했다.

두 사람 다 크게 싸우지도, 크게 웃지도, 집안 어른들 앞에서 맘껏 아이들을 귀여워하지도 못한 묵묵한 촌로였다. 한번은 아직 아기였던 첫째와 텅 빈 집에 홀로 남게 되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아들을 무릎에 폭 앉혔다. 수덕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동그랗게 뜬 눈을 내려다보며 "까꿍!"하며 웃다가, 갑자기 시어머니가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아기를 평상 마루 가운데로 밀쳐두기도 했다.  

수덕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 아버지는 똑똑한 장남이 자기처럼 평생 흙만 만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열한 살이 되던 해, 삼십 리 넘어가야 있는 작은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 근처 순흥 소학교에 다니게 했다. 해주는 것도 없었는데 곧잘 학교에서 일등을 했다.

학교가 쉬는 주말, 삼십 리 길을 타박타박 걸어 수덕이 고향 동네로 돌아올 때쯤이면 동네 어귀에서부터 "형! 형!" 을 외치는 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둘째 팔성은 아버지를 닮아 조용하고 차분했고, 셋째 창덕은 누구를 닮았는지 장난기가 많고 까불까불해서 성격은 천양지차였지만 둘 다 큰 형을 무척 좋아했다.

가을이 되어 할아버지가 심어준 뒷뜰 배나무에 첫 물 배가 주렁주렁 달릴 때쯤이면 둘은 침만 꼴깍 삼키며 주말에 큰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행여 누가 배를 따기라도 할라치면 형이 올 때까지 손대지 말아야 한다며 생난리를 치곤 했다.

두 꼬마가 "할머니! 오늘은 형이 집에 왔으니 함께 배를 따먹자요!"하면 할머니가 손수 따준 배를 다들 둘러앉아 먹곤 했다. 가을 햇살에 따뜻하게 달궈진 평상 위에 앉아 배를 씹다보면, 어느새 어린 순옥이 큰오빠의 무릎에 성큼 올라앉아 끈적끈적한 손으로 오빠의 목을 끌어안곤 했다.

"오빠! 이제는 가지 말고 우리 함께 살자, 응?"

하고 오빠와 볼을 비비다가 또 그 팔에 매달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 수덕도 싱긋 웃으며 여동생의 헝클어진 땋은 머리 위를 쓰다듬곤 했다.

'우리 가족이 함께 살자.' 여덟 살 여동생이 무심코 한 그 말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게 될 줄 그때 17세의 소년은 알지 못했다.

(*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난 4월부터 기자가 김순옥씨와 가족을 인터뷰한 내용, 그리고 김순옥씨의 오빠 김수덕 할아버지의 에세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산가족, #김순옥, #김휘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