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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을 이은 후진타오는 말 그대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42년 안후이성 지시(積溪)에서 태어난 그는 문혁이 발생하기 전 칭화대에서 수리공정을 전공한 수재였다. 대학졸업한 해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1968년부터 깐수성에 있는 류지아샤(劉家峽)댐에서 일했는데, 이때 이곳에서 건설 부분의 책임자로 일했던 쑹핑(宋平 1917~)의 눈에 들었다. 쑹핑은 후진타오를 덩샤오핑에게 추천하는 한편 스스로도 깐수성 당서기를 거쳐, 1989년부터는 중앙조직부 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후 공청단 중앙서기처의 서기(1982~1985)를 거치면서 청년조직의 지도자를 지냈고, 1985년에는 43세의 나이에 구이저우성 당서기에 올라 일찌감치 밝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이후 시장자치구 당서기를 거친 후 1992년에는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했으며, 다음해에는 중앙당학교 교장을 맡았다. 1999년 부주석을 거쳐 2003년에는 국가 주석이자 중앙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그리고 그에게 맡겨진 10년의 시간을 채우고 2013년 3월에 긴 정치 여정을 끝냈다.

주룽지, 후진타오는 물론이고 시진핑을 배출한 칭화대는 테크노그라트가 각광받는 시절에 가장 높은 주가를 달렸다
▲ 테크노그라트 시절에 각광받은 칭화대의 옛 정문 주룽지, 후진타오는 물론이고 시진핑을 배출한 칭화대는 테크노그라트가 각광받는 시절에 가장 높은 주가를 달렸다
ⓒ 칭화대학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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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앞서 말하는 것 같은 이야기 안에 스토리가 별로 없다. 2003년 자리를 받았지만 상무위원회를 장악한 장쩌민 계열의 위세를 꺽을 수 없었다.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들이 장악할 수 있는 권력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앞선 지도자들의 자식이나 식솔들은 국영기업체를 비롯한 알자배기를 얻었지만 후진타오나 주변 사람들이 큰 이권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잘 못듣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당대 중국 정치의 당파라고 할 수 있는 칭화파(청화대학 출신의 엘리트 그룹)와 공청단(공청단 출신의 엘리트그룹)을 대표한 맹주였지만 태자당(공산당 간부의 자제그룹)이나 상하이파(상하이에서 간부를 지낸 지도자그룹)에 속하지 못한 후진타오의 정치 여정은 그렇게 꾸며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림자 지도자의 한계에 대한 염증과 더불어 자신의 뒤를 잇는 시진핑은 그런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바라는 이유에서도 국가 주석과 동시에 군사위 주석까지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후진타오의 존재감 덜한 10년이 지나고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한 인물은 시진핑이다.시진핑 역시 후진타오처럼 전형적인 지도자 코스를 밟고 왔다. 1975년 칭화대학을 졸업한 후 국무원 반공청과 중앙군사위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일찌감치 지도자 그룹을 접했다. 이후에는 우리나라 부군수에 해당하는 직위로 일했고, 1999년에는 푸젠성 성장까지 올랐고, 2002년에는 저지앙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저지앙 당서기에 오른 그는 천량위가 배임사건으로 빠진 상하이에 들어가 짧은 시간 동안 서기를 하다가 다음에는 상무위원으로 선발됐고, 중앙당학교 교장을 맡았다. 2008년에는 차기가 예정된 부주석으로 선발됐고, 2013년 국가주석이자 총서기를 물론이고 군앙군사위 주석까지 받으면서 명백한 중국의 지도자가 됐다.

정치적 성장 과정은 후진타오와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후진타오와 그를 동급으로 보는 것은 큰 오류다. 우선 시진핑은 중국 당대 파벌들을 모두 관통한다. 아버지가 혁명원로이자 우리로 보면 국회부회장에 해당하는 전인대 부위원장과 중앙서기처 서기를 지냈다. 명백한 태자당의 일원이었다. 거기에 오랜시간 저지앙의 맹주로 있다가 상하이 당서기까지 지낸 것은 상하이방의 비호를 받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진핑의 힘을 더 실어주는 것은 당대 정치의 거목인 장쩌민 역시 이미 연로한 상황이고, 그를 둘러싼 세력 역시 자연스럽게 차기 지도자를 바란다는 점도 그를 유리하게 한다. 시진핑의 부인인 펑리위안은 군대에 적을 둔 연예인으로 군대에 막강한 막후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도 군부 역시 시진핑에게 힘을 실어준다.

흙을 파고 안에 만든 동굴식 가옥은 장점도 있지만 벌레의 습격 등을 피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사진은 그래도 고급이라 할 수 있는 옌안 마오쩌둥 거주 야오동
▲ 시진핑이 생활하던 샨베이에 보편적인 야오동 흙을 파고 안에 만든 동굴식 가옥은 장점도 있지만 벌레의 습격 등을 피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사진은 그래도 고급이라 할 수 있는 옌안 마오쩌둥 거주 야오동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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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또 다른 강점은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다. 시진핑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시절부터 문혁이 본격화됐다. 시진핑은 아버지의 고향인 샨시성의 농촌으로 갔다. 지금처럼 덩치크고 귀공자로 살았던 그에게 노동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벌레들은 극악한 환경이었다. 결국 3달만에 몰래 베이징행 열차를 타고,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 그 환경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스를 이용한 설비를 만드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현지들의 칭찬을 받을 만큼 성숙해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아버지의 정치적 역경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에 가입해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고, 칭화대학에도 입학하는 유리한 조건을 얻게 된다.

이런 스토리는 입지전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에게 시진핑의 힘을 실어주는 요소다. 하지만 시진핑의 시대가 녹녹한 것은 아니다.

우선 앞서 말한 것처럼 시진핑은 당대 권력과 모든 선이 닿아있는데, 그 선을 끊지 않으면 그의 정치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공산화 이후 중국의 부나 권력은 대부분 중국 공산당의 자제들이 갖고 있다. 중국이 급속히 성장하고 발전할 때는 새로운 부가 창출되어 나누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가용 자산이 줄어들고, 성장률도 낮아지는 상황이어서 많이 가진 자들의 것을 나누워야 하는 상황은 이미 시작됐다.

시진핑 정부는 자신에게 힘을 보탰던 이들까지 개혁에 동참시켜야 하는데, 나눔의 문화가 익숙치 않은 중국에서 이런 개혁이 가능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또 제도적으로도 독생자녀제도의 수정, 후코우 제도의 개혁, 토지 국유제의 변경 등 메가톤 개혁 요소들이 쌓여있다. 

국제문제도 녹녹치 않다. 시진핑의 등장 시기는 동아시아의 강국인 한국이나 일본 역시 2세 정치인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난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 관계는 나쁘지 않고,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외면과 지나친 미일 동맹의 강화 등이 가장 큰 이유다.

중국 근대에 가장 큰 사건중에 하나인 한국전쟁 개입을 중국은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다)라고 부른다. 단둥에 있는 항미원조기념관
▲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중국 근대에 가장 큰 사건중에 하나인 한국전쟁 개입을 중국은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다)라고 부른다. 단둥에 있는 항미원조기념관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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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지금까지 한국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근원적인 사고에서 친한국적인 것은 아니다. 시진핑은 부친 시중쉰의 경험으로 인해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한국에 대해 강한 인상을 갖고 있는데, 이게 한국에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다. 시진핑은 2010년 10월 25일 있었던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60주년 기념식에서 "위대한 항미원조(抗美援朝 한국전쟁의 중국 표현)는 침략에 대항한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발언해 그의 역사관을 확인시켜줬다. 또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이 많아서 공생이 가능했던 지난 시대의 경제교류와 달리 앞으로의 경제교류는 비슷해지는 인건비 등으로 인해 본격적인 경쟁관계에 접어든다. 중국으로서는 대체할 수 있는 나라가 많기 때문에 언제나 한국에 '노'를 외칠 수 있지만 경제의 절반 가까이를 중화권에 의지한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위기가 국운을 좌우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화하는 일본은 미국과 더욱 공고히 하면서 중국을 압박하는 추세다. 경제에서 지나치게 중국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으로서는 정말 샌드위치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역시 이런 역학 관계를 알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복기하면 이런 상황은 100여전 전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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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후진타오,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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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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