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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세스럽지만 내놓고 자랑 하나 해야겠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발견한 나만의 강점이다. 다름 아닌 '씻지 않고 지내기'이다.

북미대륙에는 우리와 같은 대중목욕탕이 거의 없다. 스파(spa)라는 게 있긴 하지만, 휴식이 강조되는 곳이다. 속된 말로 때 벗기러 가는 곳이 아니다.

 장기 여행을 떠났을 때 초기 모습(왼쪽). 부랑자와 행색이 그리 다를 것도 없다. 머리 감기가 싫어 난생 처음으로 퍼머를 했다. 알래스카에서 차에 태워 준 진짜 부랑자. 몸에서 냄새가 좀 났지만, 그나 나나 비슷한 신세였던 데다 얼굴이 선량해 보여, 강도질을 할 것 같지는 않아 태워줬다.
▲ 부랑자 장기 여행을 떠났을 때 초기 모습(왼쪽). 부랑자와 행색이 그리 다를 것도 없다. 머리 감기가 싫어 난생 처음으로 퍼머를 했다. 알래스카에서 차에 태워 준 진짜 부랑자. 몸에서 냄새가 좀 났지만, 그나 나나 비슷한 신세였던 데다 얼굴이 선량해 보여, 강도질을 할 것 같지는 않아 태워줬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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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미운 오리가 백조가 되는 예가 적지 않다. 천성이 씻는 걸 싫어해서, 식구들로부터 구박을 보통 받는 게 아니다. 어릴 때는 어머니로부터, 지금은 아이 엄마한테 지청구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헌데 씻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자질'이 장기간의 부랑자 여행에 말 그대로 최강의 효과를 발휘했다. 공중목욕탕도 대중 샤워 시설도 드문 북미대륙에서 매일매일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을 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는 얘기다.

때 미는 분, 날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조폭으로 알다

서울에서 직장 다닐 때 일이다. 1990년대 중반, 아마 추석 직전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부터 증손자까지 4대가 한집에 살았었다. 추석을 앞두고, 식구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제발, 목욕 좀 하라"는 것이었다.

할머니, 어머니, 아이 엄마, 이렇게 여자 셋이 공동으로 압박 작전을 펴는데 견딜 수 없었다. 한 손에 돈까지 넉넉히 쥐여주며, 때 미는 분한테 부탁해서 말 그대로 묵은 때를 벗겨 내라는 거였다.

목욕탕에 도착해서, 나보다 예닐곱 살쯤 더 돼 보이는 때 미는 분에게 부탁하고 간이 침상 같은 곳에 올라 누웠다. 헌데 때 미는 분이 팔뚝을 쓰윽 한 차례 밀더니,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거였다.

"형님, 나오신 지 얼마 안 되셨군요."

1초나 됐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아주 복잡해졌다. 자신보다 어린, 게다가 초면인 나에게 존댓말을 쓰고, 90도 인사라니.

"으응~, 그래." 

잽싸게 나는 판단을 내리고 반말로 응대했다. 지방이 별로 없는 몸, 게다가 여기저기 난 제법 커다란 흉터들, 거기에 속칭 '깍두기' 머리, 과히 부드럽지 않은 인상 등등…. 

때 미는 분은 나를 감방에서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조폭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1년에 한 번 목욕탕에 갈까 말까 할 정도였으니, 때는 또 얼마나 나왔을까. 내 스스로도 그날 목욕을 마치고 나니,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평소 몸에서 만들어지는 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죽은 피부세포와 땀 등은 옷에 묻어 절반은 씻겨 나간다는 게 내 지론이다. 옷을 좀 입으면 옷에서 냄새가 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옷 세탁을 자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유랑 여행자 입장에서 제대로 빨래를 하려면?

 북미대륙의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는 먼지가 너무 많아, 안대를 마스크로 대신해 썼다(왼쪽). 10개월 넘게 거의 일상적으로 신고 다닌 샌들(가운데). 신발이 나를 보고 "발 좀 씻고 다니라"고 했을 것 같다. 케밥 종류의 단순한 식사. 심플하게 사는 게 심신의 에너지를 아끼는 지름길이다.
▲ 단순하게 살기 북미대륙의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는 먼지가 너무 많아, 안대를 마스크로 대신해 썼다(왼쪽). 10개월 넘게 거의 일상적으로 신고 다닌 샌들(가운데). 신발이 나를 보고 "발 좀 씻고 다니라"고 했을 것 같다. 케밥 종류의 단순한 식사. 심플하게 사는 게 심신의 에너지를 아끼는 지름길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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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캐나다는 아마 전 세계에서 대중 세탁소가 가장 잘 발달한 나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1000명도 안 사는 조그만 농촌 마을에 가도 동전을 넣고 돌리는 세탁기를 틀림없이 발견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세탁에 쿼터 동전 4~6개, 건조에 또 4~6개쯤 넣으면 빨래에서 건조까지 끝이다. 대략 우리 돈으로 3000원 안팎 드는 셈이다.

유랑 여행자 입장에서 제대로 빨래를 하려면, 일주일에 두어 번은 해줘야 한다. 그럼 세탁비만도 매주 5달러가량 깨진다. 게다가 빨래부터 건조까지 2시간은 세탁소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므로 그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랑 여행 중에 빨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해 입었다. 군대 있을 때도 이른바 전투복을 한 번도 안 빨고 반납할 만큼 '빨래 안 하고 버티기'에도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다. 군대에서 전투복은 1년에 한 벌씩을 지급됐는데, 새것이 나오면 우선 3개월을 입고 나서 기존의 전투복과 '때'를 비교해 봤다. 이런 식으로 3개월마다 전투복 상태를 점검하고 그중 나은 걸 선택해 입었다. 

빨래를 하지 않고 6개월을 넘기면 군대 용어로 '각'이 얼마나 잘 잡히는지 모른다. 반은 기름에 절어 있는 상태가 돼서 그런 것이다. 북미대륙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팬티도, 세탁한 걸 입고, 일주일쯤 지나면 일단 한 번은 뒤집어 입는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이 또 지나면 그다음에 안팎을 비교해서 조금 깨끗한 쪽을 안으로 해서 한 번 더 입는 식이다.

"엇, 김창엽씨 옷을 뒤집어 입었어. 호호호."

얼마 전에 테니스장에서 만난 동네 아줌마가, 평소 나의 산만함을 빗대 옷조차도 제대로 못 입는다고 놀렸다. "어어~, 그런가요"하고 짐짓 놀라는 척했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옷을 뒤집어 입고 있다.

북미대륙 10개월 떠돌면서 가진 행복감, 단순함에서 비롯

  북미대륙 여행 중 먼지가 올라 앉은 차(위). 여행 때가 아니어도, 예를 들면 서울에서 10년 넘게 차를 몰고 다녔지만, 스스로 세차장을 찾은 기억은 거의 없다. 북미대륙을 누비는 트럭에 앞 범퍼에 붙어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알래스카, 유콘 등 캐나다와 미국 3개 주 번호판(아래 왼쪽). 이 트럭 운전자는 매번 당국에 뭔가를 신고하는 게 성가셔서, 아예 3개 주 번호판을 신청했을 수도 있다. 성가신 것은 질색인데, 빨래나 세수도 그런 것이다. 세수, 세탁, 세차에서 벗어나 보시라. 해방감은 의외로 크다.
▲ 세차와 행복 북미대륙 여행 중 먼지가 올라 앉은 차(위). 여행 때가 아니어도, 예를 들면 서울에서 10년 넘게 차를 몰고 다녔지만, 스스로 세차장을 찾은 기억은 거의 없다. 북미대륙을 누비는 트럭에 앞 범퍼에 붙어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알래스카, 유콘 등 캐나다와 미국 3개 주 번호판(아래 왼쪽). 이 트럭 운전자는 매번 당국에 뭔가를 신고하는 게 성가셔서, 아예 3개 주 번호판을 신청했을 수도 있다. 성가신 것은 질색인데, 빨래나 세수도 그런 것이다. 세수, 세탁, 세차에서 벗어나 보시라. 해방감은 의외로 크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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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자 행색을 하고 다녀도, 북미대륙 여행 기간 흥미로운 점은 사람만 잘 따르더라는 것이다. 최소한 동성애자들의 '대시'를 서너 번은 받은 게 한 증거이다.

한번은 밤중에 뉴햄프셔와 매사추세츠 주 경계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밤을 나는데, 빨간색 스포츠카를 탄 남자가 졸졸 따라다녀 공포감이 들 정도였다. 고속도로 순찰대가 때맞춰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척 힘든 밤이 됐으리라. 또 노스캐롤라이나 도서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는 등 동성애자들의 추파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잘 씻지 않고, 옷을 자주 갈아입지 않을 때 나는 냄새가 향기로울 리는 없다. 하지만 잘 씻은 상당수 서양사람들 몸에서 나는 이른바 '인내'로 코가 불편한 적도 있었다. 반대로 서양사람들은 동양사람들의 몸냄새에서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평소 내게 가장 괴로운 냄새는 진한 화장품 향이다.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누군가로부터 진한 인공 향이 뿜어져 나오면 나는 숨쉬기를 멈춘다. 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중간에 내리고 만다. 전혀 귀띔도 하지 않았는데, 아들 녀석 또한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같은 행동을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북미대륙을 10개월 가까이 떠돌았던 시간 가질 수 있었던 행복감 중 얼마간은 필경 단순함에서 비롯됐다. 잘 안 씻고, 옷을 자주 갈아입지 않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씻지 않고, 옷도 자주 갈아입지 않고, 나아가 화장도 하지 않고 한동안 지내보시라. 색다른 해방감과 심리 상태를 체험할 수 있으리.

덧붙이는 글 | 세종시 닷넷(sejongsee.net)에도 실립니다. 세종시 닷넷은 세종시의 비영리 커뮤니티 포털입니다.



태그:#때, #단순, #목욕, #세탁, #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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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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