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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서 발견한 <아리랑> 담배
 인천공항에서 발견한 <아리랑> 담배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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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기, 펭돔, 전봇대 잡고 10분….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북한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낸 담배 이름이란다. '펭돔'은 '펭 돌 정도로 쎈 담배'라는 뜻이란다. '전봇대 잡고 10분'은 더 재미있다. 팽 도는 것은 잠깐이지만 한 번 피웠다 하면 적어도 10분 동안은 전봇대를 잡고 있어야 쓰러지지 않을 만큼 담배 맛이 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이게 나오자마자 '펭돔'의 인기를 단숨에 제압해 버렸단다.

우리나라 최초의 담배는 1946년에 나온 '승리'다. 1949년에 처음 보급되기 시작한 군용담배 '화랑'은 1981년까지 생산되어 아직까지 국내 최장수 담배로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장수한 담배가 바로 1958년부터 시중에 나온 '아리랑'이다.

이 '아리랑'은 우리나라 최초의 필터 담배(북에서는 '려과담배')로, 당시 '쓰리랑'이라는 이름의 짝퉁 담배까지 시중에 돌아다녔을 만큼 고급담배의 대명사로 한동안 군림했다고 한다. '아리랑'은 중간에 생산이 잠시 중단되긴 했지만 1988년까지는 누구나 사서 피울 수 있었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고, 그에 항거하는 목소리가 천둥 같았던 19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곁에 두고 아껴 피우던 '거북선'에서 내려와 새로 나온 '솔'로 갈아타던 순간의 그 구수한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있는 집안 자제들의 얘기였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대학생들은 한 갑에 100원 하던 '청자'나 '환희'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보다 조금 나은 축들은 '한산도'나 '은하수'였다. 아, '도라지'라는 담배도 있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우리의 담배 이름은 하나, 단오, 풍산, 영광, 금강산, 백두한라 등 북한에서 나오는 것들과 크게 차별되지 않았다. 도라지처럼 우리 정서가 담긴 순우리말(이거나 한자)로 이름을 붙인 담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담배 이름에서 '촌티'를 벗겨내는 서막의 팡파르를 울린 것이 바로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나온 'EIGHTY EIGHT 88'이었다.

1990년대 들어 외국어 이름을 붙인 담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담배 시장의 개방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그 시기에 새로 나온 담배로는 EXPO, THIS, THIS PLUS, SIMPLE, ESSE, GET2, ('오막살이'라고도 불렀던) OMAR SHARIF 등이 있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새로 나온 담배 중에는 '시나브로'라는 순우리말 이름도 있었다.

대망의 21세기에 들어서는 또 이런 담배 이름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TIME, SIGMA, SEASON, RAISON, RICH, THE ONE, ZEST, CLOUD9 …. 입맛에 따라 이름이나 종류가 하도 다양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조차 어떤 건 '양담배'로 착각할 정도다.

이제 그런 이름에 잘 훈련되고 익숙해져서인지 이 땅의 애연가들 누구도 외국어 일색인 담배 이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그 옛날의 '솔' 같은 담배이름을 기다리는 이는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런데….

88서울올림픽을 기해서 명맥이 끊긴 줄로만 알았던 담배 <아리랑>을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반갑게 만났다. 판매대 한쪽에 '면세점 한정판매'라고 적힌 안내문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리랑'이라는 이름뿐 아니라 전통 탈 문양과 한글 서체를 활용한 디자인에 끌려서 한 보루 덥석 샀다. 그리고 흡연실로 가서 한 개비 맛나게 피우다 보니 슬그머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 좋다. 이름하여 21세기 글로벌 시대고, 자원이 부족해서 수출 아니면 먹고 살기가 빠듯하다고들 하니까 담배 이름 그까이꺼 타임이나 시그마면 어떻고, 레종이면 좀 어떤가.  
그렇더라도 '아리랑'처럼 우리 고유의 정서를 담은 담배 이름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이런 담배를 면세점에서만 한정판매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한글 이름이 '촌스러워서' 다들 입맛이 떨어진다고 툴툴대더라도 그런 건 지켜갈 줄 아는 게 진정한 글로벌 마인드 아닐까 하는….


태그:#담배, #아리랑, #그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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