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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가창 냉천리 고인돌
 달성 가창 냉천리 고인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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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의 원형 움집에 산 신석기인들은 집 근처의 모래나 흙에 꽂아두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토기 바닥을 뾰족하거나 둥글게 만들었다. 그러나 언덕의 사각형 움집에 거주한 청동기인들은 편편한 땅에 바로놓기 좋게 토기 바닥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또 청동기인들은 빗살무늬 대신 민무늬를 좋아했다. 민무늬토기와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를 상징한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족장 등 지배 계급이 신분 과시를 위해 조성한 '큰 무덤'이다. 많은 인력과 자금을 동원해야 만들 수 있는 거대한 고인돌 무덤은 청동기 시대가 계급 사회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상징물이다. 지구상의 고인돌은 대부분 한반도에 존재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우리나라를 "고인돌의 나라"로 부른다.

대구 상동 정화아파트유적지의 고인돌
 대구 상동 정화아파트유적지의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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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대구는 "고인돌의 도시"로 유명했다. 세계문화유산 구역으로 지정된 고창, 화순, 강화보다도 더 많은 3천여 기의 고인돌이 신천, 진천천 등 개울을 따라 밀집해 있었다. 당연히 우리나라 최초의 고인돌 발굴도 1927년 대구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많던 호수를 매립하고 고인돌을 멸실함으로써 대구는 뛰어난 역사문화유산이자 관광자원을 잃고 말았다.

현재 대구에서 가장 볼만한 고인돌 유적은 수성구 상동 정화우방아파트 뒤편에 조성되어 있는 '청동기 시대 집터 유적'이다. 본래 정화여중고교 교정 일대에 산재해 있던 유적인데, 학교가 옮겨가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이곳에 모아두었다.
가락바퀴
 가락바퀴
ⓒ 대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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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물인 가락바퀴, 청동기 시대 유물인 민무늬토기, 표면을 붉게 칠하고 반들거리게 문질러 구운 붉은간토기, 반달돌칼 등이 출토되었다. 또 집터 중앙에는 난방과 음식 조리를 위해 불(爐)을 피운 자취(址)인 노지(爐址)도 발견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던 이곳을 찾아 노지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고, 돌널무덤과 돌덧널무덤의 차이를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785-1번지 가창제일교회 뒤편의 '달성 냉천리 고인돌 (대구시 기념물 14호)'도 찾아볼 만하다. 상동 청동기 집터 유적 못지않게 아주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그 외에 화원교도소와 화장사 사이 고인돌이 주변 정비도 잘 되어 있어 볼 만하다.

특이한 답사지로는 돌마다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는 지하철 대구역 칠성시장 출구 '칠성바위'가 있다. '칠성'이라는 이름으로도 짐작이 되지만 칠성바위에는 이곳에서 빌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출세한다는 원시 민간신앙이 깃들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칠성은 북두칠성으로, 옥황상제가 있는 곳으로 믿어져 왔다.

청동기 시대 사람의 무덤을 발굴 후 유리를 덮어두었는데 그 위에 현대인의 아파트가 비친 모습(대구 상동 정화아파트유적지)
 청동기 시대 사람의 무덤을 발굴 후 유리를 덮어두었는데 그 위에 현대인의 아파트가 비친 모습(대구 상동 정화아파트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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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507-5번지의 '청도 범곡리 고인돌(경상북도 기념물 99호)'도 답사자를 기다리고 있다. 고인돌 34기를 거느린 범곡리 유적은 인근에 큰 취락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지역에는 80m 간격을 두고 동쪽으로 22기, 서쪽으로 12기의 지석묘가 남동~북서 방향으로 줄을 지어 위치해 있다. 서쪽군과 동쪽군 사이에도 지석묘들이 분포하였으나 개간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그런가 하면 청도에는 각남면 신당리에도 고인돌이 집단으로 분포한다. 청도의 대규모 고인돌군은 297년 신라의 금성을 포위했던 이서국(伊西國) 건국 집단의 위세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여겨진다. 

영주시 휴천동 226-5번지의 '영주 휴천리 고인돌 및 입석(경상북도 기념물 24호)'도 특이한 볼거리이다. 고인돌과 입석이 함께 있는 매우 희귀한 예인 까닭이다. 물론 고인돌과 선돌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이 일대에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하지만 이곳 고인돌 아래에 매장 시설이 있는지 여부는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는 고인돌 덮개돌 아래에는 매장 시설이 있지만 이곳 고인돌은 아직 발굴 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하부 형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청도 범곡리 고인돌
 청도 범곡리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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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문화권

비파형 동검(위 왼쪽), 미송리식 토기(위 왼쪽 사진), 북방식 고인돌(가운데), 남방식 고인돌(아래). 북방식 고인돌은 의성군 조문북박물관 들의 모형이고, 남방식 고인돌은 대구 상동 정화아파트유적지의 것이다.
 비파형 동검(위 왼쪽), 미송리식 토기(위 왼쪽 사진), 북방식 고인돌(가운데), 남방식 고인돌(아래). 북방식 고인돌은 의성군 조문북박물관 들의 모형이고, 남방식 고인돌은 대구 상동 정화아파트유적지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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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임진강 이북에서 만주 쑹화강(松花江)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채 중국과 맞섰다. 고조선이 넓은 영토를 차지한 강국이었다는 사실은 북방식 고인돌과 비파(琵琶)형 동검(銅劍)이 잘 증언해준다. 이 두 유물은 고조선의 영토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밀집되어 출토되기 때문이다.

철기 시대 세형동검과 모양이 전혀 다른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은 제주도에서 쑹화강 사이, 서쪽으로 랴오허(遙河) 인근까지만 출토되고 있다. 또 북방식 고인돌은 진국 영토로 추정되는 일부를 제외하면 대략 비파형동검과 겹친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즉, 이 둘은 밑이 납작하고, 양쪽 옆으로 손잡이가 하나씩 달리고, 목이 넓게 올라가서 다시 안으로 오므라들며, 표면에 집선(集線)무늬가 있는 미송리식 토기와 함께 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가 청동기 시대에 같은 고조선 문화권이었음을 증언한다.



태그:#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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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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