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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 고려대 모임 구성원들이 모여서 <녹색평론> 읽기 모임을 가졌다.
▲ <녹색평론> 읽기 모임 녹색당 고려대 모임 구성원들이 모여서 <녹색평론> 읽기 모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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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진보 몰락의 시대'다. 이번 6·4 지방선거 결과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진보정당들은 몇 년째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동아리 몰락의 시대'이기도 하다.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 관련 동아리나 학회는 신입을 찾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스펙에 도움이 되는 경영·경제 관련 동아리에 들어가려면 면접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한때 활발하게 활동했던 진보정당의 학생 조직은 대학 내에서 자취를 감췄다. 반대로 이런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다. 대학 내에 새로이 정당 모임을 싹 틔워보려는 사람들, 나와 내 친구들이 꾸려나가고 있는 '녹색당 고려대 모임'을 소개하려 한다.

시대를 거스르기 전에, 일단 밥부터 먹자

독일인 세 명이 모이면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인 세 명이 모이면 혁명을 일으킨다는 말이 있다. 그럼 녹색당원 3명이 모이면 어떻게 될까? 지난 4월, 녹색당의 청년당원모임인 청년녹색당에서 만난 3명의 고려대 학생들이 모였다. 무엇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만나서 밥부터 먹기로 했다. 환경문제나 생태주의에 관심 있는 주변 사람들도 몇 명 끌어들였다.

매주 화요일마다 점심을 먹기로 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밥 한 그릇에도 온 우주가 들어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만나서 온 우주를 함께 먹었다. 그래도 명색이 녹색당 고려대 모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사람이 모였으니, 자연스레 환경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야기는 "학교 주변에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번졌다.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가끔은 생태주의 관련 격월간 잡지인 <녹색평론>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새 6·4 지방선거 기간이 됐다. 학교 주변에서 우리끼리 선거운동을 해보기로 했다. 기존의 정당들은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춘다. 우리는 다른 모양의 선거 운동을 하기로 했다. 우리 마음대로 계획하고 실행하는 선거운동!

고려대학교 정경관 후문에서 정당을 홍보하는 피켓과 직접 쓴 대자보를 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근처 지하철역과 횡단보도에서 지지를 호소했다. 물론 녹색당이 선거에서 선전하기를 바라는 선거운동이기도 했지만, 또 하나의 목표는 녹색당 고려대 모임을 함께 할 사람들을 찾는 활동이기도 했다. 그렇게 선거운동을 빙자한 친구 찾기를 이어갔다.

정해진 것이 없는 자율공동체

지방선거 기간에는 학교 주변에서 선거운동을 했다.
▲ 선거운동 중인 녹색당 고대 모임 지방선거 기간에는 학교 주변에서 선거운동을 했다.
ⓒ 전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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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 고려대 모임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한다. 당적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고, 당원이 아닌 사람도 섞여 있다. 올해 갓 입학한 새내기부터 졸업을 앞두고 있는 취업준비생까지 모였다. 고정적으로 참석하는 10여 명 외에도 심심해서 한 번 들려보는 사람, 신기해서 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

모임에 참석하는 친구들은 "대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학 생활 동안 스펙 쌓기만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다. 사회 참여는 하고 싶은데 학생회는 자신이랑 잘 맞지 않는다는 친구,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잉여, 취직 못하고 학교 주변을 배회하는 청년 백수들이 주된 구성원이다.

녹색당 고려대 모임은 아무 것도 정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계획도 별다른 것이 없다. 그때그때 만나서 구성원들이 원하는 활동을 한다. 생태주의와 관련된 활동이면 더 좋겠지만 꼭 관련이 없어도 누군가 '말하는 대로' 한다.

방학 때는 <녹색평론> 읽기모임을 확장 시켜 생태주의와 녹색정치의 관한 세미나를 하기로 했다. 정해진 커리큘럼은 없다. 한두 번 읽을거리만 정해두고, 그 이후에 읽을 책은 다음 모임에서 정하기로 했다. 선배들이 던져준 커리큘럼에 따라 빡세게 학습하던 시대는 갔다. 우리의 세미나는 서로 읽고 싶은 책을 말하면, 같이 읽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학교 안에서 무엇을 해볼까

누군가 공부만 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다. 우리는 행동도 한다. '가벼운' 행동이 많다. 함께 자전거 타기, 월요일마다 채식해보기, 텀블러 사용하면서 주변 카페에 할인 요구하기, 버려진 땅에 '게릴라 가드닝' 하기 등을 논의했다.

학교가 생태적 전환을 하도록 요구하는 '무거운' 활동도 있다. "더 싸고 맛있으면서도 건강한 학생식당이 될 수는 없을까" "연세대는 생활협동조합이 있는데 고려대는 왜 없을까" "서울시립대에는 공동텃밭이 있는데 우리 학교는 왜 없는가" "학교의 조명을 LED로 바꾸고 태양광 발전을 설치하도록 요구하자" 등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정당에 대한 고민도 한다. "학교에 기업은 들어오는데 정당은 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정당이라도 학생들의 자치조직이라면 학교 강의실을 빌릴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학생들의 정당 조직이면 자치 공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들의 자유로운 집회를 보장해야 한다" 등의 말을 주고받는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시간이 좀 더 난다면 하나씩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물론 바쁘거나 좀 귀찮으면 그냥 모여서 밥만 먹을 수도 있다.

홍보도 별로 하지 않았지만 성황리에 끝낸 교내 녹색 영화 상영회
▲ 녹색 영화 상영회 홍보도 별로 하지 않았지만 성황리에 끝낸 교내 녹색 영화 상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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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에는 공개적으로 영화 상영회를 했다. 홍보에는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았다. 학교에 포스터 몇 장을 붙이고, SNS에 소개글을 올렸다. 당일에 '한살림생활협동조합'의 과자를 간식으로 준비하고 녹색당 홍보물을 나눠주는 정도였다.

홍보에 크게 공을 들이지는 않았는데 20여 명 가까운 사람들로 강의실이 북적였다. 영화상영회를 통해 녹색당 고려대 모임의 구성원이 몇 명 더 늘어났다.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모임 참석 이유를 물어보니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는 대답이 제일 많았다.

더 재미있게, 더 낫게 실패할 우리들

같이 퀴어 퍼레이드에 놀러 가기도 했다.
▲ 신촌 퀴어 퍼레이드에 녹색당 고려대 모임 같이 퀴어 퍼레이드에 놀러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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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 이후 진보 지식인들조차 진보정당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한국의 정치가 이제 양당체제로 완전히 굳어졌다고 전망한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를 말하기에 이르다고 생각한다. 아직 해본 것이 별로 없다. 우리가 직접 해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실패·종말이라고 훈수 받는 것이 싫었다.

우리의 활동은 물론 스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당활동 경험이 알려지면 오히려 취업에 걸림돌이 된다"라는 말이 도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명은 있기 마련이다. 조금은 이상하지만 작게나마 뭔가 해나가려는 사람들이 모여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나와 모임을 해나가는 친구들이 진보정당의 몰락, 학생 자치단체의 쇠락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감히' 거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특별히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거창한 것을 할 마음도 없다.

그저 틈날 때마다 만나서 밥 먹고 토론한다. 꽃도 심어보고 학교와도 싸워본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정당 활동인지 친목도모인지 구분이 안 되는 활동들을 이것저것 해 본다. 녹색당 고려대 모임은 이렇게 꾸려나갈 것이다.

언젠가는 다들 취직을 하고, 바빠서 모임을 이끌어나갈 사람이 없어질 수도 있다. 거기서 모임을 끝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스펙은 되지 않아도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재미있는 추억들이 벌써부터 많이 쌓이고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우리는 윗세대보다는 더 재미있게, 더 새롭게, 다시 더 낫게 실패할 것이니까.


태그:#녹색당, #청년녹색당, #녹색당 고려대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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