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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옛 속담은, 적어도 필자의 영화 선정에 있어서는 정석과도 같은 말이었다. 전 국민의 눈물을 쏙 빼놓았다던 <7번방의 선물>은 코믹함 이후 억지로 꾸겨 넣은 감동 코드 밖에 보이지 않았고, 영화계의 흥행보증 수표들이 대거 출연한 <베를린>은 스토리에 있어 뭔가가 부족했다.

영화 <그녀>의 한 장면
 영화 <그녀>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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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일) <그녀[her]>를 보러 착석한 후 영화 전 광고 영상이 끝날 때까지,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불안'이었다. 주변에서 영화에 대한 호평을 워낙 많이 했기에, 오늘도 관람 후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녀>는 내게 처음으로 기대 이상의 감동을 준 영화다.

<그녀>는 멀지 않은 미래에 인공지능을 가진 OS(Operating System)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혼남의 사랑이야기다.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손 편지를 써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주인공은 전 부인과의 이별에 상처를 받고 우울해 한다. 그는 우연찮게 인공지능을 가진 OS에 대한 광고를 보게 되고, 하루하루 OS 속의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결국 깊은 사랑에 빠져버리게 된다.

영화 <그녀>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색감'이다.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영화 속에선 따뜻한 빨간색의 항연을 볼 수 있다. 주인공이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집의 가구는 대부분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의 옷도 짙은 분홍빛의 셔츠, 빨간색 코트와 같이 모두 다 따스한 색깔로 이루어져있다.

영화 초반, '그녀'를 만나기 전에 주인공이 입고 있던 다홍색 셔츠는 그의 우울함을 증폭시켜주며 아이러니함을 엿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또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다음, 그가 입고 있는 똑같은 색상의 셔츠는, 호수에 비치는 그의 미소를 더더욱 아름답게 꾸며준다. 따뜻한 색깔의 옷을 입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도시를 누비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마음 역시 따스한 빛으로 물드는 것만 같다. 그 누가 알았으랴, 사랑을 하는 남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은 잘 빠진 남청색 정장이 아니라 다홍색 셔츠였던 것을.

영화 <그녀>의 또 다른 특징을 꼽자면 목소리만으로도 열연을 펼치는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이다. 스칼렛 요한슨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성으로 분하여 OS로만 존재하는 그녀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는데, 많은 전문가들이 그녀의 캐스팅을 영화의 화룡점정으로 평가하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청'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배우가 연기했을 표정, 몸짓, 감정이 모두 느껴졌고, 주인공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와 어우러져 멋진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청자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항상 우울해했던 남자를 밝게 변화시켜준 그녀는 분명 <어바웃 타임>의 레이첼 맥아담스보다 맑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레 미제라블>의 아만다 사이프리드 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비록 볼 수 없었으나 그려볼 수 있었던 그녀는 분명 영화 속의 히로인이었고, 관객으로서 그녀를 볼 수 없어서 아쉬웠기 보다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현실의 굴레에 제한될 수 없음에 감사했다.

혹자는 뻔한 SF영화라고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평면적일 수 있었던 플롯보다는 스크린을 적셨던 따스한 색들과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사랑에 행복해 하는 주인공의 얼굴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던 영화였다.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서도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객을 볼 수 없었다. 모두가 그녀의 여운에 취해있는 듯했다.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귀를 떠나지 않았다.


태그:#그녀, #영화,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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