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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메시지는 '탄자니아 단원 조문 관련'이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었다. 부고였다. 지난 21일 한국국제협력단 소속의 한 해외봉사단원이 말라리아 발병 사흘 만에 병세가 악화되어 숨졌다.

강의 일자, 강사 이름, 강의 제목, 소감 등을 적었다.(1995년 5월 29일부터)
▲ 해외봉사단 출국 전 국내 소양교육을 기록했던 노트 강의 일자, 강사 이름, 강의 제목, 소감 등을 적었다.(1995년 5월 29일부터)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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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탄자니아 현지 경찰서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기 위해 작년 9월 29일 탄자니아로 해외봉사를 떠났던 34세의 신체 건강한 사범이었다. 아무리 한 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해진 이치라고 하지만, 젊은이의 부고는 언제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후배 봉사단원의 부고에 가슴 먹먹함을 쓸어내리려 20년 전, 해외봉사단원으로 출국하기 전 국내교육을 받으며 정리했던 대학 노트를 들춰봤다. 예나 지금이나 괴발개발 갈겨 쓴 손글씨지만, 소양교육을 받을 때는 그나마 정성을 기울였었는지, 읽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기록은 1995년 5월 29일자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매 강의마다 강의 일자와 강사 이름, 강의 제목, 소감을 적어 놨는데, 받아쓰기를 즐겨하지 않는 내가 기록한 것 치고는 상당히 많은 분량이 적혀 있었다. 같은 날에 있던 강의도 강사에 따라 소감이나 강의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주 짤막하게 적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6월 2일이었다.

1995년, 이한동 국회부의장의 '실언'

6월 2일 강사로는 당시 이름만 들어도 쟁쟁했던 사람들이 이름을 올렸다. 이한동 국회 부의장,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 소장, 유태영 건국대 부총장, 채규철 두밀리자연학교 이사장. 강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평소 만나기도 쉽지 않은 이들이었다.

당시 이한동 국회 부의장은 '21세기를 대비한 한국청년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그런데 강의 내용은 전혀 기록돼 있지 않고, 소감만 단 한 줄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한동은 정치인이었다. 식민사관을 비판했으나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한동 전 총리.
 이한동 전 총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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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짧은 소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강사가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고 적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강의 내용 중 일부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당시 남북한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결 전망, 그로 인한 한반도의 중요성과 함께 우리 정부가 그런 계획을 추진할 것임을 역설했다.

강의를 들으며 사람이 참 박학다식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강의를 마치고 강의실을 나가기에 앞서 큰 실언을 했다.

"6·27 지방선거에서 압승하여 각하께 충성합시다."

1995년은 처음으로 지방자치단체장을 주민의 투표로 선출하던 해였다. 지자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전국동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권 여당 소속 국회부의장이 해외봉사를 떠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한 '각하께 충성합시다'라는 발언은 많은 교육생들로부터 야유를 받기에 충분했다. 교육생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야유를 쏟아냈다.

강사 역시 갑자기 당황한 듯, 얼굴색이 변하며 강의를 급하게 마무리 짓고 나갔던 모습이 아직까지 선하다. 이한동 부의장 입장에서는 한국해외봉사단원들이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에서 파견하는 만큼, 여권 성향이 강할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그런 발언을 무심코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지지 정당의 여부를 떠나서 봉사단원들은 그런 식의 '관권선거'에 분명한 거부의사를 밝혔다. 이한동 부의장은 강의 말미의 한마디로 점수를 다 깎이고 체면을 구기고 만 셈이었다.

이어진 이한구, 유태영씨의 강의는 무난했던지, 강의 내용이 촘촘히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그날 가장 인기 있었던 강의는 장기려 박사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운동을 벌였던 두밀리자연학교 채규철 이사장이었다.

강의는 청중들의 눈물, 콧물 혼까지 쏙 빼놓을 정도로 명강이었다. 강사는 조곤조곤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그는 교통사고로 3도 화상을 입고도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을 '사명을 다하기까진 죽지 않는다'는 리빙스톤의 말로 대신했고, 우리에게 스토리를 가진 인생이 될 것을 당부했다.

"우리가 남겨 놓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은 하나의 스토리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신념, 신앙을 가지고 살았을 때 후손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겨 놓을 수 있다. PMA(Positive Mental Attitude, 긍정적인 정신 태도)를 가지고 아름다운 인생 스토리를 엮어가라."

삶 자체가 스토리였던 인생 선배가 들려주었던 감동은 강의가 끝난 후에도 이어져, 강사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가 종종 해외봉사단원으로 떠나기에 앞서 다짐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건, 그때만큼 순수했던 시절도 없었고 열정이 넘쳤던 때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거나 새로운 것이 두려울 때, 그때를 떠올리며 가슴 따뜻한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를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각오를 새롭게 하기도 하고, 도전을 하기도 한다. 

2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한마디

그런데 오늘은 대학노트를 접으며, 일종의 기시감을 느끼며 씁쓸해 해야 했다. 이한동 부의장의 '각하께 충성합시다'라는 발언이 20년이 지난 오늘날 누군가에 의해 표현을 달리할 뿐, 내용은 다를 바 없이 발화되며 언론에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달라."

최경환 새누리당 중앙당 공동선대위원장을 비롯한 친여 성향의 인사들이 내뱉는 말을 듣노라면, 20년 전 '각하께 충성합시다'라고 목소리를 외쳤던 사람과 오버랩된다. 사실 여당 인사가 '각하께 충성합시다'는 말을 한 것은 나무랄 게 못 된다. 다만 그 말을 듣는 대상이 누구며, 과연 적절한 장소였는가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반면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달라"는 것은 이 시대를 군왕을 하늘로 모시는 왕조 시대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 듣는 대상이 누구든 장소가 어떻든 간에 국민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야 할 대통령을 국민이 섬겨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20년 전보다 더 천박해진 정치인들의 발언이 심히 유감스럽고, 그것을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 이 시대가 통탄스럽다.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달라고 호소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정치에 스토리가 있을 수 있을까? 스토리로 치자면 차라리 '각하께 충성합시다'라고 말하는 이의 주먹 쥔 으름장이 더 솔직해 보이고, 일관성 있어 보이지 않는가?

후배 봉사단원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들췄던 대학노트를 접으며, 가슴 따뜻한 이의 이야기,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는 이의 스토리가 더욱 그리워진다.


태그:#지방선거, #한국해외봉사단원, #이한동, #채규철, #최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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