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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갔어야지."

13일 오후 제주도의 한 병원에서 만난 생존자 김동수(49)씨는 한 시간 동안 진행한 인터뷰 내내 여러 차례 이 말을 꺼냈다. 주어는 '해양경찰'이었다.

4월 16일 세월호 사고가 나자마자 3층 우현 갑판으로 나온 그는 4층으로 뛰어 올라가 사람들을 구했다. 그의 동선을 보면 배의 뒤에서 앞으로, 3층에서 4층으로 종횡무진 넘나든 것을 알 수 있다. 일분일초가 긴박했던 터라 주변을 살펴볼 틈이 없었다고 한다. 충격 때문인지 그날의 기억에 드문드문 빈 곳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김씨는 해경의 부실 대응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방은 3층 후미 왼쪽 뒤에서 네 번째에 위치한 8인실(DR-1)이었다. 오전 8시 46분 아내와 통화를 마친 후 숙소에서 동료 화물기사 6명과 함께 있던 김씨는 배가 갑자기 아래쪽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쓰러지는 것을 느꼈다. '아, 이거 끝났구나'란 생각에 서둘러 구명조끼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둘째 딸과 동갑내기인 안산 단원고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세월호를 자주 탄 편이라 배의 구조를 잘 알았고, 어릴 때부터 바다에 적응해 두려움도 없었다. 김씨는 오전 9시 28분쯤 4층으로 이동했다. 배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여서 난간을 잡고 윗쪽으로 뛰어서 넘어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커튼을 묶어서 학생들에게 던져줬는데 자꾸 미끄러졌다. 옆에 있던 수도호스로도 부족했다. 그는 소방호스를 가져와 의자에 묶은 뒤 배 안으로 내려 보냈다.

곧 해경헬기가 도착했다. 구조요원 한 명이 내려왔다. 하지만 해경은 두세 번 정도 학생을 옮긴 뒤 사라졌다. 옆 사람은 "지쳐서 못한다고 그냥 올라갔다"고 말했다. 지쳐서 올라간 구조요원에 대한 증언은 제주도에서 만난 다른 생존자들에게서도 확인된다.

이후 김씨는 배 앞쪽으로 이동했다. 4층 로비와 연결된 출입문에 가보니 안쪽에는 이미 물이 가득했고 자판기에 탁자, 의자가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성인 남성들은 계단 등을 잡고 억지로 올라왔는데, 학생들은 말 그대로 얼어 있었다. 김씨는 "우리가 끌어올려주면 아래에서도 움직여야 하는데, 몸만 맡기니까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10시 31분께 배가 완전히 뒤집힐 때까지 그는 사람들을 구하다 물에 빠졌다. 구명조끼 덕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씨는 한 명이라도 더 구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해경이 대처능력이 잘못 돼도 보통 잘못된 게 아니다"라며 "진짜 구조할 마음이 있다면 (배 안으로) 뛰어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차분하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한 명이라도 진입했다면 구조가 더 수월했을 테고, 사람들에게 나오라는 얘기라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해경은 사람들을 살릴 마음이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김씨가 구조선에 올라탄 뒤 '200~300명이 갇혀 있다'고 전했지만 해경은 "특공대가 출동할 것이니 걱정 말라"고만 했다. 그러나 특공대는 없었다. 너무 화가 난 김씨는 '특공대가 없는 바다'를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10시 49분이었다. 실제로 특공대가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26분 뒤인 11시 15분이었다.

팽목항에서도 그는 "학생 수백 명이 저기 있다, 어떻게 할 거냐"고 외쳤다. 진도 실내체육관에서도 거듭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학생 전원 구조' 얘기까지 들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던 김씨는 마이크 잡고 "거짓말들 하지 말라, (전원 구조라니) 무슨 말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누구보다 힘들게 많은 사람들을 구했지만 그는 자책하고 있었다. 김씨는 사고 당일 오후 7시를 넘겨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통곡하는 학부모들을 보니 살아 돌아온 것조차 죄스러웠다. 그는 "이렇게 빨리 가라앉을 줄 알았으면 나라도 들어가서 빨리 나오라고 할 걸… 지금도 후회된다"고 했다. "죄책감 때문에 내가 기억을 안 하려는 건지 몰라도 중간 중간 기억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태그:#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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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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