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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의 카메라 회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사진전을 방해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즉 사진의 정신을 잃어버린 카메라 회사라는 비판은 니콘에게 아주 타당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143쪽)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이상엽이 자신의 신간, <최후의 언어>에서 한 말이다. 지난 2012년 6월, 사진가 안세홍은 니콘으로부터 대관 취소를 통보받았다. 그는 도쿄의 '니콘 살롱'에서 위안부 할머니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니콘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로기를 만들던 대표적인 군산복합체 미쓰비시의 자회사라는 점을 지적한다. 현재까지도 역사 왜곡을 일삼는 극우단체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는 전범기업이라며, 니콘의 일방적인 대관 취소를 비판한다.

<최후의 언어>에는 '나는 왜 찍는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저자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르포르타주 작가답게 세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오브제를 찾아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한다. 같은 주제라도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와 화면을 직조하던 그가 한 권의 사진 에세이집을 탈고했다.

중국 안후이 성에 위치한 홍촌에서 저자가 만난 한족 소녀가 표지 모델이 됐다. 감자 스낵을 먹으며 미소짓고 있다.
▲ <최후의 언어> 표지 중국 안후이 성에 위치한 홍촌에서 저자가 만난 한족 소녀가 표지 모델이 됐다. 감자 스낵을 먹으며 미소짓고 있다.
ⓒ 북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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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엽의 철학을 담고 있는 필름카메라

이 저서에 소개된 모든 사진은 필름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일반인들의 눈에야 그 사진이 그 사진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핸드폰으로라도 정성스레 사진을 찍어본 독자들은 알 것이다. 큼지막한 검정 카메라로 플래시도 터뜨리고 경통으로 거리조절도 해가며 찍은 사진의 위대함을! 저자 이상엽이 소중하게 여기는 장면을 디지털 카메라가 아닌 필름카메라로 담고 싶은 이유를 들어보자.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디지털카메라의 화질이 아직은 필름보다 못하다는 기술적 한계에 있다. (중략) 게다가 디지털 사진은 여전히 색상과 입체감에서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런 때가 와도 절대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다. 그것은 피사체를 대하는 사진가의 태도다."

이러한 철학을 가진 이상엽은 지난 2012년 1월 2일 입적한 지관스님의 다비식을 시작으로 울산 느리지만 의미 있는 행보를 기록한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농성 중이던 철탑, 중국이 추진하는 역사왜곡 프로젝트 동북공정의 현장, 산산조각이 나고 있는 단일 용암너럭바위, 구럼비 바위가 있는 강정마을, 사막처럼 불모지로 변해버린 새만금 현장... 그는 담고 싶은 장소와 장면에 맞는 각기 다른 필름카메라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 카메라는 저자의 피사체와 배경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말해준다.

이를 테면, '가난한 사진가의 라이카'라는 별칭이 붙은 카메라로 저자의 동네를 소개한다. 저자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이사한 용인 고기리에서의 생활이 처음에는 불편했다. 하지만 사계절을 겪으면서 찍은 풍경은 풍요로운 전원생활 그 자체였다. 그 풍요로움 속에는 불편함도 한가득이다. 그래도 '가난한 사진가'의 렌즈에 포착된 사진 속 풍경은 아름답고 평온하기 그지없다.

저자는 대체로 디지털 카메라로 작업을 하지만 제대로 담고 싶은 장면을 발견하면 필름카메라를 사용했다. 디지털 카메라는 어떻게 찍혔는지 바로 확인이 가능하고 얼마든지 셔터를 눌러도 부담이 없다. 반면에 필름카메라는 찍기 전 피사체와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 저자는 '재빠른 이미지 또는 결정적 순간'을 위해서는 소형카메라로, '깊고 느리게' 작업을 하고 싶은 경우엔 중형카메라로 작업을 한다. <최후의 언어>는 이렇게 사용한 카메라에 따라 1장과 2장으로 나뉜다.

인문학적 사유를 담아 셔터를 누르다

"사진을 찍을 때 사실상 내가 하는 일은 사물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작업이다."

사진작가 윈 벌록(Wynn Bullock)이 남긴 말이다. 저자 이상엽은 이 말을 충실히 따르며 바이칼 호수, 말라카, 티베트 등에서 소수민족의 애환을 담았다. 사진 속 풍경과 사람들이 겪은 풍상이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저자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독자의 감상을 돕는다.

"내성천에 영주댐이 공사 중이다. 내성천을 막아 평은, 이산 지역이 모두 수몰된다. 목적은 홍수예방과 수자원 확보라는데, 홍수는 지난 백 년간 크게 난 일 없고 4대강도 모자라 지천까지 막아 확보한 수자원은 뭐에 쓰려는가?"(218쪽)

책의 후반부에 이르면서 저자는 경북 봉화의 내성천을 소개하면서 4대강 사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내성천 지류를 찍은 사진에는 '모래는 물을 정화하고 생태를 조절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 건축자재로 사용하라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생각해볼만한 화두를 던진다. 저자는 일본의 노작가 마루야마 겐지가 그의 저서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한 말을 인용한다.

"국가란 누구의 것인가. 독재국가는 물론,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 역시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 소수의 것이다. 더는 민주적일 수 없을 만큼 민주적인 국가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 나라는 특정 소수의 사유물이거나 거의 사유화된 동산이며 부동산이다."

우리 정부가 생명과 재산을 위협받은 국민들에게 취한 태도는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상엽의 에세이에 소개된 사진 속에는 인문학적 사유가 담겨있다. 자기성찰과 피사체에 대한 한없는 배려가 돋보인다. 적어도 이상엽이라는 사진작가는 사진작업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그의 사진과 글을 통해 역설한다.

<최후의 언어>는 사진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책이다. 나와 같이 스마트 폰으로나 사진을 찍는 문외한들에게도 '사진이란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책이다.

책의 말미에 이상엽이 찍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웃는 모습에서도 그들의 고단한 삶을 목격할 수 있다. 부록에는 그가 사용한 카메라들의 사진과 사양이 소개되어 있다. 일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최후의 언어 : 나는 왜 찍는가> 글·사진 이상엽, 북멘토, 2014년 6월 25일 발행



최후의 언어 - 나는 왜 찍는가

이상엽 글.사진, 도서출판 북멘토(2014)


태그:#사진작가, #이상엽, #필름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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