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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너 참 많이 먹는구나. 그게 몇 개야? "
"몰라, 한 40~50개쯤 되나. 원래 거지 체질이잖아. 기회 있으면 뱃속에 들어갈 때까지 일단 먹어두고 보는 거지. 하하하."

2006년 겨울 미국 워싱턴 DC의 한 호텔에서였다. 서울에서 출장 온 친구와 친구 회사의 임원, 직원, 그리고 나까지 넷이서 아침식사를 뷔페로 먹었다. 헌데 내가 호텔 뷔페 식사의 단골 메뉴인 이른바 '비엔나 소시지'를 접시 한 가득 담아, 정신 없이 먹는 걸 보고 친구가 눈을 휘둥그래 뜨며 놀라 묻는 거였다.

차를 타고 유랑자처럼 북미대륙을 떠돌았던 시간은 잠들어 있던 '야생 본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닥치는 대로 먹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삶은 달걀만 한 자리에서 10개 안팎을 먹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11년 여름 아들, 아들 친구 두 명 등 넷이서 미국 대륙을 횡단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젊은 녀석들에게 달걀을 좀 먹였다. 물가가 대체로 높은 미국이지만, 달걀 값만큼은 우리나라 보다 헐하다. 싸게 열량을 채울 수 있는 음식으로는 달걀만한 것도 드물다.

혼자 여행할 때는 경비를 아끼려고, 휴대용 가스 레인지를 이용해 가능한 밥을 해먹으려 했다. 그러나 맨밥에 달걀만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금방 허기가 찾아오곤 했다. 어쩔 수 없이 햄버거 가게를 자주 들락거렸다. 특히 겨울을 나면서는 쌩쌩 바람이 부는 길거리에서 밥을 해먹기도 쉽지 않았다. 한 번은 거의 한달 동안 쉬지 않고 햄버거만 먹기도 했다. 햄버거는 항상 '빅' 사이즈를 주문했는데, 계속 먹다 보니 먹고 난 직후에는 가끔씩 물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식사 때가 되면 입에 군침이 괴기 시작해, "이게 왠 떡이냐"는 심정으로 한 차례도 예외 없이 햄버거를 달게 먹곤 했다. 여행 중이 아니더라도 평소 사람들과 식사를 끝내고 난 뒤에도, 먹을 것만 보면 입안 가득 침이 고여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경험자들은 알겠지만, 입안에 침이 넘치면 발음이 잘 안 된다. 물론 침을 꿀꺽 삼키면 말하는 데야 지장이 없지만, 눈 앞의 상대는 목젖이 크게 움직이는 걸 보고, 침 넘기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태생이 궁상스러운 성격이긴 하지만, 비루함을 감추고 싶은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가난한 집시 스타일의 여행이 야생 본능을 일깨운 것은 확실하다. 헌데 먹는 것에 관한 한 원래부터 타고나길 내공이 좀 있는 편이다. 나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이력을 아는 친구 중 몇몇은 지금도 오랜만에 만나면 심심치 않게 "요즘도 개구리 먹느냐"고 놀리곤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시골에 살았는데, 넉넉지 않은 살림 때문에 한동안은 상시 허기진 상태였다. 하루 두 끼도 제대로 못 먹을 때가 많았으니까. 불쌍한 청개구리가 나의 영양원 역할을 한 건, 그러니까 배고픔과 영양실조가 주된 이유였다.

할머니는 한참 커야 할 나이에 굶주려야 했던 손자가 안돼 보였던지, 청개구리를 잡아 먹을 것을 권했다. 할머니 말씀에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특히 비 오는 날은 청개구리를 포식했다. 지금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비가 오면 개구리들은 논이나 밭에서 아스팔트 포장도로 위로 뛰어 나온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개구리들을 일단 정신 없이 잡아, 비닐로 된 책가방 사이의 공간에 가둬 뒀다. 보통 20~30마리쯤 잡았다.

그리고 포장도로가 끝난 뒤 흙 길이 나오면, 그 때부터 책가방 사이에 손을 넣어 한 마리씩 꺼내 먹었다. 청개구리야 크기가 엄지손가락 정도니까, 씹지 않고 꿀꺽꿀꺽 삼켰다.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르면서 집까지 걷다 보면, 20~30마리를 다 먹어 없앨 수 있었다. 

70년대만 해도 지방의 중소도시에서는 중학생 등이 농촌으로 벼 베기 지원을 나가곤 했다. 벼 베기 봉사 나가는 날도, 역시 배를 불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벼에 달라 붙어 있던 청개구리들이 튀어 나오면, 선생님과 친구들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잡아 먹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본능적으로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믿음은 굳건했다. 또 영양의 3대 요소라든지, 균형 잡힌 식사라든지 하는 개념은 전혀 없었는데, 몸이 단백질 영양원을 갈구했다. 십 수년 전부터, 육식을 자제하려 노력했지만 지금도 실천은 쉽지 않다. 요즘도 가끔씩 고삐가 풀리면 고기를 양껏 먹고, 길게는 이튿날 저녁 식사시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지낸다. 아이 엄마는 이런 식습관 때문에 나를 '복실이'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한다.

복실이는 우리 시골집에서 기르는 멍멍이로 풍산개이다. 이 녀석은 끼니 때가 되면 충분히 먹고 어쩌다 집을 비워 식사를 못 챙겨 줘도 잘 버틴다. TV 동물 다큐멘터리 같은 걸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몇몇 야생동물들은 한번 식사를 한 뒤 한동안은 따로 음식을 먹지 않는다. '복실이'라고 놀리는 건 그러니, 먹는 게 짐승 같다는 뜻이다.  

야생에서 살아가려면, 뭐든 닥치든 대로 먹을 수 있어야 유리하다. 북미대륙 여행 중 노스 다코타의 시골 도서관에서 만난 동유럽 출신의 한 할아버지는 내가 "뭐든 잘 먹는다"고 말하자, 동감을 표시하며 가죽 신발을 삶아 먹은 얘기를 들려줬다. 부모를 따라 1900년대 중반에 이민 왔다는 그는 "가죽을 삶을 경우 거기서 영양 성분들이 녹아 나온다"는 말을 부모들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북미대륙을 싸돌아 다니면서, 특히 중국 뷔페 식당을 찾아낸 날은 완전히 본전을 뽑았다. 미국과 캐나다는 인구 5000명 정도만 되는 시골 마을이면, 십중팔구 중국사람들이 운영하는 뷔페 식당이 있다. 점심 뷔페는 비싸야 15달러 정도인데, 주인 눈치 볼 것 없이 허리 띠를 풀고 배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튿날 저녁 때까지 굶었다. 햄버거를 사먹어도 하루 식비를 25달러 이하로 줄이기 어려운데, 15달러로 이틀을 나는 셈이니, 최소 30달러 이상 식비가 굳었다.

잠자고, 옷 입고, 씻는 것도 먹는 거 못지 않을 정도로 야생 스타일인 게 북미대륙의 시골을 전전하는 여행을 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도시를 떠나고 싶어 수십 년 동안 안달했는데, 현장에 서보니, 딱 체질이었다. 이러니 동가식서가숙 집시 여행이 매일매일 엑스터시일 수 밖에 없었다.    

값싼 식사
 값싼 식사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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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 샌드위치는 미국에서 가장 싸게 먹을 수 있는 메뉴 가운데 하나이다. 사진 속의 식빵은 한 봉지에 3달러 안팎, 달걀 12개 한판 값은 2달러를 여간 해서 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아쉽지만 세 끼니는 때울 수 있다. 

푸드 뱅크
 푸드 뱅크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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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의 한 시골 식당 풍경. (왼쪽) 베이컨이나 소시지가 빠지지 않는데,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간다. 뉴올리언스의 푸드 뱅크. (오른쪽) 미국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 곳에서 반나절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화장실 앞 식사
 화장실 앞 식사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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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 주 드모인의 한 공중 화장실 앞 조명에 의지해 저녁을 라면으로 해결하는 아들과 아들 친구들.  2011년 여름, 미대륙 횡단 여행하면서 이 젊은 친구들은 식비 절감을 위해 거의 매끼니 정크 푸드를 먹어야 했다.

저렴한 식료품
 저렴한 식료품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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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필수 식료품 물가는 일반 물가에 비해 낮은 편이다. 달걀과 값싼 소시지, 값싼 우유는 열량이 높아 아들 친구들은 물론 나 홀로 북미대륙을 떠돌 때도 즐겨 먹었다. (왼쪽) 샤워시설이 있음에도 숙영 비용이 10달러 미만인 한 야영장에서 아들과 하룻밤을 났다. 고속도로 옆이라 차량 소음 아주 심한 탓에 가격이 쌌다. 식은 밥과 끓인 라면의 조합도 훌륭한 한 끼 식사 메뉴다. 

덧붙이는 글 | 세종시 닷넷(sejongsee.net)에도 실렸습니다. 세종시 닷넷은 비영리 커뮤니티 포털입니다.



태그:#식사, #짐승, #뷔페, #미국,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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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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