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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정다운 옛 대문 '정낭'
 제주의 정다운 옛 대문 '정낭'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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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30일 오후 6시 5분]

게스트 하우스, 민박, 리조트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제주도에 처음으로 캠핑 여행을 떠났다. 애마 자전거에 집 한 채(텐트)를 싣고 금속말 탄 유목민처럼 제주 섬을 달려 보리라, 오래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던 일이었다. 푹신한 의자와 편안한 침대를 벗어나 불편함을 자청하는 여행이지만 잠시나마 제주 섬의 풍광 속을 실컷 달리고 싶었다. 계절마다 다른 느낌,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는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달리다 보면 가슴속의 울렁거림이 조금은 가라앉을 것 같았다.

수도권에서 제주까지 가는 배편이 사라져 오랜만에 비행기에 자전거를 포장해 실었다. 기자 같은 자전거 여행자들이 많아지자 자전거를 특수화물로 규정했다며 만원을 더 받아내는 항공사의 얄팍한 상술에 조금 화가 났다. 자전거가 무슨 특수화물이냐며 항의를 하자 항공사 창구 직원은 '골프채나 자전거 같은 스포츠 아이템'에 추가 수하물 요금을 물린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항공사 누리집 화면을 보여 주었다. 자전거가 골프와 동급으로 취급을 받게 되다니 쓴웃음만 났다. 1시간 후에 마주한 바람과 풍경은 다행히도 그 모든 것을 다독여주기에 충분했다.

16:9 화면이 어울리는 풍광의 섬

마음을 흔드는 청보리 들판, 현무암 밭담은 훌륭한 액자가 되었다.
 마음을 흔드는 청보리 들판, 현무암 밭담은 훌륭한 액자가 되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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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고 허술해 보이지만 거센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제주 돌담.
 투박하고 허술해 보이지만 거센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제주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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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배를 내보이며 날아다니는 비행기들의 굉음에서 겨우 벗어나자 비로소 제주 서쪽 해변과 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주의 역사와 제주인의 삶이 담겨 있는 꾸밈이라곤 없는 검은 돌이 해안가를 따라 반갑게 이어졌다. 육지의 도시에선 가로와 세로가 3:2 정도의 비율로 익숙했던 시선이 저절로 16:9의 화면으로 바뀌었다. 영화처럼 옆으로 긴 가로화면이 어울리는 특별한 섬 제주에 온 게 실감이 났다.

봄에 찾아간 제주 섬의 청보리 들판이 장관을 이루었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살아있는 그림을 마주한 듯해 페달을 멈추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언뜻 보면 대충 쌓아 올린 것 같은 까만 현무암 돌담은 소박하고 투박해서 정이 가고, 참 자연스러워서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굳이 꾸미거나 더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우리 조상들이 추구했다는 고졸미(古拙美)가 반드시 예술 작품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제주도 여행 내내 눈을 붙들어 둔 건 명승지의 풍광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만나는 돌담이었다.

옛부터 제주 사람들은 집터에서 나오는 돌로는 집담을 쌓고, 밭에서 나오는 돌로는 밭담을 쌓고, 바닷가에서 나오는 돌로는 원담을 쌓고, 묏자리에서 나오는 돌로는 산담을 쌓았다. 이런 담들은 제주의 강한 바람과 말과 같은 가축으로부터 집과 농작물을 지켜냈고, 소유지를 구분하는 경계와 도로의 역할을 하였다. 원담은 물고기를 손쉽게 잡게 했고, 산담은 사자의 영혼이 깃든 곳이 되었다. 제주 사는 예술가들이 사진과 그림으로 끊임없이 돌담을 표현하고 그려내는 게 당연하겠구나 싶었다.

해안도로 내리막길에서 자전거가 천천히 내려갈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대곤 하는데도 쓰러지기는커녕 미동도 없는 제주 돌담은 볼 적마다 신기하다. 어느 밭담에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을 찍다보니 그 비결을 알 것 같았다. 허술하고 엉성해 보이는 까만 돌무더기 사이에 자연스럽게 숭숭 뚫린 구멍들이 그 비밀. 조금씩 바람이 빠져 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줌으로써 거센 바람이 구멍으로 빠져나가면서 돌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의 돌담은 '소통'의 위대함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물때가 맞아야 볼 수 있는 제주의 옛 돌그물 '원담', 시에서 복원해 놓았다.
 물때가 맞아야 볼 수 있는 제주의 옛 돌그물 '원담', 시에서 복원해 놓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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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만나는 해변의 풍광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긴 가로 풍경이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색하는 제주 바다는 흡사 주변 상황에 따라 몸의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다. 화창한 햇살이 비추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쪽빛이 되다가도, 구름이 낀 흐린 날씨가 되면 어느 새 회색의 짙고 음울한 톤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런 이질적인 풍경을 마주할 때면 제주의 바다는 식물처럼 광합성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바닷가를 달리다 보기 드문 제주의 돌담 '원담'을 마주치게 되었다. 옛 사람들이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만든 돌 그물로, 서해 바닷가에 있는 '독살'과 같은 것이다. 지구와 '밀당'을 하는 달님의 허락을 받아야 볼 수 있다. 운 좋게도 이번 제주 여행에선 집을 든든히 두른 '집담', 논밭의 '밭담', 무덤가의 '산담', 숲속의 '잣담'에 이어 바닷가의 '원담'까지, 제주 돌담을 원 없이 보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파도가 찰랑거리는 원담 위를 걸어보기도 했다. 돌담이 튼튼하고 멀쩡하다했더니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진 원담을 제주시에서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그런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며 바닷가를 지나가는 장년의 부부에게 이게 원담이 맞는지 물어 보았다.기자를 빤히 쳐다보던 아저씨에게서 들려온 답은 짧았다 무라고 말을 해서 이색적인 제주 사투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중국에서 제주도로 관광온 사람들이었다.

개들도 방목해서 키우는 제주도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닷 바람을 쐬며 쉴 수 있는 바닷가 쉼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닷 바람을 쐬며 쉴 수 있는 바닷가 쉼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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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이 사나운 개는 묶어 키우고, 순한 개는 이렇게 방목한다니 재미있다.
 성질이 사나운 개는 묶어 키우고, 순한 개는 이렇게 방목한다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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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제주 바닷가는 카페와 크고 작은 펜션, 리조트 등이 무수히 들어섰고, 여전히 우후죽순 공사 중인 데가 많았다. '세계 7대 자연경관'이라는 제주도가 더욱 유명해져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인공적이고도 식상한 하와이풍 리조트 아일랜드로 변하면 어쩌나 심히 걱정도 됐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건 바람을 실컷 쐬며 바람으로 호흡하고 파도 소리를 실컷 들으며 한가로이 앉아 상념에 빠질 수 있는 제주 바닷가가 줄어들고 있어서였다. 그런 와중에 마주친 애월읍의 한담 해안 산책로는 참 소중하게 느껴지는 길이었다. 한라산이 폭발할 때 지상으로 꾸역꾸역 올라온 뒤 바다를 향해 내달리다 식어서 굳어버린 현무암 돌들이 기기묘묘한 모양으로 길 옆에 도열해 있었다. 고양이, 하마, 새 등의 형상을 한 크고 작은 돌덩이들 하나하나가 수석이다.

노란빛의 산괴불주머니 등 숲속에서나 보았던 야생화들을 바닷가에서 마주치는 것도 이채로웠다. 1.2km정도 짧은 거리의 걷기 좋은 바닷가 산책길로 자전거 탄 사람이 휙 지나간다. 중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달리게 해주는 '바퀴 중독'은 이런 걷기 좋은 길에서도 쉽게 뿌리칠 수 없나보다.

아쉬운 마음으로 애월읍 바닷가와 마을 길을 오르락내리락 달리는 데 꼬리가 야무지게 말린 백구 세 마리가 해변이며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 속으로 식겁했지만 겉으론 침착하게 안장에서 내려 개들의 동향을 보며 인도를 슬슬 걸어갔다. 일주버스가 다니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어느 아주머니가 내 모습이 웃겼는지 방목하는 개들이라고 말한다. 

성질이 사나운 개들은 묶어 키우고 순한 개는 방목해서 키운다니 재미있다. 마치 주민들마냥 동네를 여유로이 돌아다니는 녀석들은 정말 외지인 자전거 여행자를 보고도 짖거나 덤비지 않았다.

고마운 제주 바닷가, 금능해변

여러 가지 물빛의 바다와 비양도가 어우러진 멋진 바닷가 협재 해변.
 여러 가지 물빛의 바다와 비양도가 어우러진 멋진 바닷가 협재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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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능 해변 뒤의 해송숲은 포근한 기분이 들어 야영하기 좋았다.
 금능 해변 뒤의 해송숲은 포근한 기분이 들어 야영하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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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간 김에 인터넷 자전거 카페에서 알게 된 친구를 만났다. 그는 운 좋게도 제주도에 일거리가 생겨 몇 년 전부터 제주시 한림읍에 살고 있다. 제주 사람들이 자주 먹는다는 자리돔 젓갈을 반찬으로 내어 주는 동네 백반 집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제주도에 와서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물어 보았다가 들은 대답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제주도에 이주를 해 사니 가장 안 좋은 점은 제주도 여행을 할 때마다 설레던 기분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점이란다. 이제 자기에겐 제주도의 '도'는 섬 '島'자가 아닌 행정구역 이름 '道'자라고. 그래서였을까 집에서 하룻밤 편히 자고 가라는 그의 아내의 호의에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저 친구는 일부러 노숙하러 온거야"라며 시키지도 않은 말을 대신해 주었다.

한림읍에는 이국적인 색채의 에메랄드빛 혹은 코발트빛 바다로 유명한 협재 해변이 있다. 빨리 달릴수록 손해 보는 제주의 아름다운 바닷가 가운데 하나다. 잔잔한 바다 너머 가까이로 제주에서 가장 마지막에 생긴 화산섬 비양도가 떠있어 멋진 풍광을 더해준다. 비양도는 고려목종 때인 1002년 화산폭발로 솟아난 섬이란다.

보는 사람마다 다른 상상을 하게 하는 - 어떤이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형상이라고 - 독특한 생김새의 비양도 또한 제주에서 크고 아름다운 섬으로 손꼽힌다. 비양도와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바다는 두말할 것도 없다. 현무암 바위를 어루만지는 물빛은 검은색에 가까운 짙푸른 색을 띠고 있는 반면 하얀 모래가 깔려있는 해변의 물빛은 아주 선명한 에메랄드빛이다. 눈을 들어 조금만 멀리 내다보면 물색깔은 어느새 눈이 시린 쪽빛으로 변해 있다.

쪽빛을 따라 눈을 더 멀리 내보내면 시선은 다시 비양도라는 섬에 닿는다. 한림항에서 배가 다니는 비양도까지 2.5km 거리라고 하지만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몇 번 팔다리를 휘저으면 닿을 것 같은 충동이 들 정도로 가깝게 느껴진다. 이 해변에 이웃해 이어지는 바닷가가 금능 해변이다. 금능 해수욕장은 재미있게도 해변 쪽보다 바다 쪽이 더 얕은 수심이 있다. 수영을 하려고 바다 쪽으로 걸어갈 때 배꼽까지 찼던 물이 어느 곳에 이르면 무릎 정도밖에 차지 않는다. 해변에서 40-50m 떨어진 수중에 모래언덕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능 해변 뒤 해송숲속에서 고맙게도 야영을 할 수 있다. 화순, 표선, 김녕 해변 등 제주도엔 여름 성수기가 아닌 때에도 야영을 할 수 있는 해변이 여러 개 있다(따로 이용료를 받지 않는다). 한 여름엔 사람들로 가득했을 숲 마당에 딱 두 개의 텐트가 쳐졌다. 외국에서나 봄직한 흰색 캠핑카에 자전거를 싣고 다니는 팔자 좋은 이웃 텐트의 여행자는 차안에 편히 잘 데가 있음에도 굳이 텐트를 치고 야외에서 자는 게 좋단다.

육지에서라면 자정이 넘어도 뒤척이며 겨우 잠을 이루곤 했는데, 잔잔한 파도소리에 섞여 왠지 몽환적으로 들려오는 라디오를 듣다가 초저녁(?)인 10시에 깜박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라고 여행자를 깨운 건 휴대폰 알람이 아닌 꿩들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숲이나 산이 아닌 바닷가에서 꿩이라니, 역시 제주섬다웠다.


태그:#자전거여행, #제주도 캠핑, #제주 돌담, #금능해변, #협재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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