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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 기치가 느껴지는 난징의 중산릉. 권위주의적인 릉으로 불리는 마지막 묘소다
▲ 쑨원이 묻힌 중산릉 삼민주의 기치가 느껴지는 난징의 중산릉. 권위주의적인 릉으로 불리는 마지막 묘소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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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이 해는 중국이 긴 황제의 나라에서 시민들의 나라로 된 신해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된 해이자, 중국 공산당이 만들어진지 90년이 되는 해였다. 중국 정부도 '12차 5개년 계획'의 시작을 알리면서 중국의 버전업을 주창하고 있었다.

5개년 계획은 1953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으로 인해 허울 좋은 계획으로만 남아있을 때가 많았다. 중국의 중장기 전략을 총괄하던 이 지침은 2011년, '경제발전 방식의 빠른 변화, 과학발전의 신국면 오픈, 농업 현대화 추진, 내수전략 확대, 경제 연착륙, 산업경쟁력의 경쟁력 제고, 생태문명 수준 제고, 기본 공공 서비스 체계 구축, 상호이익을 위한 개방전략 실시' 등 주로 상징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반면에 이해를 시작으로 모든 실내공공장소를 비롯해 대중교통시설 등에서 금연이 실시됐다. 빨리 정착하지는 않았지만 흡연자의 천국, 비흡연자에게는 지옥 같았던 중국의 변화를 예고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었다.

중국의 스텔스기의 진화단계를 보여주는 젠 20전투기와 젠 31 전투기
▲ 젠 20(위) 전투기와 젠 31전투기 중국의 스텔스기의 진화단계를 보여주는 젠 20전투기와 젠 31 전투기
ⓒ 중국군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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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바싹 뒤쫓는 중국, 이젠 놀랍지 않다

1월 11일에는 중국의 신형 전투기 젠 20의 시험비행이 성공했다. 미국의 신예 스텔스기 F22 랩터를 빼다박은 이 전투기는 훗날 발표한 젠31과 더불어 미국의 최신형 전투기 F35의 기능에 상응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기의 발표시점에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가 중국을 방문했다. 훗날 게이츠는 회고록에서 이 상황은 후진타오 주석이 자신을 모욕한 것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국은 젠 20의 실전 배치시점을 2020년으로 예정했는데, 2014년 1월에는 시제기의 모델을 공개해 별 차질 없이 이 항공기의 개발이 착수됨을 알렸다. 1964년에서 1967년 사이 원자탄과 수소폭탄의 개발을 마친 중국이 스텔스 전투기 개발까지 완료하면서 군사력에서도 강한 면모를 보였다.

1월 20일에 국가통계국은 전 해 경제성장률을 발표했다. 전 해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39만7983억위안(한화 7163조 원 가량)으로 전년대비 10.3% 성장한 것으로 발표했다. (미국이 저성장을 거듭하고 있을 때)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10% 넘는 성장을 한다는 것에 세계가 경악했다.

90년대에는 2050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을때 믿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1997년 중국사회과학원이 2030년에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2011년 11월에는 영국의 저명한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8년에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밝혔고, 일년후에는 OECD가 "중국의 경제규모가 빠르면 2016년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말을 의심하는 이들은 거의 없어졌다. 물론 아직 1인당 GDP나 질적인 면에서 미국을 쫓아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중국식 사회주의 발전모델인 '베이징 컨센서스'를 세계적인 성장 모델로 만든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상황이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에서 진도 9.0의 강진이 발생했다. 희생자도 많았지만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방사능 오염이 심각해지자 중국 역시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전기생산에서 핵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2% 미만으로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는 휠씬 낮은 수치다.

하지만 화석원료의 고갈이나 신재생에너지의 효율 문제가 겹치면서 동해안쪽에 많은 원전계획을 구상하는 단계였다. 그런 중국에서 후쿠시마 사태가 주는 경고는 만만치 않았다. 이후 중국 국무원은 원전 계획은 진행하지만 내륙쪽 건설에서 배제하고, 발전 기법도 위험성이 낮은 방식을 채택하는 등 안전문제를 중시하고 있다.

5월 20일부터 일주일간 북한 김정일이 베이징과 헤이롱지앙, 지린 지역을 비공식 방문했다. 중국 상무위원 대부분이 개별적으로 김정일을 면담했다. 전년에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신뢰를 확인한 셈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국익이 우선이었다. 북한의 자원을 확보하고, 나진선봉을 통해 동해로 나가는 좋은 항구를 확보한다는 점에서는 북한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이징 남역은 고속기차의 중심기차역으로 거듭나면서 홍콩까지도 한나절만에 연결했다
▲ 베이징 상하이 간 가치 출발점인 베이징남역 베이징 남역은 고속기차의 중심기차역으로 거듭나면서 홍콩까지도 한나절만에 연결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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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목상대' 보여주는 중국 고속철도

이해 6월 30일 베이징과 상하이간 고속철도가 개통됐다. 중국 고속철도인 까오티에(高鐵) 공사는 새로운 철로를 놓는 큰 공사다. 정치수도인 베이징과 경제수도인 상하이를 연결하는 고속철도는 상징적인 면에서도 중요했다.

두곳의 거리는 1318킬로미터로 가장 빠른 열차 운행시간은 4시간 48분이다. 두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항공기 보다는 늦지만 공항 가는 시간과 절차 등을 감안하면 기차가 비행기와 비슷한 도착속도를 갖게 된 셈이다. 중국이 고속철도를 처음 도입한 것은 1999년이다. 이후 급속히 망을 구축해 2014년 말까지 1만2500킬로미터의 철로는 건설했고, 2020년까지 추가로 1만6000킬로미터를 건설할 계획이다.

고속철도의 속도 역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준다. 2014년 1월에는 철도기업 '난처'가 시속 605킬로미터의 고속열차 운행에 성공해 세계기록을 경신했다. 이 속도는 프랑스 테제베가 세운 시속 574.8킬로미터를 경신한 것이었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철도 속도를 시속 800~850킬로미터까지 올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1980년대 중반 중국을 열차로 여행하고 더럽고 부족했던 내용을 담았던 폴 서로우의 '중국기행' 역시 지나간 일이 되고 말았다. 중국 철도는 많은 투자로 인해 부채가 적지 않은 상황이지만 중국의 성장 속도를 말해준다는 점에서 괄목상대라는 말이 어울린다. 물론 이해 7월 23일 베이징에서 푸저우로 가는 고속열차가 탈선해 40명이 죽고, 192명이 다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 길이가 12만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 기차는 이후 큰 사고 없이 순항하고 있다.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1차 회의지는 우리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 중국 공산당 1차 회의지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1차 회의지는 우리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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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은 중국공산당 설립 90주년이 되는 달이다. 1921년 7월 23일 프랑스의 조계지였던 상하이 왕지루(望志路)에 있는 리한중(李漢俊)의 집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오쩌둥, 리타(李達), 리한중, 장궈다오(張國燾), 류런징(劉仁靜), 허수헝(何叔衡), 통삐우(董必武), 천두슈(陳獨秀) 등 13인의 각 지역 대표와 53명의 당원들이었다.

이 회의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로 신중국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이들은 경찰의 습격 소식에 장소를 지아싱(嘉興)의 난후에 있는 배위로 옮겼지만 이 장소는 '중공1대회의지'로 불리는 중국 공산당의 혁명성지가 됐다.

항저우 서호 주변인 후비엔춘에 위치한 항저우 임시정부 유적지
▲ 항저우 후비엔춘 임시정부 기념관 항저우 서호 주변인 후비엔춘에 위치한 항저우 임시정부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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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한 도시화 속 파괴돼 가는 독립운동 유적

일반인들은 임시정부하면 상하이 마당루에 있는 청사와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루쉰공원(홍구공원)을 떠올린다. 맞지만 중국에는 그보다 휠씬 다양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유적이 광범위하게 널려있다. 윤봉길의 의거 이후 김구 선생 등이 피신해 있는 지아싱(嘉興) 메이완지에(梅灣街)와 하이옌(海鹽)의 차이징비에슈(載靑別墅)는 '백범일지'에 단골로 등장한다.

항저우에는 쥔잉여관(群英飯店)과 후비엔춘(湖邊村) 청사 등이 있다. 난징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 터 등이 있고, 후난성 창사에는 김구선생이 피격당한 난무팅(楠木廳)을 후난성 정부가 임시정부 기념관으로 복원해 두었다.

그밖에도 류저우(柳州)나 치지앙의 임시정부 유적지가 많고, 충칭에는 해방을 맞았던 롄화츠 임정청사가 잘 복원되어 있다. 나는 취재나 답사를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그런데 급속한 도시화속에 이런 유적들이 하루가 다르게 축소되고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안타까움 때문에 유적을 알기고, 독립의지를 기억하기 위해 직접 다큐를 제작하기도 했다. 2003년 9월에 KBS에서 '임시정부 2만리 길을 가다'라는 제목으로 방송했는데, 나중에는 광복회 등의 중국 답사 유적 답사를 진행하면서 더 좋은 기획을 하자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이해 10월 10일은 신해혁명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국민당의 전통을 갖고 있는 대만에서는 거대한 축제의 행렬이 벌어졌다. 대만은 쌍십절로 부르며 신해혁명 기념일로 지정했지만 10월 1일 공산당 건국 기념일을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상대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해만은 신해혁명의 주인공 쑨원에 관한 많은 다큐를 방송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12월 17일 중국에도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북한 지도자 김정일의 서거 소식이었다. 중국 언론은 김정일의 사망소식을 발빠르게 전했고, 이런 보도는 장례식 생중계로도 이어졌다. 중국은 조문단으로 장더장 부총리를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부총리는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한 유학생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가까웠다.

사실상 공직의 첫해가 지나갔다. 처음에는 나 역시 실감하지 못했지만 투자유치 분야에 전문공무원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될 것이 많다. 우선 영어나 중국어 등 확실한 언어는 한가지 능통해야 한다. 또 일반 공무원들처럼 자신의 업무에 벽을 쌓고 일할 경우 좋은 실적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이럴 때 나에게 가장 깊게 각인된 말은 쇼호스트 출신인 장문정씨가 책으로 출간한 '팔지마라, 사게하라'는 마케팅  접근방식이다. 그녀의 지적처럼 고객의 필요와 욕구를 적절한 타이밍에 자극해 결국 고객이 스스로 선택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를 위해서 마케터는 팔려는 비즈니스맨의 생각보다는 사려는 소비자 입장에서 설득돼야 한다. 특히 수십만 평에서 수백만 평까지 한 지역의 거대한 프로젝트 투자유치를 위해서는 세계적인 대기업들의 정책 결정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논리를 만들어야 했다. 내가 일하기전 새만금에는 수차례 투자의사를 가진 기업이 나타났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제대로 된 투자자들이 아니었다.

앞선 사례들을 타산지석 삼아 제대로 된 투자유치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고심하기 시작한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태그:#중국, #젠31,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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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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