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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쟁터로 향하게 했던 그 세대 교육의 무서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평화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죽은 학우와 교사를 위한 진혼이라 믿습니다."(히메유리 동창회 - 히메유리 평화기념관 설립에 대하여 중)

전쟁을 기억하고 알리는 일, 그리고 평화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주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힘없는 보통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이를 직접 겪었다. 천황을 지키기 위해 일본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오키나와를 송두리째 밀어 넣었다.

어린 여학생들의 비참한 죽음... 미화로 그쳐서는 안 돼

오키나와 전쟁에 동원되어 비참하게 죽어간 히메유리 부대 여학생들을 위령하기 위한 탑
▲ 히메유리 탑 오키나와 전쟁에 동원되어 비참하게 죽어간 히메유리 부대 여학생들을 위령하기 위한 탑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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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남쪽에 있는 이토만시. 이곳에 '히메유리 탑'이 있다. 이 탑은 오키나와 전쟁 당시 포화 속으로 내몰린 어린 여학생들을 기리자는 취지로 세워졌다. 위령탑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공원 가운데 서 있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오키나와를 찾을 때 가장 먼저 들르는 순례 장소인데, 우리가 닿은 때(토요일 오후)는 비교적 한산했다.

공원 입구에는 오키나와 전쟁 설명과 당시 여학생들의 피해 상황을 설명해 놓은 표지판이 있다. 공원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위령탑이 육중하게 서 있다. 탑은 맑은 햇빛을 받아 빛이 났다.

위령탑 앞에는 넓은 구멍이 있는데 탑과는 대조적으로 이끼와 잡풀이 돋아있다. 이 구멍의 정체가 궁금했다. 동굴이다. 이 동굴은 전쟁 당시 병원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히메유리 부대원들은 동굴 안에 숨어 식량을 운반하고, 부상병을 간호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등 전쟁 수행 임무를 맡았다.

결국 이 동굴은 미군에게 발각돼 폭탄 공격을 받았고, 많은 학생이 희생됐다. 탑은 그때 이 자리에서 죽어간 여학생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탑에는 희생된 학생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키나와 명문 여학교인 여자사범학교와 현립 제1고등여학교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했다. 미군 상륙 후 일본군 사상자가 급증하자 두 학교의 여학생들은 남부 지역의 수송부대·간호부대로 배치됐다. 이 부대는 학교 교지의 이름을 따서 '히메유리 부대'라고 불렸다. 이들은 헌신적으로 전쟁 임무를 수행했다.

미군의 거센 공격에 막다른 곳까지 밀린 일본군은 이들에게 갑작스러운 '해산 명령'을 내렸다. 1945년 6월 18일의 일이다. 미군으로 포위된 전쟁터에 내몰린 여학생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정처 없이 헤매다 포탄에 파편에 맞거나,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 또 어떤 이는 갖고 있던 수류탄으로 자살했다. 학생들은 일본군의 무책임한 조치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셈이다.

히메유리 탑은 전쟁 당시 비참하게 희생된 학생들의 넋을 기리는 탑이다. 동시에 이 탑은 일본 제국주의를 기념하는 탑이기도 하다. 일본의 전쟁 수행에 애국적으로, 헌신적으로 앞장선 학생들을 기리는 탑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침략 역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 없이 전쟁의 비참함을 부각하고 희생을 미화하면 어떻게 될까? 책임 소재는 희석되며 진정한 의미의 평화 실현은 요원해진다. 이들의 희생이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과거 청산부터 선행돼야 한다.

오키나와도 일본의 식민지였다

평화기념공원 자료관 입구. 기둥 위의 장식은 오키나와를 상징하는 시사(사자)이다.
▲ 평화기념공원 평화기념공원 자료관 입구. 기둥 위의 장식은 오키나와를 상징하는 시사(사자)이다.
ⓒ 겨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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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경험한 나라라면 그 전쟁 관련 기념공원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오키나와도 마찬가지다. 히메유리 탑에서 동쪽으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부니(摩文仁) 언덕에는 '평화기념공원'이 있다. '전쟁기념관'이 있는 한국에 사는 나는 '평화기념공원'이라는 명칭이 조금 생소했다. 평화를 기념한다? 그러나 표기는 '빌다, 바라다'라는 의미가 담긴 '기념'(祈念)을 쓴다. 즉, 평화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공원이다.

'평화기념공원'은 오키나와현 이토만시 남쪽 바다를 접한 마부니 언덕에 있다. 공원 초입에는 오키나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자료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키나와 역사와 오키나와 전쟁 기록이 전시돼 있다.

1879년 메이지 유신의 '류큐처분'으로 오키나와 현은 일본에 병합된다. 이후 일본은 오키나와에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한다. 일례로 류큐식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는 '개성개명'운동이 바로 그것. 조선에도 강제했던 '창씨개명'과 비슷한 개념이다.

또한 일본은 오키나와 사투리를 쓰는 사람에게 '방언패(찰)'을 걸게 해 처벌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본은 사투리를 멸시하고 향토 문화를 부정하는 풍조를 조성했다. 이는 식민지 시대 '조선어 사용금지' 정책과 매우 유사하다. 게다가 집집이 카미다나(소형 신전)를 설치하게 해 일왕의 어진영(사진)을 모시게 했다. 이런 차별과 멸시 속에서 오키나와는 일본에게 강제병합됐다.

미군이 오키나와 여성을 사살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 오키나와 전쟁 미군이 오키나와 여성을 사살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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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관에는 오키나와 전쟁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담은 사진들, 전쟁 생존자의 증언을 하나하나 기록한 자료들까지. 돌아보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키나와 전쟁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증언을 그대로 옮겨 놓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오키나와 전쟁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증언을 그대로 옮겨 놓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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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사죄·보상 등 실질적 행동이 우선

자료관을 나와 마부니 언덕 끝으로 이어지는 중앙광장. '평화의 초석'이 파도 물결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평화의 염원이 물결쳐 세계로 퍼져나가기를 기원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그래서 평화의 초석은 바다와 맞닿은 곳에 있다. 바다는 짙은 푸른빛으로 잔잔하고 평온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태평양은 오키나와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였다. 미군 함대 1500척이 바다를 검게 만들었고, 미군의 집중 공격으로 해변은 시체와 붉은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평화의 초석에는 오키나와 전쟁으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일본인을 비롯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대만인 그리고 미군까지 모두 함께 말이다. 현재 23만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앞으로 판명될 전사자도 추가로 각명할 계획이란다.

오키나와 전쟁의 모든 희생자를 새겨 놓은 위령비. 분수에는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고 중심의 원뿔은 오키나와 나타낸다. 평화의 물결이 퍼져나가기를 소망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 평화의 초석 오키나와 전쟁의 모든 희생자를 새겨 놓은 위령비. 분수에는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고 중심의 원뿔은 오키나와 나타낸다. 평화의 물결이 퍼져나가기를 소망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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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초석'에 모든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화해와 평화를 소망한다는 의미일 게다. 하지만, 가해자와 함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각명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평화를 기원한다는 지향은 바람직하지만, 전쟁에 대한 사죄·보상 없이 한데 모아 위령만 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실질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평화의 초석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게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에 동원돼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은 어떻게 새겨져 있을까'가 바로 그것. 평화의 초석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구분돼 있다. 식민지 '조선인'으로 전쟁에 강제 동원돼 희생된 이들은 죽어서도 제 나라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분단의 현실은 머나먼 오키나와에도 새겨져 있다.

모든 희생자의 이름을 새김으로써 화해와 평화를 소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가해자와 함께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 평화의 초석 모든 희생자의 이름을 새김으로써 화해와 평화를 소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가해자와 함께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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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해 강제 징병되어 희생된 조선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으로 나뉘어져 있다. 분단의 현실은 오키나와에서도 새겨져 있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 징병되어 희생된 조선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으로 나뉘어져 있다. 분단의 현실은 오키나와에서도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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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초석을 지나면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은 우시지마 사령관이 자결한 장소로 우리를 안내한다. 언덕길 양옆에는 일본 본토의 각 현에서 세운 오키나와 전쟁 위령비가 줄지어 서 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듯 규모와 모양이 각양각색이다.

언덕 끝, '여명의 탑'이 석양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이 탑은 오키나와 전쟁 당시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우시지마 중장의 위령탑이다. 우시지마 중장은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자 1945년 6월 23일 오전 4시 30분, 참모장과 함께 이 장소에서 할복자결을 했다.

오키나와 전쟁의 사령관 우시지마가 자결한 곳. 1945년 6월 24일 오전 4시 30분, 동이 틀 무렵으로 탑에는 '여명의 탑'이라고 적혀있다.
 오키나와 전쟁의 사령관 우시지마가 자결한 곳. 1945년 6월 24일 오전 4시 30분, 동이 틀 무렵으로 탑에는 '여명의 탑'이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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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으로 오키나와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사령관이 전투 종결 명령 없이 자결한 탓에 군인과 민간인 희생은 3개월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나도 오키나와의 군병들은 한 달가량 전쟁터를 헤매고 있었다.

결국 평화기념공원은 전쟁 종결의 책임을 방기한 장군이 자살한 곳에 조성된 셈이다. 머릿속에는 '이 공원은 전적 공원 아닌가'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서승 교수는 책 <동아시아 평화기행>을 통해 "이곳을 조선인의 감각으로 보면, 평화기념공원이라고 하기보다 전범기념공원이라고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키나와 전쟁 희생자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이 표현에 공감하지 않을까.

일본의 우경화... 오키나와는 바짝 긴장

평화기념공원에서는 매년 6월 23일 오키나와 전쟁 종전을 기념하는 위령의 날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는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행사다. 처음에는 일본 정부의 주도로 일본 전쟁에 참가한 오키나와 사람들을 기리는 형식으로 열렸다. 그러나 일본 정부 주도 행사를 거부하는 사람이 증가했다. 일왕을 위해 전장으로 내몰렸던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왕제 아래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일까. 일왕은 아직까지 오키나와 땅을 밟지 못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아베 정권의 최근 행보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우경화로 치닫는 아베 정권의 행보가 오키나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상처가 여전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일본 제국주의 부활'은 총이요, 포탄이다.

일본의 미군기지 74%가 오키나와에 집중돼 있다고 한다. 일본이 전쟁을 치르고,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면 전쟁 수행의 전초기지가 될 곳은 오키나와일 것이다. 과거 처참했던 오키나와 전쟁은 재현될 수도 있다. 오키나와에서 '헌법 9조를 지키기' 운동과 '미군기지 반대'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오키나와 기행은 1월 25일~28일까지 겨레하나 여행사업단 '더하기 휴'의 '서승 교수와 떠나는 오키나와 평화감성여행'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태그:#오키나와, #히메유리 탑, #평화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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