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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침몰사고에서 생존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25일 오전 등교를 하면서 희생자 유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눈물바다 된 등굣길 세월호침몰사고에서 생존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25일 오전 등교를 하면서 희생자 유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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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나이 열여덟,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아픈 사고였다. 25일 오전 8시 40분께, 세월호 침몰사고 당시 구조된 경기 안산 단원고 학생 75명이 사고 후 처음으로 등굣길에 나섰다. 지난 4월 16일 사고가 난지 71일 만의 학교 복귀다.

생존학생들은 '리멤버 0416(4월 16일을 기억하라)'가 새겨진 노란 팔찌를 손목에 차고 있었다. 이어 등교에 앞서, '저희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입니다'란 제목의 직접 쓴 호소문을 낭독했다. 차분히 호소문을 읽어 내려가던 2학년 남학생은 "사람이 진짜 죽을 때는 (모두에게서) 잊힐 때…"라는 부분을 읽다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호소문 낭독 후에는 학생들이 유족 측 학부모에게 가서 인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사랑한다', '얘들아 살아 돌아와줘서 정말 고맙다'는 등 직접 쓴 노란색 손 팻말을 들고 있던 유족 측 학부모들은 애써 웃음 지으며 아이들을 껴안고 격려했다.(관련기사: "친구들 잊지 말아주세요" 단원고 2학년 눈물의 등굣길)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교사들도, 함께 한 학부모들도 학생들의 호소문을 듣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훔치는 모습이었다. 다음은 등교에 앞서 단원고 학생들이 국민들에게 전한 호소문 전문이다. 

저희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입니다

저는 단원고 2학년 학생입니다. 오늘 저희는 우리 모두의 뜻을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모두가 부푼 기대로 떠났던 수학여행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저희는 4월 16일 사고 직후 진도에서 안산으로 오게 되었고 6월 25일인 오늘 등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고가 난후 탈출을 한 학생들은 팽목항과 서거차도로 옮겨졌습니다. 친구들의 생사마저 알 수 없었던 저희 들은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하지만 빨리 친구들과 선생님,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와는 달리 많은 기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고, 질문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그런 사진을 찍을 수도, 질문에 대답할 상황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바빴습니다.

아직도 기자라는 말만 들어도 공포에 떠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기자들의 카메라 렌즈가 저희에겐 다신지울 수 없는 상처로 다가왔습니다.

팽목항으로 이동하여 버스를 타기 전까지도 많은 기자들이 사진을 강제로 찍었습니다. 싫다고, 하지 말라고 했지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촬영을 감행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카메라 뒤로 보이던 한 기자의 웃는 얼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팽목항에서 진도체육관으로 이동해서도 저희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연속이었습니다. 많은 기자들을 차단하지도 않고 저희들을 방치했습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많은 기자들이 인터뷰를 권유했고 그 역시 친구들에게는 상처로 다가왔습니다.

친구들의 생사여부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진도체육관에서도 저희들을 몇 시간 동안이나 어떠한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다가 겨우 안산고려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졌습니다.

사고로 인한 많은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와전되어 오보로 나가는 기사가 많았습니다. 특정 정치인들이 선거공약으로 내새웠던 내용들이, 마치 생존자 학생들과 가족들이 사고를 어떤 기회로 삼으려는 듯이 기사내용에 표현되었고 그런 기사를 접한 사람들은 우리 모두를 비난했습니다. 그 비난은 또 다른 상처로 저희들에게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저희는 아직도 수많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처음엔 샤워를 하지도, 장을 자지도 못할 만큼의 공포에 시달려야만했습니다. 고려대학병원과 중소기업연수원에서 많은 의사선생님들과 다양한 치유프로그램 선생님들, 그리고 도움을 주시는 상담박사님과 교수님들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지금은 모두가 회복되어지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단계에 오기까지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에 적응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많은 치유 프로그램 선생님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을 하면 할수록 잊고 싶던 사고의 기억을 억지로 희상해야 했습니다. 치유프로그램을 하는 것에 있어 저희들의 의사는 존중되지 않았습니다.

정서적 치료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들임을 저희들에게 먼저 설명해주시고 그 필요성을 먼저 설명해주시길 저희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다신 지울 수 없는 상처가 가슴 깊이 새겨진 저희를 위로하고 격려 해주시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안부를 물으시는 분도, 유감을 표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에 반면 사고를 희상시키는 질문을 하고 탈출과정을 묻기도 하며 SNS와 메신저를 통해 불쾌한 메시지를 보내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너만 살아 나와서 좋느냐, 친구들을 어떻게 배신하느냐와 같은 말로 저희들에게 비수를 꽂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오고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기도, 끔찍한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관심이든, 나쁜 관심이든 이제는 그만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관심에 너무도 지쳐있는 저희들입니다. 저희 모두는 이제 사고 이전으로, 원래의 생활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18세 소년 소녀로 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요즘 많은 감정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하염없이 울 때도, 멈추지 못할 만큼 웃음이 나올 때도 아무 일도 못할 만큼 무기력 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 저희를 이해 안 된다는 시선이나 안쓰러운 시선으로 보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에게는 애타게 불러보아도 다신 만날 수 없게 된 친구들과 선생님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두 모일수도, 아니 어쩌면 이런 자리가 없었을 수도 있었지만, 책임을 회피하는 어른들과 이기심에 가득한 어른들 때문에 우리 결을 떠나야만했던 그런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저희에겐 있었습니다.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음에 가슴이 시리게 아파오고 또 다시 눈물이 납니다. 주위 어른들은 항상 잊고 힘내라고 말하십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들을 기억하며 추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이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과의 추억은 죄책감의 기억이 될 수도, 계속 함께 하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듯 국민여러분들도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나라를 이끄는 모든 어른들이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책임자를 엄벌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왜 희생돼야만 했고, 왜 구조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야만 했는지에 대해 확실한 조사를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번사고와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다 안전한 나라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진짜 죽을 때는, 잊힐 때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를 잊지 말아주세요. 잊히는 순간 정말 모든 게 끝난다는 걸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희생된 친구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세월호를 부디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2014년 6월 25일
단원고등학생 생존학생 일동


태그:#생존학생 등교, #단원고 생존학생, #생존학생 학교 복귀, #세월호 침몰사고, #세월호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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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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