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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이맘 때 즈음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변변한 외국어 실력 없이 오롯이 패기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땅을 돌며 보낸 4개월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늦었지만 서랍 속에 간직했던 묵혀둔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기자 말-

추운 날씨에 얼음호수 가 된 바이칼 호수. 두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얼어버린 모습이 경이로웠다.
▲ 얼음호수 바이칼 추운 날씨에 얼음호수 가 된 바이칼 호수. 두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얼어버린 모습이 경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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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과음을 했더니 목이 탄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물병을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신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려던 순간, '푸악~'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물을 입 밖으로 내뿜고 말았다. 물맛이 이상하다. 물병에 붙은 라벨을 살펴보니, 이럴 수가 탄산수다. 분명히 'нет газ(no gas)'라고 표시된 물을 산 듯한데,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환타'로 대신 갈증을 해소한다.

슬류댠카는 울란우데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추운 지역이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겨울 러시아는 어딜가나 손발이 얼 정도로 춥다.
▲ 꽁꽁 언 판매대 슬류댠카는 울란우데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추운 지역이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겨울 러시아는 어딜가나 손발이 얼 정도로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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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마을 슬류댠카를 거닐다

현지시간 2013년 1월 23일, 날이 밝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잠을 깨보지만 숙취로 몸이 고되다. 감기 기운까지 살짝 느껴지니 얼큰한 국물이 생각난다. 어제 마트에서 산 사발면 '도시락'을 들고 부엌으로 향한다. 한국에서 먹던 맛보다 약간 싱겁지만 매콤한 게 몸 안으로 들어가니 해장이 된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감기 기운을 털어버리기 위해 샤워를 했다. 몸 상태가 제법 회복한 듯하다.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 자칫 감기라도 걸리면 여행이 도루묵 될 수 있다. 당장 입을 옷을 제외하고 모두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했다. 괜스레 속까지 개운하다.

빨래가 되는 동안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이틀 전, 이곳 슬류댠카에 도착했지만 아직 제대로 동네 구경을 해보지 못했다. 점심 무렵이 지나 가벼운 옷차림으로 숙소를 빠져 나왔다.

영하 18도. 오늘 슬류댠카의 기온이다. 울란우데보다 훨씬 덜 춥다. 온도차가 크니 왠지 모르게 따뜻하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집 밖을 나서자 마음과 달리 얼굴에 와 닿는 공기가 차다. 역시, 러시아의 겨울 날씨는 방심할 수 없다.  

한산한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한국의 작은 면단위 마을을 닮았다. 거리에는 낡은 건물들과 꽤 오래돼 보이는 목조주택이 즐비하다. 대도시 울란우데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빙판길을 총총걸음으로 내디뎌 상점가들이 늘어선 번화가에 다다랐다. 듬성듬성 문을 연 상가들과 회색빛 하늘이 을씨년스럽다. 시골장터에서나 봄직한 좌판이 군데군데 펴졌지만 추운 날씨 때문인지 주인장은 온데간데 없다. 영하권의 추위에 노출된 물건들만 꽁꽁 언 채 낯선 손님을 반긴다.

상가들이 즐비한 번화가서 목격한 좌판서 '오믈' 파는 여인. 오믈은 바이칼 호수에서 잡히는 유명 물고기 이름이다.
▲ 오믈 파는 여인 상가들이 즐비한 번화가서 목격한 좌판서 '오믈' 파는 여인. 오믈은 바이칼 호수에서 잡히는 유명 물고기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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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판서 '오믈' 팔던 털 옷차림의 러시아 여인

고요한 거리를 거닐고 있으니 쓸쓸하다. 아무리 여행의 묘미가 여유에 있다고 하나 모든 게 멈춘 것 같은 모습이 되레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쫓아 다다른 곳에는 생선가게가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러시아 특유의 털모자와 털옷으로 완전무장(?)한 여인이 좌판을 펴고 생선을 팔고 있었다. 짐작건대 바이칼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들 같았다. 가격 흥정을 하고 물건을 구경하는 모습이 여느 시골장터와 다를 바 없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함께 술잔을 기울인 러시아인이 말하길 이곳은 '오믈'이 유명하다고 했다. 순간, 그가 건넨 말린 '오믈'의 맛이 떠올랐다. 비릿한 냄새에 울상을 지며, 삼켰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다시는 혀끝에 대기도 싫은 맛이었다.

생선가게 앞을 지나자 또다시 고요하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지만 오가는 이들이 없다. 심지어 시골치곤 꽤 큰 마트도 한산하다. 기웃거리며, 물건을 고르는데 점원이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다가온다. 숙소를 나와 처음으로 입을 뗐다. 우습게도 말을 걸어준 그가 고맙다.

몸을 녹이기 위해 숙소로 되돌아갔다. 찬바람을 맞으니 감기 기운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때마침 숙소에 도착하니 세탁기 안에 빨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미리 챙겨온 감기약을 먹고 건조대에 빨래를 널었다. 그리곤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기차역으로 향했다.

꽁꽁 얼어버린 바이칼 호수에서 만난 두 남자. 한명은 이탈리아 청년이고 다른 한명은 동네꼬마이다. 국적은 서로 달랐지만 바이칼 호수의 경이로운 풍경에는 모두 동감했다.
▲ 얼음호수 위 두 남자 꽁꽁 얼어버린 바이칼 호수에서 만난 두 남자. 한명은 이탈리아 청년이고 다른 한명은 동네꼬마이다. 국적은 서로 달랐지만 바이칼 호수의 경이로운 풍경에는 모두 동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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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달리는 경이로운 얼음호수... 바이칼 호수

다음날 떠나는 환바이칼 열차 표를 끊기 위해 기차역에 왔다. 조용한 동네와 달리 대합실 안이 시끌벅적하다. 곧장 매표소로 걸어갔다. 이튿날 오후 1시 20분 떠나는 동네열차를 예약했다. 매표소 직원이 기차표 대신 영수증을 건넨다. 이상하다. 열차시간을 확인했다. 모스크바 시간이 아닌 현지시간이다. 요상하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바로 바이칼 호수로 갔다.

숙소를 찾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동네 구경에 깜박했다. 슬류댠카는 바이칼 호수에 근접한 마을이다. 기차역서 몇 걸음만 옮기면, 세계 최대 담수호인 '바이칼 호수'를 만날 수 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넋이 빠져 있었다. 정신이 제자리를 찾자 마음이 들뜬다. 잰걸음으로 꿈에 그리던 바이칼 호수에 다다랐다. 그토록 그리던 호수의 모습은 상상 그 이상이다. 입 밖으로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 나왔다. 멍하니 한동안 입을 '떡'하고 벌린 채 서 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웅장한 풍경을 마주하니 숙취가 확 풀리고 감기 기운이 뚝 떨어지는 듯하다. 경이롭다는 말밖에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지표면과 경계가 모호한 얼음호수 위에 섰다. 손으로 눈을 치워내자 투명한 얼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얼었다. 그 위에 서서 힘껏 뛰어올라 세차게 착지했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몇 번 더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발만 아프다.

호수 위를 걷다 저 멀리 누군가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다가가 곁에 걸터앉으며 말을 걸었다. 이탈이아에서 왔다는 그는 술병을 손에 쥐고 수평선을 지긋이 바라봤다. 나도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얼음호수를 눈에 담았다. 잠시 뒤 이번엔 동네꼬마가 다가와 의자에 걸터앉았다.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남자 셋의 침묵 감상이 시작됐다.

감상에 취해 있던 그때, 멀리서 스키를 타는 사람이 보인다.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는 자동차가 호수 위를 달리고 있다. 곁에 있던 동네 꼬마에게 몸짓으로 물으니 아득히 멀리 떨어진 위치에 이튿날 목적지인 뽀르트바이칼이 있단다. 바이칼 호수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을 뒤로 하고 숙소로 향했다. 다음날 여정을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돌아오는 길, 또다시 호숫가 마을과 기차역에서 유기견에게 쫓겼다. 불길한 징조였다.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그날 저녁밥은 엉망이었다. 마트서 산 냉동식품의 요리법을 몰라 정체모를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어느 때보다 맛있는 야식이 간절한 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여행과 관련한 자세한 정보는 오블(http://blog.ohmynews.com/kaos80)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바이칼 호수, #슬류댠카, #러시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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