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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별종이 아니라 새소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남에게 전하고 싶은 모든 시민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시민기자' 또는 '뉴스게릴라'라고 부릅니다. 지난 1월 초부터 7주간 <오마이뉴스>기자들과 함께 땀 흘렸던 19기 인턴기자들이 다시 ‘뉴스게릴라’가 되어 각자 묵직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인턴기자가 뛰어든 세상’ 시리즈를 통해 조심스레 세상을 향해 노크해봅니다. [편집자말]
"헌책방 일,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아요. 책방 지저분합니다. 무슨 생각으로 지원한지 모르겠는데, 먼지 때문에 목이 안 좋아질 수 있어요."

서울 송파구에 있는 'ㅈ' 헌책방의 김명헌 사장은 기자의 이력서를 한 번 훑어보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헌책방 아르바이트를 선택했을 때 기자의 솔직한 마음은 이랬다. '인턴기자 마지막 주는 여유롭게 보내야지, 책이나 실컷 읽으면서 말이야.' 하지만 이런 기대는 곧 산산조각 났다. '책 옮기고 찾는 정도'의 업무를 기대했던 기자는 육체적 노동과 함께 복잡한 지적 노동까지 요구받았다.

예를 들어 적정 판매가격을 결정할 줄 아는 시세 판단력, 한 번 봤던 책을 책더미에서 찾아내는 공간인지능력, 그리고 책의 낢음과 훼손 정도를 꼼꼼히 파악하는 섬세함까지... 물론 나는 이것들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일을 시작했다.

책에도 '몸'이 있다

첫날 출근하자마자 배운 것은 책의 '몸'이었다. 책에도 머리, 등, 배가 있었다. 책을 세웠을 때 천장을 향하는 '머리', 책이 꽂혀 있을 때 이름이 세로로 노출되는 '등', 그리고 책의 하얀 페이지들이 드러나 있는 '배' 부분까지. 책의 부위(?)를 배우고 나니 예전에 무심코 손댔던 책들이 조심스러워졌다. 책을 찾을 때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검지로 찬찬히 훑곤 했는데, 그때마다 책의 등을 간지럽힌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책이 떨어질 때 '바닥'이 아니라 '머리'부터 떨어지면 가슴이 덜컥 하기도 했다.

그 다음 배운 것은 헌책의 가격설정 노하우. 헌책방의 매출과 직결되는 부분으로 가장 핵심적인 업무다. 우선 개인이나 중개인에게 값싸게 들여온 헌책들의 상태를 살핀다. 헌책들은 훼손 정도에 따라 네 등급(특급, 상급, 중급, 하급)으로 분류된다.

책상 위 쌓여있는 헌책들이 제 상태에 맞는 등급을 배정 받으면 책장에 꽂힌다. 새책과 같은 '특급' 서적들은 훼손을 막기 위해 비닐에 쌓여 밀봉된다.
▲ 헌책방 사무실 책상 위 쌓여있는 헌책들이 제 상태에 맞는 등급을 배정 받으면 책장에 꽂힌다. 새책과 같은 '특급' 서적들은 훼손을 막기 위해 비닐에 쌓여 밀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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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등급에 따라 가격이 차등적으로 결정되는데, 특급의 경우 고정 가격의 60%, 상급의 경우 40~50%, 중급 30%, 하급 20% 정도다. 수요가 많으면 가격이 오르고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낮아지는 수요 공급의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이 된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품절이나 절판이 되고 중고서적까지 드물다면 그야말로 주인이 '부르는 게 값'이다.

주식의 교본으로 불리던 어떤 서적은 찾는 사람도 많았지만 절판되는 바람에 가격이 20배까지 뛰었다. 새로운 상황이 변수가 되기도 한다. 헌책방이 (운이 좋게도) 200원에 매입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 구판은 권장소비자 가격이 6000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2만5000원에서 3만 원 사이에 거래된다. 법정 스님이 "더 이상 내 책을 찍어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후 값이 뛰었는데, 무소유를 말하는 책을 더 '소유'하려는 난센스한 상황이 된 셈이다.

워낙 베스트셀러인 탓에 인터넷 책방이나 오프라인 헌책방에서도 많이 굴러다니는 책들은 '매력적인 가격'을 제시해야 잘 팔린다. 최저가로 결정해 마진율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소비자에게 가장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이쯤 되면 경제학이 아니라 심리학이다. 인터넷 중고책방에 올라온 수백 권의 헌책들 중에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려면 내가 팔고 싶은 가격이 아니라 상대가 사고 싶은 가격을 써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값이 싸면 싼 대로, 비싸면 비싼 대로 구입하지 않으려는 소비자의 심리를 간파하는 것이 어려웠다.

헌책방에 쌓여있는 '이념서적'들의 운명은?

10여 년 전 대학 국문과 석사과정을 밝던 김명수씨는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인터넷 중고서점을 만들어 자신의 책을 팔았다. 그렇게 4년 동안 별 탈 없이 장사가 되던 차에 2007년 어느 날 국가보안법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된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문학 서적이나 북한 관련 서적 등을 팔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무려 6년 동안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했던 김씨는 지난해 9월 대법원으로부터 결국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이미 많은 걸 잃은 뒤였다.

이른바 '이념서적'이 문제였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북한 관련 책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의심받는 나라다. 1970년대 검찰 수사 매뉴얼에 따르면, 책 서문에 북한이나 주체사상이란 단어가 들어갈 경우 이적표현물로 분류된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헌책방을 뒤져봤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북한 관련 책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의심받는 나라다. 1970년대 검찰 수사메뉴얼에 따르면, 책 서문에 북한이나 주체사상이란 단어가 들어갈 경우 이적표현물로 분류 된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헌책방을 뒤져봤다.
▲ 어둠의 서적들(?) 여전히 대한민국은 북한 관련 책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의심받는 나라다. 1970년대 검찰 수사메뉴얼에 따르면, 책 서문에 북한이나 주체사상이란 단어가 들어갈 경우 이적표현물로 분류 된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헌책방을 뒤져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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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웬 걸. 내란음모죄 등으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과 간부들이 함께 보며 사상교육을 했다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볼셰비키의 혁명사> 등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김명수씨가 팔았던 <북한의 문예이론> <항일혁명문학예술>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책들도 꽤 많았다.

공안당국이 검열할 만큼 위험한 책들은 책방 주인들조차도 쉬쉬하며 낡은 보자기로 둘러싸 구석진 곳에 숨겼으리라는 기자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런 책들은 문예비평이나 사회과학 책이 진열된 책장 한 쪽에 오히려 잘 보이도록 꽂혀 있었다. 다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인지 펼쳤을 때 꿉꿉한 냄새가 났다. 엄청나게 위험하다고 포장된 이 책들은 이제 찾는 손길이 끊긴 채 그저 역사 속에서 잊히는 수많은 책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수백만 원에 거래되는 명문대 졸업생 인명사전

헌책방에서는 은밀한 사랑의 속삭임을 훔쳐보는 쏠쏠한 재미도 경험할 수 있다.

'나는 그대가... 내 옆에 살았으면 좋겠어요. 활짝 핀 레몬나무도, 향기로운 바람도 없지만, 당신과 어스름을 바라보며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싶어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연애 시집 <바람에 레몬나무는 흔들리고>의 첫 장에 누군가 볼펜으로 꼭꼭 눌러 쓴 고백의 메시지다. 그렇게 시집 첫 장이 '연애편지지'로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시집 자체가 공식적인 선물이라면, 파스텔 톤 속지에 적힌 고백의 글귀는 은밀하게 숨겨진 두 번째 선물인 셈이다.

동네 주민인 정선주(39)씨는 가끔씩 옛 정취를 찾아 헌 책방을 찾는다. 누렇게 변한 데다가 오랫동안 눌려 있어 빳빳해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시인이 되길 바랐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되새기곤 한단다. 미로처럼 복잡한 책방을 한참동안 서성이던 그녀는 권당 500~1000원에 팔고 있는 얇고 낡은 시집 10권을 구입했다. 정씨는 요즘도 시집 첫 장에 편지를 써 친구들이나 지인에게 선물로 준다고 한다.

4-5배가 값이 뛴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고가에 팔리는 명문대 인명사전
▲ 헌책방의 '보물' 서적들 4-5배가 값이 뛴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고가에 팔리는 명문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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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졸업생 인명사전(이 사전엔 졸업자의 이름과 나이, 주소 등 개인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다)은 고급 정보수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200만~300만 원 정도의 고가에 꾸준히 팔리고 있다. 왜 헌책방에 내놓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졸업앨범'은 옛 분위기를 연출해야 하는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이 사가기도 한다고.

책값 '후려치는' 손님 거절하지 못하는 까닭은?

경기도 성남시에 살고 있는 박주홍씨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ㅈ' 헌책방까지 찾아왔다. 몇 달 전 소설 <고구려>를 읽은 뒤 저자인 김진명씨에게 푹 빠져 버렸다고 한다. 헌책 더미 속으로 파고든 박씨는 30권에 가까운 김진명씨의 소설책을 찾아와서 새 책 2권 값도 안 되는 3만 원에 팔라고 엄포를 놓았다.

계산을 해보기도 전에 눈대중으로 값을 매겨버린 손님 탓에 김 사장도 난감했다. 매출이 갈수록 줄어드는 탓에 안 팔겠다고 배짱을 부릴 수도 없었다. 결국 원래 받아야 할 값의 절반만 받고 책을 넘겼다. 저렴하게 수십 권의 책을 챙긴 박씨는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양손에 들고 사라졌다.

김명헌 사장은 갈수록 줄어드는 매출 때문에 고민이다. 값을 깎아 달라고 졸라대는 고객을 쉽게 내칠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5~6년 전만 해도 장사가 꽤 괜찮았다. 하지만 알라딘, 교보문고 등 온라인 대형서점이 지역마다 오프라인 헌책방 매장을 내면서 동네주민들의 헌책을 싹쓸이하고 있다.

2006년 온라인을 통해 중고서적을 판매했던 알라딘은 2011년 서울 종로에 첫 오프라인 중고서점을 개장했다. 이후 강남점 등 서울에 4곳, 경기도 4곳, 대구 1곳, 광주 1곳, 울산 1곳으로 거점 지역마다 오프매장을 신설했다.

10여 년 전, 기타 레슨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에 있던 책을 한 두 권씩 팔기 시작하다가 얼떨결에 헌책방을 차리게 됐다는 김명헌 사장. 초반엔 장사가 잘 되어 두 차례나 더 큰 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서점업계의 판도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가면서 그도 새롭게 적응을 해야 했다. 직접 고객이 와서 책을 찾아가는 것보다 온라인을 통해 책을 주문하고 배송 받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김 사장도 온라인 중고숍을 개설했다.

온라인에 등록된 수백 개의 중고숍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자신만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 김 사장의 무기는 '정직함'이다. 김 사장은 책의 색바램이나 줄긋기, 접힘, 필기와 낙서의 수준을 온라인 중고샵에 정확하게 기재할 것을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기자에게도 여러 차례 요구했다. 온라인의 특성상 고객이 책을 직접 둘러보지 못한다는 한계를 외관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우연히 지나치다 이 헌책방을 알게 돼 일 주일에 한 번씩 들른다는 신명자씨는 "헌책방의 책들은 보물과 같다, 뒤지다 보면 너무 좋은 책들을 저렴한 값에 살 수 있다"면서도 "좀 더 보기 쉽게 진열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3일간의 헌책방 아르바이트, 누구에겐 쓸모없는 책이 다른 이에겐 유용한 도구나 보물이 될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체험한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구소라 기자는 <오마이뉴스> 19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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