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무덤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누군가가 남기는 마지막 흔적입니다.
 무덤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누군가가 남기는 마지막 흔적입니다.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무덤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누군가가 남기는 마지막 흔적입니다. 무덤에는 한 사람의 주검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남긴 이런 사연과 저런 애환까지도 함께 묻혀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은 100년을 넘기기 힘들지만 흔적으로 남아있는 무덤 중에는 수백 년을 훌쩍 넘긴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무덤에는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시대적 가치와 정치·문화적 환경, 사회적 풍습과 예술성까지를 복기해 낼 수 있는 열쇠 말들이 비밀코드처럼 암각화 돼있습니다.

초야에 널려있는 범부들 무덤에는 범부들이 살아온 이야기와 그들이 꾸리며 살아간 문화가 시대를 상징하는 흔적으로 묻혀있습니다. 왕릉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 시대의 왕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누렸거나 감내해야만 했던 모든 것은 물론 겉으로는 쉬 드러나지 않던 암투와 시비, 술수와 비정함까지도 농축되고 상징화되어 담겨 있는 게 왕릉입니다. 

세계문화유산 <신의정원 조선왕릉>

<신의정원 조선왕릉>(지은이 이창환 사진 서헌강/도서출판 한숲/2014. 5. 18/3만 원)
 <신의정원 조선왕릉>(지은이 이창환 사진 서헌강/도서출판 한숲/2014. 5. 18/3만 원)
ⓒ 도서출판 한숲

관련사진보기

<신의정원 조선왕릉>(지은이 이창환 사진 서헌강/도서출판 한숲)은 지난 2009년 6월 29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개최 된 제33차 세계유산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시대 40기 능원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내용입니다.

1392년에 개국한 조선은 518년 동안 27대에 이르는 왕에 의하여 통치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부터 마지막 왕 순종까지 27대 왕과 왕비, 추존왕 무덤인 능(陵)이 44기 있으며, 왕세자와 세자비의 무덤인 원(園)이 13기 있습니다.

이중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에서 폐위되어 묘로 조성되므로 전체 왕릉은 42기입니다. 하지만 태조의 원비인 신의왕후 제릉과 2대 왕 정종과 정안왕후를 모신 후릉은 북한 개성에 있어 전체 57기의 능원 중 그 나머지 수의 능원만 남한에 있습니다.

지난 2009년 6월 29일, 남한에 있는 능원 중 40기가 스페인 세비야에서 개최 중인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6월 29일은 태조 이성계가 74세를 일기로 승하한 1408년 6월 29일로부터 601번째로 맞이하는 기일(忌日)이기도 하니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 40기 능원, 어떻게 조성되고 어떤 사연 담겨 있나

책의 내용은 전체 3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제1장에서는 조선왕릉의 조영적 특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능원의 역사와 발전과정, 조선왕릉의 입지와 형식, 능원의 경관과 공간구성과 같은 기본구성에 이어 공간에 조성되어 있는 건축물, 석조물, 연지와 재실 등을 사진과 동선도, 개념도와 배치도 등을 이용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2장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40기 능원을 사진과 배치도를 덧대어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능원 하나하나가 조성되는 과정과 배경은 물론 정사로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과 야사로 전해지는 은밀한 이야기들까지를 모두 아우르고 있습니다. 

태종을 염(殮) 할 때는 날씨가 너무 더워 소렴과 대렴을 같이 했는데, 소렴을 할 때 19벌의 옷을 입히고 대렴을 할 때 90벌의 옷을 입혀 도합 109벌의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109벌의 옷을 입인 이유는 108번뇌를 벗어나는 해탈로 해석된다고 합니다.

스승의 날이 5월 15일로 제정된 것은 만백성의 스승인 세종이 태어난 날을 기리기 위해서이며, 중종 정릉을 조성할 시에는 산릉 일에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세종의 외손인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니 그 임꺽정이 조선 3대 도적 중 한명인 그 임꺽정과 동일인물인지가 궁금해져 저절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읽게 됩니다.

선덕왕후 승하 후 1398년과 1400년에 2차게 걸친 왕자의 난을 치루고 왕권을 잡은 이방원(태종)은 1406년에 아버지 태조가 공들여 조성한 정릉의 능역이 넓다하여 능에서 100보 밖에는 집을 짓도록 허용하였다. 이때 영의정 하륜이 제일 먼저 여러 사위를 거느리고 선점했고, 이곳의 소나무를 베어 사가의 집을 지었다. 일종에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최초의 부동산 투기자는 하륜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관대작의 투기는 버릇인 것 같다. -<신의정원 조선왕릉> 88쪽-    

한 기의 능, 한 기의 원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읽다보면 구중궁궐 속 역사와 야사를 좀 더 입체적으로 접할 수 있고, 왕가에 서린 시대적 애환과 삶까지도 이렇게 저렇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홍릉 한쪽이 비어있는 까닭은?

일화에 따르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돌아가게 한 할아버지를 미워한 까닭에 영조가 수릉으로 만든 홍릉에 함께 모시지 않고 동구릉내 효종의 영릉 초장지터에 모셨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남편이 원비인 정성왕후와 나란히 묻히는 것이 싫어서 홍릉 대신 동구릉을 택했다고 한다. 어떻든 소선시대 42기의 능 중 유일하게 왕의 유택이 지금까지도 비어 있는 특이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신의정원 조선왕릉> 399쪽-

무덤에는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시대적 가치와 정치·문화적 환경, 사회적 풍습과 예술성까지를 복기해 낼 수 있는 열쇠 말들이 비밀코드처럼 암각화 돼있습니다.
 무덤에는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시대적 가치와 정치·문화적 환경, 사회적 풍습과 예술성까지를 복기해 낼 수 있는 열쇠 말들이 비밀코드처럼 암각화 돼있습니다.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현재 홍릉은 그 한쪽이 비어있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하게 서 있어야 어울리는 구도 사진에 한 사람만 찍혀있는 사진처럼 봉분 두 개가 나란하게 있어야 균형이 맞는 곡장(曲墻, 봉분과 석물 바깥쪽으로 쌓은 담) 안 한쪽이 비어있는 상태라서 한 눈에 봐도 좌우 대칭이 맞지 않습니다.  

영조는 당신보다 먼저 죽은 원비 정성왕후를 장사지내며 우허제(右虛制, 당신이 죽으면 묻힐 무덤을)로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생자이동위상(生者以東爲上), 살아 있는 사람은 동쪽(왼쪽)이 상석이고, 사자이서위상(死者以西爲上), 죽은 사람은 서쪽(오른쪽)이 상석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오른쪽(동쪽)이 영조가 묻힐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홍릉으로 가지 못하니 오른쪽이 지금껏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제아무리 임금이었을지라도 죽고 난 이후의 일은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며 그들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홍릉은 그 한쪽이 분명 비어있습니다. 하지만 홍릉 한쪽이 비어있는 내력(까닭)을 알게 되면 한 시대 최고 권력자였던 영조가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남긴 흔적들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봉분으로 쌓여있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책에서는 단순하게 40기의 능원을 열거하듯이 소개하며, 획일적인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제3장에서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적 가치와 향후 과제'를 덧댐으로 세계유산 등재에 따른 기대효과와 등재 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정리해 숙제처럼 제시하고 있습니다.

518년에 걸쳐 똬리를 틀어간 조선역사, 그 정점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한 역사적 정사와 야사에 얽힌 사연들까지를 아우르고 있는 <신의정원 조선왕릉>을 통해 조선역사를 폭 넓고 흥미롭게 새길 수 있게 될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신의정원 조선왕릉>(지은이 이창환 사진 서헌강/도서출판 한숲/2014. 5. 18/3만 원)



신의정원 조선왕릉 - 세계문화유산

이창환 지음, 서헌강 사진, 한숲(2014)


태그:#신의정원 조선왕릉, #이창환, #서헌강, #도서출판 한숲, #세계문화유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