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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권 상실 시대'의 선택

지난 1993년, 공지영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고 외친다. 공지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지 하소연한다. 이 소설은 초판 발간 이후, 현재까지 20여 년간 꾸준히 팔리고 있다.

1995년, 오병철 감독은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 그리고 지금까지 연극으로도 상연되고 있다.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착한 여자'에 대한 환상, '능력 있는 여자' 혹은 똑똑한 여자에 대한 편견, 이율배반적인 가치를 동시에 요구받던 당시 한국 여성의 혼란과 고통을 그렸다. 공지영의 소설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페미니즘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시작된 여성주의 사회운동이다. 초기에는 주로 여성의 투표권, 참정권, 재산권을 주장했다. 페미니즘은 우리나라에 1920년대에 들어와 1970년대 말에는 여성인식이 달라지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중엽 발전했다.

1990년대 페미니즘은 다양한 분파로 갈라지면서 일각에서는 '극단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주장도 나타났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사회·정치·경제적으로 억압받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일부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은 결혼제도와 순결·정조론 등을 비판하면서 결혼의 자유, 연애의 자유, 성적 자유를 외쳤다. 일각에서는 '페미니즘이 점차 여성우월주의를 추구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오랜 기간동안 가부장제에 길들여져있던 남성의 부권은 추락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1996년, 김정현 작가가 쓴 소설 <아버지>는 경제 위기와 부권 상실 그리고 이혼으로 인한 가족해체 등 시대 상황과 맞물리면서 많은 남성들의 공감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상당수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보다는 가정과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부성애'를 읽었다.

같은 해, 이문열 작가는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선택>이라는 소설을 연재했다. 그는 페미니즘의 대두와 부권 상실의 위기를 시대흐름으로 판단한 듯하다. 이 잡지에 실린 그의 말을 잠깐 살펴보자.

"진실로 걱정스러운 일은 요즘 들어 부쩍 높아진 목소리로 너희를 충동하고 유혹하는 수상스러운 외침들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이혼은 '절반의 성공' 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

1997년 3월. 이문열은 소설 <선택>은 단행본으로 출판된다. 많은 여성들은 이문열을 두고 "페미니즘에 무지하면서도 무차별하게 공격의 칼날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악질적이며 오만하다"라고 공격했다.

이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작가 공지영, <황홀한 반란>의 작가 이경자 외에도  진중권, 전여옥 등이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페미니즘 단체들은 이문열을 '여성 권익의 걸림돌'의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세상이 시끄러워진 덕분인지 소설 <선택>은 발간 두 달 만에 13만 부가량 팔리며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주된 독자는 30∼50대 남자였다. 독자들이 1990년대 '아버지는 없고 아빠만 있는 부권 상실 시대'를 산다고 느끼며 이문열의  이야기에 공감을 표한 것으로 보인다.

이문열이 소설 <선택>을 집필한 동기는 여권신장을 저지한다기다는 '우리 삶에 하나의 본보기가 될 만한 여인상을 역사 속에서 발굴하는 데'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문열은 그런 본보기를 찾기 위해 조선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상북도 영양군 정부인 안동 장씨 유물전시관에 있는 장계향의 표준 영정. 표준 영정은 영정 난립 방지를 위해 정부가 지정한 영정이다. 화가가 그린 것이므로 실제 인물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다.
▲ 장계향의 표준 영정 경상북도 영양군 정부인 안동 장씨 유물전시관에 있는 장계향의 표준 영정. 표준 영정은 영정 난립 방지를 위해 정부가 지정한 영정이다. 화가가 그린 것이므로 실제 인물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다.
ⓒ 오익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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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에서 이문열의 선대 할머니 장계향은 현대 여성들의 '성난 외침과 괴로운 부르짖음'을 듣고 영겁의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조선 왕조 선조 연간에 태어나 숙종 연간에 이 세상을 떠난 한 이름 없는 여인의 넋이다. 이 세상에서 나를 특정하는 유일한 기호는 아버지의 핏줄을 드러내는 장(張)이라는 성씨와 훌륭한 아들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부인(貞夫人)이란 봉작(封爵)뿐이다. 그나마 그 둘을 결합해서야 겨우 딸이거나 아내거나 어머니거나 며느리 또는 할머니라는 여인 보편의 이름에서 나를 특정해 낼 수 있다.

나를 수백 년 세월의 어둠과 무위 속에서 불러낸 것은 너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웅녀(熊女)의 슬픈 딸들이었다. 너희 성난 외침과 괴로운 부르짖음이 나를 영겁의 잠에서 깨웠고 삶을 덧없어 하는 한숨과 그 속절 없음에 쏟는 넋두리가 이제는 기억에서 아련해진 내 한 살이(生)를 돌아보게 하였다."(소설 <선택> 중에서)

장씨 부인은 무턱대고 가정을 뛰쳐나오는 것을 여성 해방으로 여기는 일부 그릇된 현대의 여성주의자들에게 조목조목 따지며 일갈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한 살이를 돌아보며 자신의 생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한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아녀자로서 자질을 키운 것은 자신이 선택한 바이며, 지아비를 모심에 있어서도 손님을 대접함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그녀 자신이 한 선택이었다고도 말한다. 정말 장계향의 생은 '선택'이었을까?

장계향의 '페미니즘'

장계향(1598~1680)은 조선 중기를 살다간 여성으로 어릴 적부터 시·서·화에 능했다. 초서를 잘 써 당대의 명필인 청풍자 선생에게 극찬 받기도 했으며, <학발시> <경신음> <소소음> <성인음> 등의 시를 썼고, 포효하는 호랑이를 그린 <맹호도>도 남겼다. 모두 열댓 살 이전의 작품들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동화돼 살아간다. 정부인 장계향의 생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사회주의·기독교주의·포스트모더니즘 등 분파가 수없이 갈라졌다. 이로 인해 지향하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럽다는 평도 있다. 조선중기 유교사회, 남성중심 사회에서는 페미니즘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정부인 안동 장씨 장계향은 조선 중기 사대부집안의 여성으로 당시의 시대적 가치인 유교의 인(仁)을 실천하며 살았다.

나는 장계향이 사람마다 제각기 자기 자리에서 도(道)와 인(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은 페미니스트였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교화하는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도학이니 심학이니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원리로 꿰뚫을 수 있다. 공맹의 가르침이나 성인들의 학문 모두가 이 큰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 쇠여물을 끓이는 것과 제사에 쓸 탕을 끓이는 것은 실제로는 아주 다르지만 끓이는 원리는 한 가지다. 음식에도 똑같은 원리가 있다. 그것은 사람을 복되고 이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인(仁)이고 도(道)이다."

1616년. 장계향은 아버지인 장흥효(張興孝)의 권유로 이시명(1590~1674)과 결혼했다. 혼인할 당시 장계향은 초혼이었고, 이시명은 재혼이었다. 부부는 6남 2녀의 자녀를 뒀지만, 장계향이 양육했던 자녀는 7남 3녀였다. 재령 이씨 이시명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로 생전 관직은 참봉이었다.

그는 서인 정권이 들어선 뒤 여러 번 조정의 천거를 받았지만 고향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에 집중했다. 장계향의 자녀 가운데는 퇴계학통을 계승한 학자 이휘일과, 숙종 때의 남인 이론가의 한사람인 갈암 이현일(李玄逸)이 있다.

1690년, 셋째 아들 이현일이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자 장계향은 법전에 따라 정부인에 추증된다. 아버지 이시명은 가선대부와 자헌대부에 추증됐으며, 1693년 이현일이 이조판서에 오르자 다시 자헌대부로 가증된다. 장계향의 행적과 작품은 <정부인안동장씨실기>에 남겨져 있다.

'유교 사회의 패미니스트' 장계향은 남편인 석계 이시명과 서로 손님처럼, 동지로서 송경하면서 여중군자로 살았다.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열 자녀를 제대로 키워내며, 열 자녀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다. 현대의 어머니들은 자녀의 스펙쌓기를 지원하기 위해 공부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장계향은 평소 자녀들에게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 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면서 가르침의 실천을 강조하기도 했다.

가족사랑의 실천에 그치지 않고 나이든 사람이나 한부모 그리고 부모 잃은 아이처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힘껏 도우며 살았다. 당시 사람들은 장계향을 맹자(孟子)나 정자(程子)의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장계향은 어릴 적 재능을 숨긴 채, 사대부집 가정의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살았다. 유교사회이며,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재능 있던 여성으로서 자아실현에는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장계향은 어떻게 당시 사회의 제약을 극복하고 여성으로서 숨겨진 재능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조선 중기 사대부집 여성에게 음식 만드는 일은 일상이며, 여성 고유의 일이었다. 당시 남성들은 덕성 함양에 치중해 물질적인 생산, 이익을 도모하는 상업, 기술 등을 천시했다. 농업 이외의 상공업이나 과학은 발달할 수 없었다. 음식을 만들어 가족을 먹이는 일, 요리로 손님을 접대하는 일,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일은 조선 중기 여성의 주된 일과였다.

남성중심의 조선중기사회 여성으로서 장계향은 음식 만드는 일을 '자연이 준 생명을 인간의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과학'으로 승화시켰다. '경전이 하늘의 말씀이라면 곡식과 소채와 육고기와 물고기 안에도 생생한 하늘의 말씀이 들어있다'면서 75세부터 <음식디미방>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음식디미방>은 여성이 쓴 것으로도, 한글로 쓰여진 것으로도 '최초'라는 평가를 듣는 서적이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지식재산으로 착한부자 되자
http://cafe.naver.com/cproperty
오익재(ukclab@nate.com)



태그:#장계향, #영양군, #패미니스트, #이문열, #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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