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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자의 유죄를 입증하는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어쩔 수 없이 2차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피해를 최소화 하려는 노력들이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데요. 이에 <오마이뉴스>는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성폭력피해자 재판동행기를 싣습니다. 막무가내로 달려가는 언니들의 든든한 '빽' 없이도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당당할 수 있는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랍니다. [편집자말]
피해자의 권리보호가 이루어진다면 피해자에게 증언은 피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권리보호가 이루어진다면 피해자에게 증언은 피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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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의 치유와 회복은 성폭력에 대한 가족 및 주변 사람들의 반응, 상담자 및 수사∙재판 관계자(경찰, 검사, 판사)의 태도 및 접근방법,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특히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성폭력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이나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는 피해자의 회복과 직결되는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상담을 통해 만나는 피해자들 중에는 법적 과정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거나 심지어 고소를 취하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법정 증언을 요청받은 피해자들은 법원이라는 낯선 공간, 심지어 가해자까지 있는 불편한 공간에서 사건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증언을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불안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수사·재판 관계자들의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나 편견을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일은 흔하다. '왜 가해자와 만났는지', '늦은 시간에 왜 가해자와 함께 있었는지' 등의 질문을 사건의 쟁점을 파악하기 위함이 아닌,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해자는 증언 과정에서 이러한 질문을 또 받게 될까봐 법정에서의 증언을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 한다.

성폭력 피해자의 용기 있는 발걸음, 언니들이 동행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현장에서 피해자를 직접 만나고 지원하는 성폭력상담소, 여성단체들은 피해자의 권리인 증언이 수사·재판 과정에서 권리로서 보장될 수 있도록 제도적 변화를 요구해왔다.

이러한 노력으로 실제 최근 몇 년간 법률개정을 거치면서 수사재판과정에서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많은 제도들이 생겨나는 등 긍정적 변화가 있었다. 수사재판이라는 제도적 절차 속에서 피해자의 권리보호가 이루어진다면 피해자에게 증언은 피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행'의 다른 말은 '피해자를 지지하고 조력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상담소 활동가 1명이 아니라 10명의 지지자들이 함께 지원단을 구성하면 어떨까 하는 구상에서 '막무가내로 달려가는 성폭력피해자 재판동행 지원단(아래 지원단)'이 생겨났다. 이 막무가내 언니들은 피해자들에게 든든한 배후세력이기도 하고, 수사·재판 관계자와 가해자에게는 피해자 혼자가 아니라 조력자가 있음을 드러내는 의미를 갖는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하는 것은 특별한 지식과 교육을 거쳐야 할 수 있는 특별한 활동이 아니다. 피해자 중심에서 사건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성폭력 피해자의 조력자, 지지자가 될 수 있음을, 나의 주변에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하는 활동인 것이다.

이런 과정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주변에 알렸을 때 자신을 지지해주는 존재가 있음을 확인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으로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 이러한 움직임들이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달라지게 하고, 끊임없이 작동하는 잘못된 통념에 균열을 내지 않을까. 이런 기대로 성폭력 피해자의 용기 있는 발걸음에 동행하는 '재판동행지원단' 활동은 2014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재판동행 요청이 있을 때, 10명 내외의 지원단이 피해자와 함께 동행한다. 재판을 방청하면서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 등 재판 관련자가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통념에 근거한 부적절한 질문은 없었는지, 재판장 분위기는 피해자에게 위협적이지 않은지 모니터링 하는 것이 임무다. 또한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제도들이 실제로 잘 운영되는지를 체크하여 2차 피해 등의 인권침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활동도 한다.

'막무가내로 달려가는 성폭력피해자 재판동행 지원단'은 재판 과정에서의 피해자 인권 침해에 대한 부분을 꼼꼼히 확인한다.
 '막무가내로 달려가는 성폭력피해자 재판동행 지원단'은 재판 과정에서의 피해자 인권 침해에 대한 부분을 꼼꼼히 확인한다.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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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건을 성매매로 공소 사실 변경하라는 판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에서 재판동행지원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유림씨가 작성한 재판 후기를 싣는다.

지난 3월 11일, 성폭력 재판 동행 지원단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이 사건은 지난해 5월경 가해자가 스마트폰 채팅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피해 청소년을 만나면서 생겼다. 이후  8월 가해자 심문이 진행되는 공판부터 재판동행지원단이 함께 하였다.

지원단이 동행하였을 때 가해자는 '조건 만남'에 대해 피해자가 인지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피해자가 '조건만남'에 대해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는지가 쟁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담당재판부는 비공개심리 과정 중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와 피해자의 진술이 경찰조사와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난해 10월 15일,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은 여름부터 시작된 민우회 성폭력 재판 동행지원단 활동 중 마지막 재판 동행일이기도 했다.

재판장 앞에는 재판 동행단들과 피해자 가족이 모여 있었다. 한편 무죄를 선고한 판사는 공소 사실을 성매매로 변경하는 것을 조언하였다. 그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주위에는 먹먹함이 둘러 싸고 있었다. 성폭력 피해로 고소하였는데 판사가 공소 사실을 성매매사건으로 변경할 것을 조언이라고 하다니…. 너무나 답답한 현실이었다.

1심에서 무죄로 선고받은 이후 검사와 피해자 측은 항소하였다. 항소하면서 추가증거자료로 피해자가 '조건만남'에 대해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피해 이후 일관성 있는 피해 진술을 하기 어려운 피해자의 정신 감정 결과도 제출하였다. 재판부는 증인으로 피해자의 담당 정신과 의사를 증인으로 채택하였다.

재심이 열린 지난 3월 11일, 피해자 담당의사가 증인으로 출석하는 공판에 지원단은 피해자 가족들과 함께 동행하였다. 증인 심문 과정에서 증인은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 이후 겪은 외상 장애와 피해자의 정신 감정을 차분히 설명했다. 나와 딱 열 살 차이가 나는 피해자가 겪고 있는 감정은 공포, 절망이라는 단어로만은 표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할 무렵 피고인 측 변호사의 증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가해자 측 변호사의 첫 질문은 "성폭력의 개념을 알고 있냐?"였다. 성폭력 피해아동을 상담한 경험이 많은 전문의이고 피해자의 담당 의사였던 증인에게 성폭력 개념을 알고 있는지를 묻고, 피해자의 정신감정이 정확한 판단인지를 계속 묻고 급기야 피해자의 정신감정을 재요청하는 피고인 변호사들의 저열한 신문이 끝났다.

물론 법리적 관점에서 피해자 진술이 맞는지, 구체적 증거가 있는지에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정신감정이 다시 이루어진다면 피해자는 새 학기에 친구들과 학교를 뒤로한 채 몇 주간 입원하여 다시 고통의 길로 들어서야 할지도 모른다. 피해자를 위해 재판은 열리지만, 피해자의 상처는 과연 치료받을 수 있을까?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를 정하는 건 결국 판사의 몫이지만, 피해자의 상처는 누구의 몫일까.

판결이 있은 지 일주일 뒤 나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내가 함께 동행했던 사건을 자극적인 제목의 성폭력 관련 기사로 마주하였다. 머릿속에 또 다시 물음표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다양한 감정 속에서 하나의 느낌표를 찾아냈다.

'재판에서 지고 이기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봐야하는 것은 피해자 그 자체이구나!'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은 그 누구도 똑같이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피해자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누군가 재판을 모니터링하고, 피해자와 함께 하다보면 재판 과정 속에서 피해자의 관점도 자리 잡게 되지 않을까. 이게 바로 내가 성폭력피해자 재판 동행 지원단 활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태그:#성폭력, #한국여성민우회, #재판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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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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