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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3년 당시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의문사 규명을 위한 조사관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지난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실족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진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우여곡절 끝에 중앙정보부 요원을 찾아내 진술을 받아냈고, 이름 모를 군인들의 흔적을 찾아 증언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진실의 조각을 통해 장준하 선생의 사인을 밝히려 했다. 그 결과 나는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사했다는 그동안의 정부 발표는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특히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 김용환씨의 주장은 사실로 볼 수 없다는 여러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안타깝게도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 규명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중 첫 번째 어려움은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령부에 존안된 문서에 접근할 수 없는 한계 때문이었다. 박정희 독재정권 내내 철저히 감시당했던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에 대한 사찰 기록은, 뒤집어 보면 사건이 발생한 1975년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문서였던 것이다.

 

'첫 번째 한계',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그 문서

 

하지만 나는 그 진실이 보관된 장소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자료를 보내달라"라는 요청만 국가정보원에 할 수 있을 뿐 우리가 그 문서고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문서가 국가정보원 문서고에 정말 없어서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있는데도 없다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의 권한이 너무 미약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은 우리에게 모든 자료를 전부 다 제공했다고 반박했다. 천만의 주장이다.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 있었다. 이는 우리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다. 사건이 발생한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던 요원들 역시 "내가 봐도 참 이상한 일"이라고 인정한 사실이다. 바로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직후인 1975년 8월 17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서울 상봉동 집으로 시신이 운구되기 전까지 소요된 약 9시간 동안의 문서가 없다는 점이었다.

 

밤 9시경 최초 보고 후 그 뒤에 계속된 추가 보고가 없다는 것은 매우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사이 시간에는 매우 중요한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자정 시간이 다 되어 사건 현장에 찾아온 의정부 지청 검사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고 함께 대동한 검안 의사의 소견도, 그리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목격자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다. 이러한 추가보고문이 없다는 것에 대해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도 참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제공되지 않은 이 문서에서 나는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이 숨겨져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기무사령부였다. 국가정보원과 달리 기무사령부는 단 한 장의 문서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장준하 선생에 대한 그 어떤 기록도 보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나는 그들의 주장을 전혀 믿지 않는다. 적어도 한 장의 문서는 있어야 했다. 사고 당일 인근 부대 보안부대장 한아무개가 텔레타이프를 통해 작성한 16절지 반장 분량의 보고문이다.

 

그는 사고 당일 장준하의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를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달랐다. 입으로는 부인하고 있었으나 조사관인 내가 볼 때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확신을 했고 결국 그가 그날 밤 사고 현장을 방문했음을 제3자의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소환한 그에게 그 증거를 제시하자 마침내 그가 사건이 있던 날 현장에 갔음을 인정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16절지 분량의 보고문을 작성하여 당시 진종채 보안사령관에게 직보했다"고 진술했다.

 

그렇다. 바로 그 문서였다. 최소한 그 한 장의 문서는 반드시 있어야 했다. 보안사령관에게 직보한 문서는 사라질 수 없다. 없앴다면 누구의 지시로 언제 폐기했는지 기록이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무사령부는 이에 대한 답변도 없이 단 한 장의 문서도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것이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던 첫 번째 한계였다.

 

밝혀진 '두 번째 한계'... 이제 진실 밝혀야

 


또 다른 한계는 장준하 선생의 '유골 감정 실패'였다. 정보기관의 문서 확보에 실패한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이는 어느 법의학자였다. 그는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을 밝히기 위해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감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이 실선처럼 금이 가 있다면 이는 실족에 의한 사인으로, 그것이 아니라 유족의 주장처럼 두개골에 구멍이 뻥 뚫려 있다면 그 사인을 충분히 타살로 의심할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유골 감정을 제안했다.

 

나는 즉각 이 제안을 의문사 위원회에 보고했다. 그리고 유족을 만나 이러한 제안을 설명한 후 분묘 개장에 대한 동의를 확인했다. 하지만 분묘 개장까지 하여 장 선생님에 대한 유골 감정을 해야 하는지 유족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또한 그렇게 해서 유골 감정을 할 경우 과연 공정성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지 논란이 이어졌다.

 

결국 그렇게 고민하고 논의만 하던 중 의문사위의 조사 기한이 종료되고 말았다. 나는 당시의 아쉬움을 잊을 수 없었다. 국가정보기관이 틀어쥔 채 내주지 않는 문서를 확보하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었으나 우리가 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유골 감정도 조사기한 내 해보지 못했다. 그런 채로 '진실의 문'을 닫아야 했던 아쉬움이 너무도 컸다.

 


그런데 그토록 확인하고 싶었던 두 번째 한계가 생각지도 못한 우연을 계기로 풀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2011년 8월, 경기 파주 지역의 폭우 때문이었다. 폭우로 인해 장준하 선생님이 모셔진 묘의 뒤편 석축이 무너진 것이다. 이장을 위해 개묘된 장준하 선생님의 묘에서 실로 충격적인 진실이 공개되었다.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에 직경 6cm의 둥그런 상흔이 있던 것이다. 우리가 의심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이후 장준하 기념사업회 등 제 단체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사인 의혹을 밝히기 위해 '장준하 선생 암살 의혹 규명 국민대책위원회'(약칭 국민대책위)가 구성되었다. 이어 국내 저명한 법의학 전문가인 이정빈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가 모처에서 장준하 선생님에 대한 유골 감정을 실시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2013년 3월 26일 발표됐다.

 

장준하 선생 사인은 '외부 가격에 의한 사망'

 


2013년 3월 26일 오전 10시, 나는 그때 그곳에 있었다. 서울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그토록 알고 싶었던 38년 만의 진실을 기다리며 나는 피가 마르는 긴장 속에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밝혀진 결론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장준하 선생은 실족 추락에 의한 사망이 아닌 '외부 가격에 의한 사망'. 이것이 법의학 감정 결론이었다.

 

그랬다. 진실은 상식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상식적 진실을 찾기 위해 너무도 많은 시간을 거쳐야 했던 것이다. 나는 허탈한 심정이 들었다. 애초 우리가 의심했던 것처럼 14.7미터 높이의 암벽에서 추락했다는 장준하 선생에게서 외상 손상이 없다는 점, 그리고 갈비뼈와 턱뼈 등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부러지는 부위에서도 일체의 골절상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들어 장준하 선생은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민간 측에서 의뢰한 이 놀라운 법의학 감정 결과에 대해 국가가 본격적으로 나서서 그 의문을 해소하고 결론을 지을 것이라 여겼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새로운 타살 의혹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런 행보에 대해 적지 않은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아버지 시대에 벌어진 정치적 암살 의혹 사건에 대해 그 딸이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어찌 재조사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기 아버지와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장준하 선생의 유족은 그냥 참고 살라는 것인가. 이것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란 말인가.

 

어느덧 그 일이 있고 난 후 1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1년간 장준하 선생의 사인 규명은 단 한발자국도 진전되지 못했다. 이는 결코 그냥 물러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요구한다. 박근혜 대통령 개인이 효녀인 것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기쁜 일이겠으나 올바른 일이 아니다. 지금 바로 이 문제를 풀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아버지가 탄압한 장준하, 이젠 그 유족을 억울하게 해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남편을 잃고 남은 다섯 남매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역경을 헤쳐온 아내가 있었다.

 

바로 지난 2007년,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시대의 잘못을 딸의 입장에서 사과하겠다며 찾아갔던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 여사다. 그런데 유신 독재에 맞선다는 이유로 독재자 아버지가 장준하 선생을 탄압하더니 이젠 그 딸이 대통령이 되어 그 유족의 당연한 권리인 사망 원인 규명을 가로막는 것은 너무도 야만적인 처사이다.

 

이제 그만 진실을 밝혀야 한다. 지금도 늦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장준하 선생이 정말 민간측 법의학자가 조사한 결론과 같이 외부 가격에 의해 사망한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누가 왜 무슨 경위로 사망케 했으며 그 진실을 숨긴 세력은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김희숙 여사에서 용서를 청한다며 찾아갔을 때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보라. 그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김희숙 여사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장준하 선생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후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진심으로 위로 드린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정치적 쇼' 운운하며 논란이 일자 당시 이혜훈 선대위 대변인은 반박하면서 "박근혜 후보는 진정성 없이 제스처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며 "기다리고 지켜봐 주시면 진실로 묵묵히 노력하겠다"고 공식 답변한 바 있다.

 

정말 그것이 진심이었다면 그 화답은 지금이어야 한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은 진심을 보여야 한다. 2014년 3월 26일, 다시 세월이 흐르고 있다.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후 39년째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난다 하더라도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 진실이 밝혀지는 그날까지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태그:#장준하, #의문사 진상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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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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