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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실은 몇 년 전에 비가 너무 안 와서 지하수가 마른 적이 있었어."

룸메이트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경험했던 일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수도 마르나요?"
"그럼. 지하수도 비가 땅으로 스며들어서 고이는 물인데 비가 오지 않으면 마르지."

오늘도 비는 오지 않을 것이다. 곧 장마 전선이 제주도에 북상 한다지만 이곳에 비를 뿌린다는 기상예보는 없었다. 마당에 심어 둔 여섯 그루의 토마토 중 다섯 그루는 다 죽고 한 그루만 살아있다. 물을 마음껏 줄 수 없으니 설거지 물도 부어주고 얼굴 씻은 물도 부어준다. 하지만 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 토마토 뿐이겠는가.

"몇 년 전에 지하수가 말라서 말이야. 펌프를 돌려도 물이 나오지 않는 거야. 그래서 씻을 물이 없어서 변기에 있던 물에 손을 씻기도 했어."

나는 그 말에 몸을 뒤로 빼고 못 볼 것을 본 사람마냥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변기 물에 손을 씻어요. 너무 더럽다. 마실 물도 없었던 건 아니겠죠?"
"무슨 소리야, 물이 나오지 않는 다니까. 다행히도 세수하려고 받아둔 물이 있었지. 그 물을 끓여서 마셨어."

그는 분명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몇년 전 지하수가 말랐던 이야기만 했다. 나는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것을 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금 지하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할까봐 조마조마 했다.

"며칠 동안이나요?"
"3일인가? 5일인가? 아니 일주일은 그랬나?"
"이 아침에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불안한 마음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싱크대 수도꼭지를 돌렸다.

물이 나오지 않았다.

모터 돌렸지만 물이 나오지 않는다... 아뿔싸!

그제서야 그는 몇 시간 전부터 모터를 돌렸지만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하수를 쓰는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 지하수를 농수로 사용했다. 모내기철부터 지금까지 마을 전체에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지하수의 물길은 제각각이지만  움직이는 물이 어느 장소에서는 만날 것이다. 여기저기서 끌어다 쓰니 남아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냥. 물도 안 나오고 답답해서. 우리 빨래하러 가자."

집에 있는 빨래 통에는 땀에 젖은 옷들이며, 눅눅한 수건, 양말짝들, 얇은 이불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우리는 물을 아끼는 방법으로 수건이 한 장 남을 때까지 빨래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빨래는 가득 쌓였고, 입었던 옷을 또 입어서 냄새가 났다. 룸메이트는 이제 입을 옷조차 없었다.

"어디로 빨래를 하러 가요? 물도 안 나오는데..."
"동생 집은 수도가 나오니까. 너도 어제 빨래를 해야 한다고 했잖니. 나, 이제 입을 옷도 없어. 옷에서 냄새가 나서 더는 못 입겠다."

나는 내심 기뻤다. 머리를 감을 수 있고, 편한 마음으로 샤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머리 감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던 나는 5월부터 머리를 3일에 한 번씩 감기 시작했다.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말라가고 연못은 이미 말라 있던 터라 머리 감는데 물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룸메이트의 눈치가 보여 마음껏 물을 쓸 수 없었다.

나는 급히 내 방으로 달려갔다. 빨래 통이 넘쳐 집어넣지 못해 가방에 쑤셔 두었던 내 옷들과 두 달째 사용한 베개커버, 매일 깔고 앉는 방석, 콤콤한 냄새가 나도 그대로 덮고 잤던 이불까지 죄다 꺼내왔다.

"이 많은 걸 다 빤다고?"
"어떻게 해요, 이렇게 밀린 걸. 냄새나고 곰팡이도 폈단 말이에요. 정말 신나요. 저는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샤워를 할 거예요. 간만에 머리도 감고. 생각만 해도 좋아요. 빨리 가요."

우리는 차 뒤 칸에 빨래 더미를 실고서 읍으로 향했다. 그의 동생은 고창읍, 군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심에 살고 있었다. 부부는 일터에 나갔을 것이고 아이들은 학교를 갔으니 그 집에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을 쓴다고 눈치를 볼 일이 없다.

그는 가는 도중에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빨래를 하러 간다고 말했다. 동생은 이유를 물었고 그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생은 이십년 가까이 농사를 지은 적이 있고, 그의 지인들 대부분이 농사꾼이라 물이 말랐다는 의미를 금방 알아챘다.

"비가 안 오니 어쩌겠소. 근께, 진작 수도를 놓래도 그라시오. 혼자 사는 것도 아닌디."

우리는 이십 분 거리에 있는 고창읍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차창에 비친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친구 엄마에게 얻은 삼십 년이 넘은 꽃무늬 치마에 늘어진 면티, 며칠 동안 머리를 감지 못해 모자를 눌러 썼다.
 친구 엄마에게 얻은 삼십 년이 넘은 꽃무늬 치마에 늘어진 면티, 며칠 동안 머리를 감지 못해 모자를 눌러 썼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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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고양이 세수를 했지만 꾀죄죄한 얼굴이 민망해 창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친구 엄마가 처녀 시절 입던 옷이라며 준 낡은 꽃무늬 치마, 목이 늘어난 면 티, 흰 고무신. 그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은 아닐까. 한 달이 넘도록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라면 이런 생활에 적응하는 내가 불쌍해 보였거나, 미안한 마음이 생겨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샤워기에선 물이 시원하게 뿜어져 나온다. 이렇게 물이 반가울까. 사막 한 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기분이 들 것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긴 시간동안 욕실에서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룸메이트에게 말했지만 물을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물이 아깝다는 생각에 쓰다가도 자꾸만 수도꼭지를 잠그는 내 손을 보았다. 아무래도 빨리 샤워를 끝내야 할 것 같다. 물을 마음껏 쓰는 것은 장마가 시작돼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그 원을 푸는 수밖에 없다.

찰랑이는 머리칼, 몸도 개운하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웬만한 클래식 연주 보다 감미롭게 들렸다. 나는 룸메이트와 동생 집 옥상으로 올라갔다. 뜨거운 볕과 불어오는 바람에 빨래가 정말 잘 마를 것 같았다. 빨래를 다 널고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빨래를 보고 있자니 빨래도 나도 출세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물이 없는 와중에 씻고 더러운 때를 벗겨냈으니 출세를 한 것은 맞다.

오랫동안 빨래통에서 나오지 못했던 빨래들이 때를 벗고 빨래줄에 널려 있다.
 오랫동안 빨래통에서 나오지 못했던 빨래들이 때를 벗고 빨래줄에 널려 있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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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보송보송하고 향기 나는 이불 속에서 잠들 수 있다. 바람에 날린 머리칼에서 나는 샴푸향이 정말 좋다. 내일은 또다시 고양이 세수를 해야 하고, 마시는 물의 양도 줄여야 하고, 빨래도 다시 쌓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두 번의 세탁 후, 햇살에 바짝 마른 수건들을 개어 통에 담았다.
 두 번의 세탁 후, 햇살에 바짝 마른 수건들을 개어 통에 담았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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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가뭄, #빨래, #이불, #바람,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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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경의로움에 고개를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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