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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어렴풋이 대학 청소노동자들이 떠올랐다. 투박한 손과 주름진 얼굴로 김태흠 새누리당 의원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 국회 청소노동자도 생각났다. 가르치지만 스승 대우 받지 못하는 시간강사도 스쳐갔다. 생존을 위해 철탑에 올라야만 했던 파업 노동자들도, 교육을 상품화시킨 대학도, 그 위상만큼이나 우뚝 솟은 상징물들도, 학문보다는 취업 기술을 익히는 학생들도….

행복한 결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련하기보단 답답한 마음이 앞섰다. 우리 사회에 산적한 과제를 다시금 상기시켰기에. 잊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어린 시절의 숙제처럼.

박지리의 장편소설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작가가 대학생 시절, 강의실을 청소하던 미화원 아주머니를 보며 느낀 감정이 모태가 됐다. 일상에 녹아든 특별할 게 없던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탓인가, 사회 탓인가.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아리송하다.

"이 양춘단이가, 참말로 대학에 간단 말이여?"

<양춘단 대학 탐방기> 책표지. 만화가 앙꼬의 그림은 여전히 정겹다. 코끼리에 올라탄 주인공을 그렸다. 코끼리는 춘단이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대학의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소설 말미에 코끼리상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양춘단 대학 탐방기> 책표지. 만화가 앙꼬의 그림은 여전히 정겹다. 코끼리에 올라탄 주인공을 그렸다. 코끼리는 춘단이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대학의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소설 말미에 코끼리상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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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단. 농사일을 하며 고향에서만 평생을 산 사람. 그러다 남편의 투병생활로 인해 상경한다. 병원에서 우연히 사귄 동생의 소개로 대학 청소 노동자로 취직한다. 청소일을 하리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 처음엔 펄쩍 뛰었지만, 대학에서 일한다는 말이 춘단을 사로잡았다.

춘단에게 '대학'은 특별한 곳이었다. 동네방네 자랑을 했다. 그게 청소일이 됐든, 입학이 됐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대학의 한 소속원이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그런 시절을 나고 자랐다.

"오빠, 춘단이 내일부터 대학에 가기로 했어라. 아니, 대합이 아니라 대학. 대합은 삶아 먹는 거고. 그려, 대학요. 다 큰 얼라들이 다니는 핵교. 아따, 어쩐다고 아까보다 놀란다냐. 양춘단이 대학간다는 게 고렇게 놀랄 일이오?"(본문 60쪽 중에서)

하지만 그 자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교정의 학생들은 생기가 없었다. 입학생 때의 패기는 사라지고, 전공이 무엇이든 행정학을 공부했다. 그렇게 그들은 평균 4년 6개월을 교정에서 보냈다. '빽'으로 들어와 편한 장소의 청소를 맡았다는 오해도 받았다. 나름의 법칙으로 돌아가던 청소 노동자들의 일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주인공이 됐다.

"춘단이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엉덩이를 댈 수 없을 정도로 시린 바닥과 밖에서 들리는 온갖 소음(차의 시동 소리, 경적 소리, 바퀴 돌아가는 소리)과 쾨쾨한 곰팡냄새, 삼십 촉짜리 백열등이 어둡게 비추는 컨테이너 속의 정경, 무엇보다도 도시락을 바닥에 펼쳐놓고 다닥다닥 붙어 앉아 급하게 밥을 먹는 푸른 옷의 사람들이었다.(본문 103쪽)

춘단은 차라리 옥상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곳에서 단 한 사람의 친구 한도진을 만난다. 한도진은 극구 자신이 교수가 아니라고 했지만, 춘단은 교수와 강사의 차이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말이다. 춘단이 내뱉는 말이 쓰다.

"그라믄 교수 선생 맞구만. 아따, 뭐할라고 강사니 시간이니 뭐니 모르는 말로 바꿔 쓰요."(본문 106쪽)

둘은 점심시간에 밥을 나누며 '밥정'을 쌓는다. 그런데 다음 학기부터 도진이 보이지 않는다. 후에 호수에서 시체로 발견되기까지 춘단은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교정에서 시간강사 한 사람이 사라진 틈새는 금세 메워졌다.

방법이 없었다... 결국 피켓을 들었다

해가 가고 청소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소장이 바뀐다. 새로 부임한 소장은 강압적이다. 폭언은 예사다. 초과근무나 야간근무에 대한 수당은 없다. 오히려 해괴한 논리로 임금을 삭감한다. 전 소장은 그러지 못해 잘렸다는 게 이번 소장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라고. 최저임금이니 뭐니 정해놓은 것도 다 몸 건강한 이삼십대한테나 해당하는 거지, 당신 같은 사람 좋으라고 만든 게 아니야. 이십대 팔팔한 애들도 다 사천 원 받고 일만 잘하는데 육십 넘은 늙은이가 돈을 더 많이 받으면 그게 공평해?"(본문 206쪽)

그들은 당황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지도 못했고, 대처방안은 더더욱 몰랐다. 소박한 편지 한 통을 대학의 시설관리팀으로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뜻밖에 시설관리팀의 답변은 소장을 통해 돌아왔다. 그리고 더욱 고된 일상이 시작됐다. 그렇게 그들은 '소'가 됐다. 새파란 소장에게 '엎드려 뻗쳐'도 당했다.

"본 대학은 미화 용역업체인 더클린과 미화원들의 계약 관계에 하등의 관련이 없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임금 문제는 미화원들 각자가 더클린과 협의하길 바라며 추후 본 대학에 동일한 편지를 계속해서 보낼 경우 심각한 업무 방해를 유발할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는 바입니다."(본문 221쪽)

한 글자, 한 글자 고민해 써내려간 편지에 담은 희망은 짧고 간결한 답변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교정에서 피켓을 든다. 여기서 춘단은 빠진다. 자신을 받아준 대학에 해가 가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

학생회의 지지를 얻으며 힘을 얻는가 싶었던 그들만의 시위는 오래가지 못한다. 대학은 학생들이 없는 토요일을 이용해 경찰을 불러 그들을 끌어냈다. 울부짖는 얼굴과 살려달라는 비명만이 텅 빈 교정을 채웠다. 그렇게 청소노동자들은 '청소'됐다.

그리고 청소업체는 바뀐다. 업무와 대학은 그대로건만. 춘단은 극한의 외로움을 느낀다. 동료들은 사라졌고 유일한 말동무였던 강사도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소설 속의 사람들, 본 적 있나? 나는 봤다

그러던 중 강사의 일기장이 춘단에게 도착한다. 춘단은 그것을 학교 이곳저곳에 옮겨 적는다. 경찰도 아니고 언론사도 아닌, 자신에게 보낸 데에는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기며. 자신의 청소구역에서 학교를 불편하게 만드는 낙서가 발견된다는 이유로 야간조로 옮겨지지만 그 일을 멈추지 않는다.

어느 날, 대학의 상징이었던 거대한 코끼리상이 쩍쩍 갈라진다. 금이 가더니 마침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왜 일까? 쿵!

우리는 봤다. 마음 편히 도시락 먹을 공간도 없이 일하면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청소 노동자를, 스승은 없고 CEO만 남은 총장실을, 학문보다는 취업에 몰두하는 학생들을, 변두리로 밀려나 한 학기마다 계약을 걱정해야 하는 시간 강사를,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하는 그들을. 

분명, 봤다.

"양춘단은 실제 인물이다. 김영일, 양호익도 실제 인물이다. 한도진과 김종철, 서성환이라는 가명으로 숨어 산 장대열도 실제 인물이다. 이름 없이 성씨로만 불리는 김씨, 이씨, 박씨…. 도시를 누비는 경찰 기동대, 파업 노동자들, 새벽일을 나가는 가방 군단,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행정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그리고 여기서조차 언급되지 못한 수많은 이들까지, 모두 실제 인물이다.

분명, 본 적 있을 거다."(<양춘단 대학 탐방기> 작가의 말에서)

덧붙이는 글 | <양춘단 대학 탐방기>(박지리 씀 /사계절 / 2014.02 / 1만2800원)



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사계절(2014)


태그:#박지리, #양춘단 대학 탐방기,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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