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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백수> 책표지.
 <어느 날, 백수>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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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아내는 하루 두 끼 식사를 매번 정성을 다해서 차려줍니다. 반찬이야 많을 때도 있고, 조촐할 때도 있지만 정성은 매 한가지랍니다. 오늘 저녁은 1식 3찬인데요, 가짓수는 적지만 황제의 밥상이 부럽잖습니다. 따지자면 채 한 줌도 안되는 양의 쌀을 씻어서 아내는 제 저녁밥을 짓습니다.

… 오늘은 아내가 두 가지 특별반찬을 준비했군요. 열무와 얼가리에 고춧가루를 버무려 만든 김치는 점심 밥상에서 본 것이지만, 홍합미역국과 열무시래기찜은 저녁에 처음 나온 것입니다.

같은 메뉴라도 집집마다 주부의 조리법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저는 제 아내가 만든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습니다.

평소 저는 반찬을 너무 많이 내오지 말라고 얘기하는 편입니다. 식탁 차리기도 번거로울 뿐더러 괜히 찔끔찔끔 수저만 대면 상하기만 하거든요. 차리는 사람의 정성이 가득한 식탁 그리고 그걸 기쁘고 맛있게 먹으면 비록 1식 3찬이라고 해도 그 식탁은 '행복한 식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 제 저녁식사, 훌륭하지 않나요? (…)"

'두식이'임에도 부인에게 대우받는 이유 있었네

아주 오래 전, 그가 백수 3년 차를 구가하고 있을 때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평소 반찬을 너무 내오지 말라고 얘기하는 편"이라니! 나는 이 글을 발견한 즉시 내 마눌님도 읽게 했다. 나는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그와 백수 동기인데, 그 당시 집에서 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만이 슬슬 커지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마눌님의 뒷목이 점점 붉어지는 걸 발견하곤 얼른 자리를 피했다.

나는 그날 아주 큰 실수를 한 거였다. 그 이유를 그가 최근 내게 보내 준 자신의 저서 <어느날, 백수(白手)> 제3장 '가족이야기'(37쪽~43쪽)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44~47쪽에 '배우자와 잘 지내기'라는 팁도 실어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부부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 노력이 필요하다.… 행복한 부부의 가장 큰 덕목은 역시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시시콜콜한 것을 가지고도 알콩달콩 얘깃거리를 만들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충고하고 있다. 명백한 '두식이'임에도 불구, 부인에게 대접받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 나는 아파트 현관문 밖에까지 나가 덜덜 떨며 담배를 피우는 수모를 견디다 못해 결국 금연하고 말았다. 헌데 그의 부인은 베란다 창가에 커피잔을 놓을 수도 있고 재떨이도 놓을 수 있는 작은 탁자 하나를 갖다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며칠 후 그는 "남편들이여! 아내를 더 자주 업어줍시다"라는 제목의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떡하니 올려 놓았다. 보통수가 아니다.

이 현명한 '달인 백수'는 나의 오랜 지기 정운현이다. 그와는 같은 날 백수 동기가 되면서 더 가까워졌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백수'를 정의하길 '하는 일이 없어 손이 깨끗한 사람' 또는 '할 일이 없어 손이 한가한 사람'이라 했는데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그의 정의에 따른다면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손바닥에 가시가 돋는 파워 블로거이며,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는 강연가이고, 깊이있는 친일문제 연구자이자 10여 권이 넘는 저서를 낸 그가 백수일 리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백수'의 정의는 아주 간단하다. '출근할 곳이 없는 봉급생활자'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 둔 이들이 매일 산에 올라가고, 기원에 가고, 친구 사무실에 가서 고스톱도 치고, 어떤 사람은 옛 직장에 출몰하여 현역 후배들을 괴롭히기도 하는 것이다. 나름 출근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출근할 곳 없는 봉급생활자'가 다 백수는 아니다. "출근하고 싶은데도… "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하는데 이들이 출근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첫째 출근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쪽 팔려 한다, 둘째 아직은 일정 정도의 수입이 필요하다에서 둘 중의 하나는 필수, 혹은 둘 다인 경우도 있다.

힘 내자! 만방의 백수들이여!

저자 정운현씨가 책이 나오자마자 내게 멋진 사인을 한 책을 보내 왔다.
▲ 언론계 선배, 혹은 백수 동기에게 보내는 책 저자 정운현씨가 책이 나오자마자 내게 멋진 사인을 한 책을 보내 왔다.
ⓒ 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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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의 <어느날, 백수>는 우리 백수들에게 "싸워서 이겨라"라는 서양적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성찰하라", "견디고 이겨내라"는 동양적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더 나아가 "지금 그대로를 즐겨 보라"는 메시지까지 읽어 낼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겠다. 이것은 특히 첫 번째 경우, 즉 출근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쪽 팔려 하는 백수들에게 해당된다.

이제 어쩔 수 없는 나이 때문에 '백수'에서 '은퇴'로 신분 전환 중인 내 경우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정작 정운현은 아직은 일정 정도의 수입이 절실한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백수를 자처하는 두 번째 케이스인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서 내가 받은 만큼 나도 그에게 공자 말씀 한 마디를 덕담으로 전해 주고 싶다.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부유하고 귀하게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니라)

여기서 '방(邦)'을 '나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무자비한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로 읽을 수도 있겠다. 힘 내자! 만방의 백수들이여!

덧붙이는 글 | 어느 날, 백수 - 나에게 불쑥 찾아온 중년의 실직, 망가지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18가지 방법 /정운현 (지은이) / 비아북 / 2014년 3월



어느 날, 백수 - 나에게 불쑥 찾아온 중년의 실직, 망가지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18가지 방법

정운현 지음, 비아북(2014)


태그:#정운현,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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