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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맘 먹고 콩을 직접 갈아 만든 콩국수다.
▲ 내가 만든 콩국수 큰 맘 먹고 콩을 직접 갈아 만든 콩국수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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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여름이 더운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유난히 더위를 타는 나는 사계절 중 여름을 견디는 게 제일 힘들다. 여름 하면 제일 먼저 콩국수가 생각난다. 콩을 무척 좋아해 밥에도 빠트리지 않고 넣어 먹지만, 콩국물을 내려서 그 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별미 중 별미이다.

직접 만들어서 먹으면 좋지만 워낙 번거로운 일이라 생협에서 콩국물을 사다 먹는다. 문득 '엄마가 만들어준 콩국물로 해먹으면 훨씬 맛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이 더운 날 무슨 콩국물이냐? 그거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데. 국물 내린 거 시장에 많이 팔더라. 그거 사다가 해먹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우리 엄마는 계모가 아닐까? 다른 엄마들은 딸이 해달라면 뭐든지 해주던데.'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다정하지 않았다. 사실 난 아빠와 훨씬 정이 두터운 사이다. 언젠가 내가 직접 콩을 사다가 불려서 삶고 껍질을 벗기고 믹서에 갈아 콩국물을 만든 적이 있다. 한 번쯤은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일 어려웠던 콩 껍질을 벗기는 일이었다. 요령을 몰랐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문질러가며 벗겼는데 너무 귀찮았다. 급기야 아이를 불러 같이 벗기자고 꾀기도 했다. 우리 엄마는 똑똑했던 걸까? 아무리 딸이 해달라고 했어도 안 한다고 한 칼에 잘랐으니까.

살갑지 않은 엄마와의 사이 때문인지 결혼하고 나서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들은 친정에서 밑반찬도 잘 얻어먹던데 나는 그럴 수 없어 모든 걸 내가 만들어야 했다. 그때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마는 밑반찬도 안 만들어주면서 만드는 법도 안 가르치고 뭘 했지? 행여나 손에 물 묻히며 크면 결혼해서도 그렇게 살까봐 그랬을까? 에이, 설마.'

그러나, 엄마 덕분이었을까? 요리에는 관심도 없던 내가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어떻게 하면 음식을 더 맛있게 할 수 있을까 연구하게 되었다. 어쩌면 엄마는 이걸 노리고 반찬을 안 만들어준 걸지도 모른다.

연구방법은 무조건 많이 만들어보는 것이다. 요리책을 여러 번 보다보면 내 입맛에 맞게 양념을 조절할 수 있는 나름의 응용력이 생긴다. 그러다가 요리책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내가 한 음식이 맛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우쭐하는 마음이 생겼다.

"난 이제 김장 같이 못 하니까 알아서 해먹어"

제일 어려운 것은 김치를 담그는 일이었다.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김치를 담글 때만큼은 조목조목 설명을 잘 해주었다.

"열무김치 담글 때는 열무를 너무 빡빡 씻지 말고 오래 절이면 안 된다. 김장김치 할 때는 꼭 북어 대가리를 넣고 육수를 만들어야 해. 그래야 김치가 시원하거든."

설명을 듣고 어깨 너머로 보면서 친구들은 늘 얻어먹는다는 김치를 직접 담글 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1년에 한 번 김장을 했는데 2년 전 엄마는 "난 이제 너희 집 김장 같이 못 하니까 네가 알아서 해먹어"라고 말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그래도 이제 밑반찬은 만들 수 있으니까 김치 담그는 법이라도 배운 게 다행이지'라고 위안을 삼았다. 엄마는 당뇨 때문에 점점 기력이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김장철이 되면 시댁에서 김치를 보내준다. 엄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시댁 김치가 엄마 김치보다 맛있다. 시댁은 광주인데, 어머님 음식 솜씨는 웬만한 요리사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제사에 쓰일 음식도 모두 손수 만드시는데 겉보기부터 달랐다. 처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저런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꼭 그 비법을 전수해달라고 할 요량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다.

한여름에 갓김치를 먹을 수 있는 행운이란.
▲ 시어머니가 주신 갓김치와 된장 한여름에 갓김치를 먹을 수 있는 행운이란.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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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에는 시댁에 행사가 있어서 가게 되었다. 식구들이 다 모여서 밥을 먹었는데, 남편과 나는 집이 멀기 때문에 밥을 먹자마자 서울로 올 채비를 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었으니 거기서 바로 서울로 올 요량이었는데 "집에 들렀다 가라"는 아버님의 엄명이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시댁에 들러야만 했다.

시댁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님은 음식을 싸느라 바쁘셨다. 나는 집에 된장이 없는 게 생각나서 "어머님 ○○씨(남편)가 된장 좋아하잖아요, 마침 집에 된장이 떨어졌어요" 하고 말했더니, 어머니는 부리나케 베란다로 가시더니 된장을 한 아름 싸주셨다. 다른 건 무엇을 싸주셨는지 신경도 안 쓰고 차에 싣고 왔다. 밤늦게 서울에 도착해 싸주신 것을 펼쳐 보니 지난겨울 담근 갓김치, 김장김치, 새로 담근 열무김치, 깍두기가 있었다.

언제 이런 걸 다 싸신 걸까. 거기다 여름이면 빠지지 않고 먹는 열무김치는 안 그래도 담그려고 했는데. 횡재한 것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이미 씻은 듯 날아가버렸다. 김치 한 번 담그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데, 그걸 냉큼 받아오다니 염치가 있기는 한 건지…. 한편으로는 음식 만드느라 고생하신 어머님한테 죄송하고 고마웠다.

간단한 레시피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믿을 수 없는 시어머니 손맛

다음 날 열무김치를 꺼내서 먹어봤다. 어쩜 이렇게 시원한 맛이 날 수 있을까. 나는 백날 해도 이런 맛이 나지 않던데. 그동안 요리 잘한다고 으쓱했던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말았다. 흉내도 못 낼 요리가 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어머님께 없는 애교까지 섞어가며 카톡을 보냈다. 어머님은 75세이신데도 카톡을 능숙하게 하신다.

"어머님~! 열무김치가 너무 맛있어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맛을 낼 수 있는지 비법을 좀 알려주세용~."
"그거 별거 아니야. 열무를 소금에 절여서 씻어 건지고 고추, 마늘, 생강, 양파를 풀 쑤어 놓은 것과 같이 갈아서 다시 소금으로 간하면 돼."

의외로 간단했다. 이렇게 간단한 레시피에서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맛이 날 수 있을까? 역시 음식은 '손맛'이라고 했던가.

"네, 알겠습니다. 어머님이 한 것처럼 맛있을지 모르지만 한 번 해볼게요."
"그래, 맛있게 만들어서 먹어."
"참, 어머님! 젓갈은 안 넣나요?"
"넣기도 하고 안 넣기도 해. 취향대로 먹으면 되지."

청력장애 때문에 잘 듣지 못하는 나를 배려하기 위해 75세나 되신 연세에도 카톡을 배워 능숙하게 쓰시는 어머님.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늦게 결혼을 한 남편 덕분에 나도 덩달아 예쁨을 받고 있다. 지난 명절에는 어머님이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이는 어찌나 게으른지 몰라. 잘 씻지도 않고 말야. 네가 ○○이 만나서 정말 고생이 많다."

'어머니도 알고 계셨군요. 근데 요새는 제가 하도 바가지를 긁어대서 고쳤어요. 이제는 잘 씻어요'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들 흉보는 며느리는 싫어하실지도 모르니까.

사실 어머님은 남편의 친어머니가 아니다. 친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님은 30년쯤 전에 재혼하셨다. 그때 남편의 나이는 20대 중반. 자식들이 다 장성한 후에 재혼을 하신 거니까 '자식들을 키웠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난 어머님이 훌륭해 보였다.

결혼해서 낯선 사람들 앞에서 쩔쩔맬 때도 어머니는 내게 살갑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거기다 어찌나 애교 있는 말씀도 잘하시는지. 카톡을 하면 나보다 먼저 "사랑한다, 고맙다"라고 말씀하시는 센스란.

늘 바쁘신 아버님과는 달리 어머님은 혼자 계시는 게 일상이라고 한다. 이번 휴가에는 짬을 내어 혼자라도 내려가서 어머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어머님의 맛있는 열무김치도 실컷 먹고, 내가 좋아하는 콩국수도 만들어 함께 먹으면서.


태그:#엄마, #김치, #시어머니,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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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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