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양이를 만나면 반갑게 도망친다. 좋아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 산책 중인 가을 고양이를 만나면 반갑게 도망친다. 좋아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 박혜림

관련사진보기


2013년 2월 7일은 가을이가 내게 온 날이다. 한 해를 넘겼으니 비공식적으로 11살이 된 이봄가을(본명이다)양. 특별한 날이지만, 유난스럽게 잔치를 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맞는 예방 주사를 예약하고 가을이의 건강을 기원했다. 여느 집에선 강아지의 식탐, 장난, 다툼, 분리불안 등이 걱정이겠지만, 가을이 같은 노령견이 있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무조건 건강이다. '부디 지금처럼 건강만 해다오, 가을아!'.

그렇다면 건강을 잃는 것보다 더한 최악의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두 손이 벌벌 떨려오는 상황. 바로 '사라짐'이다. 길에서 반려동물을 한 번이라도 놓쳐본 경험이 있다면 힘이 쭉 빠지고 눈물이 콸콸 솟던 기억에 몸서리를 칠 것이다. 불러도 대답은 없고, 작고 빨라 보이지도 않고, 누군가 발견했더라도 잡히지 않으니 이름표는 무용지물이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전봇대에서 쓸쓸히 나부끼다 발에 짓밟히고 마는 '아이를 찾습니다' 전단지...

길에서 반려동물을 놓쳐본 경험이 있다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더 찾을 수 있다
▲ 거리의 친구들을 위한 누군가의 손길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더 찾을 수 있다
ⓒ 박혜림

관련사진보기


가을이가 사라졌었다. '사라졌다'가 아니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유기견 출신(?)인 가을이에게는 특히 있어선 안 될 미아체험을 본의 아니게 다시 겪게 했다. 지방에 갈 일이 있어 동네 친구에게 가을이의 산책을 부탁한 날이었다(가을이는 나갈 때까지 집에서 배변을 참는다). 친구가 워낙 개를 잘 다루고 가을이와 친분도 있고 하여 집을 오래 비워야 하는 때에 종종 부탁하곤 한다.

사건이 일어난 즈음, 나는 저녁을 배불리 먹고 <진짜 사나이>를 낄낄대며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울리는 불길한 전화벨. 별 일 없으면 문자로 안부를 전할 텐데 전화라니 "왜, 뭐, 왜, 뭐?!" 하는 식으로 전화를 받은 것 같다.

"가을이 어깨줄이 풀려서 골목으로 사라졌어!"
"…넌 지금 어딘데?"
"여기가 어딘지 나도 모르겠어…."

언제부턴가 '고양이'의 연상 단어가 '쓰레기'가 되었다. 슬프다.
▲ 길냥이들 언제부턴가 '고양이'의 연상 단어가 '쓰레기'가 되었다. 슬프다.
ⓒ 박혜림

관련사진보기


친구의 목소리에서 피로와 공포 그리고 미안함이 묻어났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찾으려다가 안 돼 전화했겠지. 가을이를 향한 내 극진한 마음을 아니까 더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 집으로 가봐. 가을이가 집을 알고 있을 거야."

가을이는 '돌아온 래시'가 아님을 알지만, 나는 희망을 품었다. 얼른 차에 시동을 걸고 '진짜 사나이'처럼 시골 길을 내달렸다. 가속 페달을 밟을 때마다 낡은 경차는 요란한 신음 소리를 냈다. 하필이면 저녁시간이라 고속도로에는 정체가 일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교통사고도 연이어 경찰차가 내 앞을 막았다. 당장 이 차를 버리고 저 차를 타고픈 심정이다. 친구의 상황이 궁금했지만, 전화해서 보채 봐야 좋을 게 없으니 애간장만 끓이며 기다렸다.   20여 분이 지나고 드디어 울리는 전화.

"가을이 집 앞에 있네! 근데 달리느라 열쇠를 잃어 버려서 우리 둘 다 집에 못 들어가고 있어."

안도. 웃음. 안쓰러움. 가을이가 해냈구나. 장하다, 가을! 무사히 집에 도착하여 무사한 가을이를 확인하고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보니 조금 의아했다. 나와 평소에 다니던 길인데도 가을이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친구에게 더 가고 싶지 않음을 표했다고 한다. 그래도 조금 더 걷자고 줄을 당기는 찰나에 어깨 줄이 풀려 버렸고 가을이는 차도를 건너(신이시여!) 골목길로 내달린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개는 개다. 가을이가 전속력으로 달리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내 걸음으로 15분 정도 되는 거리를 가을은 걷고 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평소엔 잘 지내던 친구와의 산책을 거부했을까? 집 앞에 앉아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이 녀석은 날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고맙고 딱한 마음이 한없이 일어났다. 강아지에겐 주인밖에, 이 우주에 오직 한 사람밖에 없음을 다시 확인한다. 불의의 사고를 안 당했으니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꿈에서조차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 이제라도 혼자 배회하는 개 때문에 놀라셨을 운전자, 보행자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도 전하고 싶다.

매일 산책 나가지 않았다면 못 돌아왔을 가을이 

작은 생물은 접근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다.
▲ 틈새까지 막은 철조망들 작은 생물은 접근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다.
ⓒ 박혜림

관련사진보기


며칠을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매일 산책하러 나가지 않았다면 가을이의 귀소본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을 것이다. 가을이와 아침, 저녁으로 좁은 골목도 빼놓지 않고 다닌 게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산책하면서 다른 생물들에도 관심을 많이 두게 됐다.

이제 봄이 오면 고양이들의 영역 다투는 소리가 커지고 새들은 조금 더 다사롭게 지저귀겠지. 가을이 덕에 나는 어느새 동네 분들과도 인사를 하며 지내는 사람이 되었다.

이웃과의 인사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요즘 세상엔 그게 참 어렵지 않은가. 그리고 나 외의 작은 것들을 위해 정성을 들이는 아름다운 분들도 알게 됐다. 후미진 곳에서 찾은 길 고양이를 위한 쉼터, 물그릇, 밥그릇.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니며 고양이 밥을 챙기는 여인들. 긴 휘파람으로 친구를 불러 꼭 저녁을 챙겨주는 아주머니.

한쪽에선 날카로운 유리병과 철조망으로 그들의 침입을 막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또 이렇게 행복한 공존을 위해 애쓰고 있다. 그래서 지구 생물은 오늘도 둥글게 둥글게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태그:#가을이, #유기견, #미아체험, #견주, #길냥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