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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벌판의 지평선
 만주 벌판의 지평선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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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만큼 느낀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고 한다. 나는 어린 시절 경북의 내륙지방에서 자랐는데, 그 시절 내 또래 친구들 가운데는 바다를 보지 못한 친구들이 많았다. 어느 해 여름, 가뭄이 몹시 심했다. 이른 봄부터 하지 무렵까지 비다운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모내기는커녕 모판도 바짝 타들어가고 밭작물도 거의 메말랐다.

우리 마을에서 가까운 낙동강도 강물이 줄어들어 어른들은 바지를 걷고 건널 정도였다. 어느 토요일 우리 악동들은 동네 덤벙이 모두 메말라 하는 수 없이 낙동강으로 가서 멱을 감았다. 그때 한 녀석이 말했다.

"이 가뭄에 바닷가 사람들은 해수욕도 못하겠다."

마침 그때 나는 부모님이 부산에 사셨기에 바다를 여러 번 봤기에 대꾸했다.

"바다는 억시기 넓다. 그래서 가뭄을 안 탄다."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이 가뭄에는 벨수 없을 끼다."

그 친구는 내 말에도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때까지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헤이룽장성의 광야로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졌다.
 헤이룽장성의 광야로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졌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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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보다

사실 나는 '지평선'이니 '광야'니 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실제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제평야가 가장 넓다고 하였지만 직접 가보니 멀리 산이 보였다. 그래서 지평선이나 광야를 상상만 하다가 늘그막에야 그 지평선과 광야를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첫 항일유적답사인 1999년 여름,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넓으나 넓은 만주 땅을 내 발로 밟았다. '만주(滿洲)'라는 말은 중국 동북지방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의 동삼성을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다. 만주는 그 면적이 자그마치 123만 평방미터로 우리나라 남북한 전국토의 다섯 배가 훨씬 넘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만주 벌판은 군벌과 마적, 일제 관동군과 위만군, 그리고 우리 독립군들이 서로 뒤엉켜 각축을 벌였던 풍운의 대륙이었다.

그때 우리 항일유적지 답사단은 지린성 성도 창춘에 근거지를 마련해 두고, 사방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는데, 첫날은 하얼빈 행이었다. 승용차가 창춘 시가지를 벗어나자 말로만 들었던 망망대해 같은 만주 벌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창춘에서 하얼빈까지는 280여 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이었다. 도로는 대부분 일직선이었다. 드넓은 만주 벌판은 온통 옥수수 밭으로 초록의 물결을 이루었는데, 이따금 벼논들도 눈에 띄었다. 그 초록의 향연 틈새에 해바라기 밭들이 무료함을 달래듯 띄엄띄엄 샛노랗게 초록의 들판을 수놓았다. 그야말로 비단에 꽃수를 놓은 듯, 초록의 들판이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동북 랴오닝성의 옥수수밭으로 지평선이었다.
 동북 랴오닝성의 옥수수밭으로 지평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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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광야〉

창춘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길은 서너 시간을 고속으로 달려도 낮은 산등성이 하나 볼 수 없는 마냥 초록의 지평선이 이어졌다. 내 상상을 초월한 아득한 평야였다. 만주에서 태어나서 오십여 년을 이곳에서 살았던 안내자 김중생(일송 김동삼 독립군 손자) 선생은 이 일대가 지금은 대부분 옥수수 밭으로 초원을 이루고 있지만, 겨울철에는 황량한 허허 벌판으로 변한다고 했다. 아마 시인 이육사는 이런 만주 벌판을 보고서 <광야>를 읊었으리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은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새로운 초인을 기다리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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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으로, 그의 어머니는 허길(許佶), 구미 왕산가(旺山家)의 따님이다. 일찍이 왕산 허위 선생 순국 후 만주로 망명한 육사의 외가는 '일창(一蒼) 한약방'으로 독립운동가의 거점이었다.

육사의 행적을 보면 1920년대 독립군자금 모금으로 외숙 허규(許珪)와 만주를 몇 차례 왕래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육사는 열차나 마차를 타고 드넓은 만주 광야를 달리면서 우리 민족에게 조국 광복을 가져다 줄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일창 허발 선생 후손들은 이육사가 말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외당숙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는 늘 백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누비며 일제 관동군과 맞서다가 1942년 8월 3일 일제 위만 토벌대의 집중 사격을 받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이전에 육사가 노래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이미 이 지상에 없으니, 이제 새로운 '초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나는 만주벌판을 모두 네 차례 누볐다. 그때마다 드넓은 광야를 바라보며 남북한을 통일시켜줄 새로운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무지개를 기다리는 소년처럼 고대했다.


태그:#광야,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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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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