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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 문제가 일본 외교에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지금은 북한의 비핵화와 핵능력 고도화를 막기 위해 한국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5자 간 협력이 중요한 시기다. 북한 핵문제와 조화를 이루도록 협의를 해나가야 한다." (외교부 고위관계자)

"유엔 대북 제재 내용까지 건드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힘을 모아서 북한을 제재한다는 그 정신을 분명히 보여줘야 하는 상황인데…." (통일부 당국자)

북한과 일본이 26∼28일 스웨덴 스톡홀름 회담에서 한 '납북 일본인 재조사-일본 독자제재 해제' 합의에 대한 우리 정부 당국자들의 반응이다. 인권문제가 걸려 있어서 대놓고 비판은 못 하지만 불쾌감이 드러난다.

이 같은 분위기는 "정부는 인도적 견지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이해한다. 다만 북한 비핵화 문제에 관해서는 한·미·일 3국 모두 국제적 공조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공동의 인식을 갖고 있는 바, 이러한 맥락에서 일북 협의 동향을 계속해서 지켜보겠다"는 정부의 공식입장에도 그대로 투영돼 있다. '이해한다'는 외교적 수사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지켜볼 것'이라는 대목에서 불만감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북한 선박 입항금지·송금·휴대금액 제한조치 해제... 허 찔린 한국 정부

아베 일본 총리
 아베 일본 총리
ⓒ 일본 총리관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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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북일 합의는 2008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후쿠다 야스오 총리 시절의 납치문제 관련 합의보다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2008년에는 재조사 범위를 '납치피해자 및 행방불명자'로만 했지만, 이번에는 '일본인 유골 및 묘지, 잔류 일본인, 일본인 배우자, 납치피해자, 행방불명자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으로 확대했고, 조사결과 확인된 생존자에 대해서도 2008년에는 일단 일본 측에 통보하고 처리방식을 협의키로 했지만, 이번에는 귀국시키는 방향에서 거취를 협의하기로 명시했다.

제재 해제 문제에 대해서도 2008년에 인적 왕래와 전세항공편 규제 해제에만 합의하고 인도적 목적의 북한 선박의 입항금지 문제는 재협의하기로 한 데 비해 이번에는 북한 선박의 입항 금지의 해제뿐 아니라 송금 및 휴대금액 제한조치까지 해제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대북지원도 약속했고, "일본 측은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재일 조선인의 지위문제를 성실히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는 문항을 통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본부건물 문제도 포함시켰다.

또 2002년 9월 당시 고이즈미 총리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이뤄낸 '평양선언'도 재확인하면서 이번 합의가 '국교정상화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번 합의가 '빅딜'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우리 정부는 처음에는 이번 북일 회담에서 별다른 진전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29일 낮 시점까지 "(계속 협의하기로 했다는) 일본 측 발표 외의 다른 내용을 파악한 바 없다"고 했다.

그러다 오후 6시께 '오후 6시 30분 북일 동시 발표'와 아베 총리 기자회견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우리 정부는 공식 발표 직전에야 일본으로부터 발표 내용을 통보받았다. 양국은 수뇌부 재가를 받기까지 철저히 보안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합의 내용도 '빅딜'성인 데다, 전격적으로 발표되면서 '허를 찔리게 된' 우리 정부의 당혹감은 더 커졌다.

경제지원, 한미일 3각 협력 파열 의도 북한... 외교 고립 탈피하려는 일본

이번 합의는 일본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는 한편 미국의 주도로 한미일 3각 협력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려는 북한과 동북아에서 고립을 탈피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맞물린 결과로 해석된다.

북한은 '핵문제 해결을 위한 진정성 있는 선 행동'을 요구하는 한국과 미국에 막혀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이 희박한 데다, 남북 관계도 파탄 난 상태에서 돌파구가 필요했다. 특히 최근에는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 미사일 방어(MD)체제 등 한미일 3국의 군사협력 움직임도 강화되는 상황이었다. 아베 일본 총리도 과거사 문제로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극히 악화돼 있고,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와 집단적 자위권 추진 등으로 국내 지지가 약해지고 있는 상황을 타개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북한은 1990년대 중반과 2002년 고이즈미 총리 방북 등에서 나타난 것처럼 전통적으로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닫혔을 때 일본카드를 활용해왔다"며 "북한 입장에서는 납치자 문제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양보해도 한국과 미국 등 다른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북일 합의는 한국과 중국에 대한 견제 성격도 짙다. 시진핑 주석은 오는 6월경 방한 예정이다. 중국 최고 지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북한에 앞서 한국을 먼저 방문하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핵문제에 대한 불만으로 김정은 제1위원장의 방중 요청을 거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도 과거사 문제를 고리로 한국과 중국이 접근하는 것을 의식해왔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 '통일대박론' 빛바랜 상황에 북일 관계 급물살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 국빈방문 마지막 날인 지난 3월 28일 오전(현지시각) 작센주 드레스덴공대를 방문, 교수. 학생등을  대상으로 통일 프로세스를 밝히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 국빈방문 마지막 날인 지난 3월 28일 오전(현지시각) 작센주 드레스덴공대를 방문, 교수. 학생등을 대상으로 통일 프로세스를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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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한미일 3각 협력을 기초로 한 국제사회의 일치된 메시지를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겠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일본의 적극적인 대북 화해 추진으로 차질을 빚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이 국교정상화의 전제로 삼아온 '납치 재조사' 문제에서 일단 첫 발을 뗐다는 점에서 이후 진전 상황에 따라 아베 총리의 방북이 실현될 수도 있다.

대북 정책의 총 노선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올해 들어 드라이브를 걸었던 '통일대박론'이 독일 드레스덴 연설 이후 북한의 반발로 첫걸음도 떼지 못한 상황과 크게 비교될 수밖에 없게 됐다. 한국은 말만 무성했을 뿐, 일본이 먼저 신뢰프로세스를 시작하면서 '뒤통수를 맞은' 형국이 돼 버렸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연구실장은 "말로만 통일대박 운운하는 것보다 아베 총리가 훨씬 노회하다"고 평가했다.

납치자 문제 조사 매우 예민

북한과 일본은 2002년 평양선언에서 "불미스런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 사항을 해결하며 결실 있는 정치·경제·문화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쌍방의 기본 이익에 부합"한다며 ▲국교정상화 실현을 위한 노력 ▲일본 쪽의 식민 지배 사죄 ▲상호 안전 위협 행동 금지 ▲역내 평화·협력을 위한 협력 등을 합의한 바 있다. 북일 관계 개선을 위한 역사적 합의였으나 북한의 일본인 납치 공식 인정이 오히려 일본 내 여론을 악화시키면서 북일 관계는 다시 나빠졌다. 이처럼 납치자 문제는 북일 관계에서 예민한 문제다.

현재도 일본은 자국민 17명을 공식적인 납치 피해자로 규정하고, 2002년 귀환한 5명을 제외한 나머지 12명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반해 북한은 13명만 납치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일본이 납치됐다고 주장하는 17명 중 4명은 북한에 입국한 적도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번에는 여기에 860명에 달하는 '특정 실종자(일본이 주장하는 납북 가능성이 있는 실종자)'까지 조사 대상에 포함됐다.

이후 실제 '조사'가 매우 어려울 것임을 예상케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이번 일본 조치가 대북제재를 희석할 것을 우려하는 미국과 한국의 견제도 예상된다.


태그:#일본 납치자 문제, #아베, #2002년 평양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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