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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털털해지다

지난 7월1일부터 새로 기르기 시작한 수염이 벌써 보름이 되었다. 어찌 보면 그냥 털인 별것도 아닌 것에 관심을 갖다 보니 세상 모든 것이 관심을 갖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관심을 갖고 본다는 것에서 자라는 생각의 크기, 수염을 기르며 얻은 커다란 소득 중에 하나다.

턱수염에 대한 글을 두 꼭지 쓰고 나니 주변 반응들이 재미있다. "진짜 할 일 없나봐 털 가지고 그런 글이나 쓸 생각하는 거 보니"라는 류가 있는 반면 "참 그냥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라며 아주 호의적인 말로 격려해주는 부류이다. 어찌되었든 무료한 일상에 없던 반응이 생긴 것은 아주 환영할만한 일이다. 한편으로는 수염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이 생겨 수염을 볼 때마다 신경을 쓰게 된다. 나도 수염 한번 예쁘고 멋지게 기르고 싶다. 과욕인가?

7월 1일 수염 자른 후 모습(위)와 7월 15일 털털해진 수염(아래).
▲ 다시 털털해졌다 7월 1일 수염 자른 후 모습(위)와 7월 15일 털털해진 수염(아래).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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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의 수염 때문에 역사가 바뀌었다

'1144년 설 전날 밤, 나례라고 하는 귀신을 쫓는 의식이 있었다.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흥겨운 공연이 벌어졌다. 이때 김돈중이 촛불로 장교인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 버렸다. 이러한 일은 문신들이 무신들을 얼마나 업신여겼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 사이트에 나오는 정중부의 수염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무신정권의 서막을 연 쿠데타의 주인공 정중부는 무척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지의 관우 수염에 필적하는 멋진 수염을 가졌던 모양이다. 궁중연회 때 의종(고려 18대왕, 재위 1146∼1170)은 정중부의 수염을 대장군 감이라고 칭찬하였다. 그 칭찬 한마디가 무신을 업신여기던 문신들의 시기질투심을 자극하였다.

연회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 불이 꺼지자 그 당시 정3품 내시(환관 내시가 아님. 고려 관직이름)에 불과한 젊은 김돈중이 견룡대정(친위부대 수장)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렸다. 이에 다혈질이었던 정중부가 김돈중을 흠씬 두들겨 팼는데 정작 벌은 불을 붙인 김돈중 보다 정중부가 더 크게 받게 되었다. 김돈중은 당대 문벌귀족의 최고 권력자 김부식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정중부와 많은 무신들은 이 사건으로 더욱 큰 앙심을 품게 되었고 이 앙심은 불씨로 자라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100년 동안의 무인시대를 만들었다. 자존심으로 생각하는 수염에 불을 붙인 행위는 그동안 차별과 무시에 대한 불만을 터지게 한 불쏘시개였던 셈이다. 설마 수염 하나 태운 일로 목숨까지 걸고 쿠데타를 일으켰겠는가? 그 수염 속에는 고려 무인들의 차별과 억압의 세월을 견딘 마지막 자존심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는 김돈중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는 김돈중
ⓒ 한국콘텐츠진흥원 창작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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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왕조는 없다

혼란스런 후삼국시대 고려의 태조왕건은 지방호족들을 규합하면서 936년 결국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국가를 완성시켰다. 고구려의 뒤를 이은 왕조답게 고려왕조도 한참동안은 번영의 시기를 맞았다 하지만 영원한 왕조는 없다. 흥(興)이 있으면 망(亡)이 있는 법이다.

12세기 들어오면서 고려는 다시 망(亡)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고려는 문벌 귀족정치의 시대였다. 이는 태조 왕건이 건국 초기 지방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시행했던 혼인 정책도 원인중의 하나였다. 지방 호족들과의 혼인정책은 왕조 초기 어느 정도 왕권 안정에 기여하였을지 모르나 후에 문벌귀족 세력의 형성으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위키백과 사전에는 그 당시 문벌 귀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벌 귀족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과 관직에 따라 혜택을 받았으며, 자기들끼리 혼인 관계를 맺는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고, 때로는 황실과도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거의 독점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신 중심의 문벌 귀족정치는 무신들의 사회적 몰락을 가져왔다. 문신들의 노골적인 무신 천대는 고려 의종 때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쌓이면 터지게 되어있다. 가뜩이나 김돈중 수염사건으로 심기가 불편하던 차에 쌓이고 쌓인 무신들의 불만은 결국 고려 의종 24년(1170년)에 터지게 되었다.

종5품 문관출신 한뢰가 자기보다 품계가 높은 3품인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을 중심으로 '무릇 문관을 쓴 자는 서리까지도 씨를 남기지 말고 없애라'며 쿠데타를 일으켜 피로써 분을 되갚았다. 이후 100년간 고려는 군인들의 시대인 무신정권시대를 맞게 된다. 무신정권 100년은 고려에 있어 쿠데타의 연속이었으며 왕조가 서서히 역사 속으로 퇴장하는 과정이 되었다. 무신정권이 끝나자 약해빠진 고려는 원의 침략으로 100년간 원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결국 고려왕조는 태조 이성계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수염은 사내들의 자존심이다. 특히 고려시대에 무장들에게 수염은 자존심 중의 자존심이었으리라. 정중부의 수염은 단지 수염이 아니라 무신들의 자존심이었다. 그 자존심인 수염이 발단이 되어 이소응의 따귀 사건으로 촉발된 무신정변을 보면서 작금의 정치를 본다.

참고 또 참고 지내던 무인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태워버렸으니 문신들은 이미 금도를 어겼던 것이다. 작금의 막말정치나 다름없다. 무릇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다. 그 당시 문신들이 조금만 무신입장에서 상생의 정치를 생각했다면 피를 부르는 군사쿠데타는 없었을 것이며 이로 인해 100년 동안의 군사독재 시절도 없었을 것이며 그 뒤 100년 동안의 원나라 식민지시대도 없었을지 모른다.

부관참시를 사과하라

지난 14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김무성 의원이 새로운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김무성 의원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NLL 포기 발언으로 촉발된 막말정치의 관련자이다. 그 당시 NLL포기 발언 논란은 사자의 명예훼손뿐만 아니라 외교상 큰 결례이며 국가안보와도 관련있는 중대한 사안이 되었다. 그 사건과 관련되었던 김무성 의원은 본인은 보지도 못했다는 대화록 내용을 어떻게 그렇게 같은 내용으로 부산유세에서 연설했는지 여전히 의문점을 남긴 채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법원이나 검찰은 여전히 그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대화록 내용을 온 국민이 다 알게 된 사실은 있는데 최초 발설자는 없다고 하고, 정작 유세에서 들은 사람도 있고 발설한 사람도 있는데 무혐의라고 한다. 김돈중이 당대 최고 권력자 김부식이라는 아버지 '빽'으로 수염을 태우고도 당사자보다 적은 형량을 받은 고려시대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그들은 이미 돌아가신 사람에게 하지도 않은 'NLL 포기 발언'을 갖다 붙이며 사자를 부관참시했다. 한나라의 대통령까지 지내신 분의 자존심을 건드려 극단적 선택의 길로 내몰았던 세력들이나 무관의 자존심이던 수염을 불태웠던 고려시대 김돈중이랑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남의 수염 함부로 건들지 마라

세월호의 아픔 속에 치러진 지난 6.4지방선거 때 새누리당의 약속들을 기억한다. '도와주십시오. 모든 것을 바꾸겠습니다.' 최근 벌어진 인사청문회나 세월호 특검을 보면서 무엇을 바꾸고 무엇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이번에 새로 뽑힌 김무성 대표는 당대표 수락연설에서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했다. 또한 새누리당이 '보수 혁신의 아이콘'이 되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진정 그렇게 하길 바란다. 하지만 혁신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자신들 때문에 구겨진 자존심에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작은 미안함이라도 표현하길 바란다. 당대표 인사차 봉하 마을에 가서 머리 숙여 미안함을 사과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이 새누리당에서 늘 말하는 상생 정치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남의 수염 함부로 건들지 말길 바란다. 수염은 그들의 자존심이다. 세월호 특검에서 보여준 유족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여당의원을 보면서 유족들과 국민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한 번쯤 생각해 보길 바란다. 자존심을 뭉개면 뭉개진 자존심만큼 화가 쌓인다. 쌓이는 화가 결코 역사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천년 전 고려시대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진정으로 강한 대힌민국을 만들 생각이라면 막말정치, 무매너의 정치, 분노의 정치부터 없애고 상생의 정치, 자존심을 지켜주는 매너의 정치부터 시작해주길 바란다. 정중부의 수염 하나 지켜 주는 것이 고려를 살릴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새누리당 새 대표는 꼭 명심하길 기대해본다. 수염은 그냥 털이 아니다. 자존심이다.

'국민들이 화나면 반대로 그대들 수염을 확 뽑아 버릴지도 모른다.'


태그:#김무성 당대표, #김돈중, #정중부의 수염, #무신정권, #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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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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