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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밀양에 마지막 남은 4개의 농성장에 '행정대집행'이 예고된 날이었다. '안전한' 철거를 위해 하루 전부터 이천여 명의 경찰이 마을을 에워싸고 통행을 막았다. 밀양으로 와 달라는 송전탑 반대 대책위의 긴급한 호소가 있었지만, 갈 수가 없어 마음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영장의 효력이 발생하는 시간은 새벽 여섯 시, 페이스북에 간간이 올라오는 현장 소식을 보느라 잠을 설쳤다.

마침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있던 터라, 지난 밤이 80년 광주와 겹쳐졌다. 계엄군이 도청으로 들이닥치기 직전의 긴장과 불안이 현재의 밀양으로 이어져 오는 듯했다. 소년, 소녀에 불과한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그 도시의 모든 사람의 몸에 두 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듯이 칠팔십 대의 할매, 할배 백여 명을 끌어내리기 위해 스무 배가 넘는 경찰 병력이 투입되었다.

고립된 산중의 농성장에는 고요함 속에 전운이 감돈다고 했다. 예고된 시간을 향해 한 칸 한 칸 내딛는 시곗바늘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수녀님들의 기도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마주 잡고 깍지를 끼었다. 그들의, 아니, 우리의 기도가 이 세상에 널리 널리 울려 퍼지기를, 농성장으로 바싹 조여 들어가는 경찰의 장벽을 뚫을 수 있기를, 부디, 모두 무탈하시기를.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의 간절한 기도. 2014년 1월 조계사.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의 간절한 기도. 2014년 1월 조계사.
ⓒ 빈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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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총을 들었지, 그렇지?
그게 우릴 지켜줄 줄 알았지.
하지만 우린 그걸 쏘지도 못했어.
(<소년이 온다> 한강, 창비)

80년 광주에서, 총을 들었지만, 사람을 향해 겨눌 수 없었던 소년들, 여리디 여린 속살을 숨기지 못한 그들은 살기등등한 군인의 총칼에 무참히 쓰러졌다.

할매들은 연습했던 대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쇠사슬로 목을 감았다. 그래도 할 수 없어 옷을 벗었다. 나이 많은 할매를, 하얗게 드러난 맨살을 함부로 하지 못하리라는 기대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거침없는 행정대집행은 처음 보았다고 전했다. 사람의 머리 위에서 지붕을 뜯고 절단기로 쇠줄을 끊고 사지를 들어 올려 농성장의 집기들과 함께 내동댕이쳤다. 경찰들의 눈빛과 태도는 마치 테러범을 소탕하는 것 같았다고, 페이스북 동영상으로 전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은 정말 그렇게 보였다.

패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게, '돈'한테는 안 된다고, 한전과 경찰, 정부와 언론이 똘똘 뭉쳐 따돌리고 몰아세우는데 어떡하겠냐고들 하지 않았나. 군홧발 소리와 함께 강제 철거가 시작된 지 삼십 분이 되지 않아 농성장은 사라지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엄마, 왜 울어?"

알람 소리에 아이들이 깼다. 느닷없는 엄마의 울음을 아이들에게 설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단정한 언어로 표현해낼 수 없었다.

눈물을 훔치고 겨우 아침을 먹여 학교와 유치원에 보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노려보며 지냈다. 네 개의 농성장이 모두 털렸다. 다치고 병원으로 실려간 사람들의 소식도 들려왔다.

'우리 경찰'이 농성장을 찢고 부수며 노인과 수녀님들에게 폭력을 가했다. 원래 행정대집행의 주체는 공무원이고 경찰은 사고에 대비한 보조적인 활동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데, 현장의 안전을 위해 함께 왔다는 경찰이,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허용된 무력으로 사람들을 짓밟고 내동댕이친 것이다.

127번 농성장에는 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농성장의 태극기를 볼 때마다 정부와 공기업, 공권력에 맞서면서 태극기를 달아 놓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국가는 이들을 외면했고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는 이유로 '지역 이기주의',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불순분자'로 내몰았는데, '이따위 나라에 표할 애국심이 남아 있단 말인가!'하는 냉소가 떠오르기도 했다.

80년 광주에서도 국가가 자신을 배신하고 총칼을 겨누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돌이켜보면 할매들의 태극기는,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절박한 호소가 아니었을까? 국가가 국민을 이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꾸짖음이 아니었을까?

철거를 마무리한 여경들이 '브이'자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었단다. 사람이 다쳤는데, 사람의 몸과 마음에 피멍이 들게 하고 그 뒤에서 히히덕거리며 사진을 찍다니, 같은 사람으로서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하긴, 그렇게 악독하게 많은 사람을 죽인 나치 전범도, 이라크에서 포로를 학대한 미군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하지 않나.

경찰들은 그저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만족스럽게 해내었고 그것을 축하하고 싶었을 것이다. '악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생긴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무사유의 결과가 얼마나 잔인한 폭력이 될 수 있는지 밀양에서, 그리고 진도 앞바다에서도 계속 마주하게 된다.

나 역시 감정을 삭히고 차분하게 '생각'을 좀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나의 분노와 슬픔은 무엇 때문인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6·11 행정대집행 이전의 127번 농성장. 2014년 1월.
 6·11 행정대집행 이전의 127번 농성장.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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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번 농성장에서 바라본 126번 송전탑 2014년 1월.
 127번 농성장에서 바라본 126번 송전탑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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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싸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폭력적인 행정대집행을 규탄하는 촛불집회에 나갔다. 을지로입구역 한전 앞에 비좁게 모여 앉은 이들의 얼굴에서 비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고 유한숙 어르신의 큰아들, 유동환씨와 마주쳤다.

"그쵸, 할 말이 없죠? '아!' 하는 것밖에."

짧은 탄식, 그리고 나서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그가 말했다. 아마, 그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줄곧 서울에 계셨던 거예요?"

지난달 말에 그가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아버지 영정을 들고 청와대 앞에 갔다가 제지 당했다는 기사를 기억해냈다.

아, 그래, 이분의 아버지는 아직 냉동고에 계시지! 지난 연말, 돼지를 키우던 그의 아버지는 송전탑이 자신의 집과 축사 바로 곁으로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농약을 마셨다. '송전탑이 들어서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고인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초고압 송전선 아래에서는 가축들이 새끼를 잘 낳지 못하고 낳아도 기형이 많다는데, 돼지 축사를 운영하던 고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평생 이룬 재산과 삶이 무너져 내리는 그 충격을 살아서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고인의 목소리가 담긴 녹취록이 있는데도 경찰은 그의 아버지를 '가정불화'로 술김에 세상을 등진 노인네 취급을 했다. 밀양시는 분향소를 역시 폭력으로 철거하고 영정을 모독했다. 간간이 옆에서 함께 했던 지난 겨울의 일들이 가슴 아프게 떠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반 년이 지났는데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아들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 것인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그리고 그 죽음을 왜곡하고 영정을 내동댕이치고도 모자라 끝내 무시해 버리는 현실, 사람이 죽어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이 그는 얼마나 괴롭고 절망스러웠을까? 밀양의 마지막 농성장이 뜯겨 나가는 장면을 지켜보는 그의 고통은 남달랐을 것이다.

유린된 고 유한숙 어르신의 영정. 2014년 1월 밀양시청
 유린된 고 유한숙 어르신의 영정. 2014년 1월 밀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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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유한숙 어르신의 유족. 2014년 1월 밀양 시청 앞.
 고 유한숙 어르신의 유족. 2014년 1월 밀양 시청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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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보다 시골이 훨씬 살기가 좋아요."

언젠가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모두 그러했듯이, 그도 한때 도시 생활을 동경했고 도시에 나가 살기도 했다. 막상 살아 보니 별볼일 없다고 느꼈는지, 큰아들로서 부모님 곁을 지키고 싶었는지, 그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돼지를 키우고 가족을 건사하며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으리라.

밀양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그랬다. 크게 이름을 떨치거나 빛나는 자리는 아니지만, 열심히 일하고, 가족을 돌보고, 이웃과 정을 나누며 살았다. 별스럽지 않지만,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로, 남편과 아내로 기억될 만한 건실한 삶이었다.

할매들은 팔십 평생 별별 어려움을 겪어 봤지만 이런 '전쟁'은 처음이라고 했다. 자연재해나 불의의 사고보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의도적이고 부당한 폭력이 더 큰 상처를 남긴다. 대학 새내기 시절,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사진집을 보며 느꼈던 공포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개인의 삶이,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이 불의의 힘, 사람에 의한 무자비한 폭력에 짓밟히는 것은 얼마나 억울하고 무서운 일인지!

199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닌 우리는 5·18 특별법 제정을 외쳤고 책임자들이 내란죄로 법정에 서는 것을 보았다. 광주의 일은 일단락되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2000년대에도 평택 대추리에서, 강정에서, 용산의 철거민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지금의 밀양까지, 국가의 폭력에 소중한 삶들이 잔인하게 짓밟히고 있다. 밀양의 주민들은 '그날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작가 한강의 말처럼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고'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부정한 이익과 권력을 위해 국가가 폭력을 사주하고 건실하게 살아온 개인의 삶을 가혹하게 내동댕이친다. 이곳이 오늘 내가 살아가는 곳, 내가 마주하는 현실이라는 자각, 이것이 내가 밀양을 보며 분노하고 눈물 흘리는 이유이다.

"엄마,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왜 이렇게 오래 해?"

집회 장소 언저리에서 놀던 아이들이 그만 집에 가자고 보챈다. 조금만 더 참고 어른들이 하는 말을 가만 들어보라고, 재미는 없어도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일이라고, 아이들을 달랜다.

입속에서 '왜 쏘았지, 왜 찔렀지?' 대학 때 불렀던 민중가요 <오월의 노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래,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국가가 국민에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왜 그렇게 짓밟았는지 끝까지 캐물어야 한다, 또 다른 광주의 환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고 유한숙 어르신의 분향소를 폭력 철거한 밀양시를 규탄하며 시청 앞에 새로운 분향소 설치를 주장하는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들을 경찰이 '고착'하고 있다.
 고 유한숙 어르신의 분향소를 폭력 철거한 밀양시를 규탄하며 시청 앞에 새로운 분향소 설치를 주장하는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들을 경찰이 '고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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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두 아이와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줌마의 밀양 이야기, 6·11 행정 대집행을 지켜보고 6·14 밀양 촛불 집회를 다녀온 기록이다.



태그:#밀양, #송전탑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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