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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는 6개월에 한 번씩 작은 세미나를 연다. 여성인권, 이주아동, 장애인권, 빈곤과 복지, 성 소수자 인권 등 각 분야에서 일하는 공감의 변호사와 자원활동가들이 참여하는 세미나다. 지난 4월 18일 열린 윤지영 변호사와 함께하는 노동인권 세미나를 지상 중계한다. 세미나가 열린 날로부터 시일은 다소 지났지만 우리가 토론한 이 내용은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언제나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 기자말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던 2010년, 학교는 봄부터 파업과 시위로 시끄러웠다. 당시 전국의 대학가는 오랜 시간 곪아온 학내 관리·미화노동하청 문제로 인해 들끓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대학이 그러하듯,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관리·미화 노동을 하청업체에 일임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을 유지한 채 주기적으로 담당 업체의 이름만 바뀌고 있었다.

이들 노동자들의 고용 문제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는 용역회사의 천막 습격, 대학의 무관심, 이중 계약과 약속 파기의 씁쓸한 소식을 계속 전해들을 수 있었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던 나의 스무 살, 이것이 내가 '노동문제'와 첫 대면한 순간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근로계약서?

작은 세미나에 참가한 자원활동가들이 무거운 분위기에서 윤지영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 윤지영 변호사와 자원활동가들 작은 세미나에 참가한 자원활동가들이 무거운 분위기에서 윤지영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 공익인권법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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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권법재단 공감 회의실에 모인 자원활동가들과 윤지영 변호사는 한 노동자의 '근로계약서'를 읽어보는 것으로 생각을 시작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등의 근로 경험이 있었지만, 많은 활동가들이 근로계약서라는 문건을 처음 읽어보았다고 했다.

근로계약서 내용의 80여만 원밖에 안 되는 포괄임금(실제 근로시간을 따지지 않고 매월 일정액의 시간 외 근로수당을 지급하거나 기본임금에 수당을 포함해 지급하는 임금 산정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노동관계법령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혹은 '본 사업장 간의 위·수탁 계약이 종료 또는 해지되는 경우 본 계약은 자동으로 해지된다'와 같은 교묘한 조항들이 더 자원활동가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도 윤지영 변호사에 따르면 이와 같은 계약서는 '특별히 나쁜' 계약서가 아니라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계약서라고. 심지어 실제 이 사건의 당사자, 계약서상의 '을'은, 계약된 근무시간보다 매일 2시간씩 일찍 출근해서 일해야 했고, 2011년 여름 침수된 아파트 지하실에서 감전사했다. 관리 회사는 채용 시에 작성한 '불의의 사고를 당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문서를 근거로 무책임을 주장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대학생들에게 노동 문제의 첫인상을 심어준 대학교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들은 이름만 계속 바뀌는 용역회사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고, 이는 퇴직금과 임금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간접고용의 특성상 예상할 수 없는 시점에 갑자기 해고될 수도 있다. 관리나 미화 업무는 중간에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매우 긴데, 이 시간은 업무 시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노조를 만들어 대항하려 했던 홍대 미화노동자들이 집단 해고되어 힘든 싸움을 해야 했던 것처럼, 이들은 노조를 만들어 대항하기도 어렵다. 정말 열악한 환경에 있는 이들이지만, 세미나에서 사례들을 이야기할수록 이들만 최악의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수의 '능력도 없고 운도 없는' 이들이 겪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공감을 가지게 되었다.

배달 청소년들, 가스 검침원도 개인 사업자?

예전에는 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당연히 회사에서 뽑았다. 이제는 인력업체에서 회사 직원을 대신 뽑고, 인력업체에 속한 채로 회사에서 일한다. 간접적으로 고용된 근로자는 명목상의 중간 업체만 바뀌어도 쉽게 해고될 수 있고, 이에 대해 항의할 수 없다.

내 손에 들어오는 임금은 중간 단계를 거치면서 당연히 줄어든다. 노조 가입을 이유로, 혹은 출산이나 육아를 이유로 해고하더라도 단순 '계약 갱신 불가'로 처리할 수 있다. 간접 고용이나 기간제 고용이 아니라면 아예 '개인사업자', 다르게 말해 '프리랜서'가 될지도 모른다.

형식적으로만 개인사업자이고, 실제로는 근로자로 일하는 '특수고용'은 이미 보편적인 행태이다. 이미 배달, 용역 등에서 특수고용은 보편적인 모습이 되었고 이 영역은 더 확대되는 추세이다.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안 되는 분야, 이를테면 가스 검침원들도 개인사업자에 속한다는 판결도 있었다.

이들은 회사에서 관리 감독을 받고, 사실상 근로자와 같은 환경에서 근무하더라도 법적으로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최저임금제 등 근로자로서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제 간접고용이나 특수고용은 능력 없는, 운 없는 소수에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모두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의 모습이다.

작은 규모로 모여서 하는 세미나인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흐르기 쉽지만, 이번 세미나는 시종일관 무거웠다. 돈을 받지 못한 '개인사업자'인 배달 청소년들, 불공정한 계약과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이들을 대변했던 공감의 변론들은 많은 경우 법정에서 이기지 못했다. 심지어 몇 년에 걸친 싸움 끝에 이기더라도, 기업의 불법 행위는 과태료의 사유가 될 뿐 더 이상의 강제를 받지 않았다.

독일의 한 신학자는 유명한 시 <아무도 남지 않았다>에서 말했다. 나치가 공산당을, 유대인을, 노조원을, 가톨릭교도를 죽일 때 자신은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침묵했다고. 그리고 나치가 자신에게 찾아왔을 때 나서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더라고. 이미 노동문제는 우리 주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당신이 관리직이어서, 공무원이어서, 학생이어서, 이 문제를 무시한다면, 이것이 당신의 방문을 두드릴 때는 이미 늦었음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시장에서 매매되는 물건과 다르다는 점을 모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블로그 http://withgonggam.tistory.com/1397 에서 관련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공감의 19기 자원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한재의 글입니다.



태그:#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노동자, #노동, #특수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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