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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5년 전쯤 라트비아에서 잠시 살았을 때, 현지 친구와 함께 시내를 돌아다닐 일이 있었다. 친구와 난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상점을 찾기도 했고 카페에 들어가 차를 마시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친구에게서 아주 신기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친구는 가는 곳마다 언어를 구별해서 사용했는데, 어떤 상점에선 라트비아어를, 한 카페에 들어가선 러시아어를 했다. 물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묻지도 않고 말이다.

그의 모습이 무척 신기했던 난 그에게 물었다. "여기 자주 오는 곳이야?" 하지만 그는 자신도 처음 방문한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에게 가게 주인이 어디 출신인지 어떻게 알고 각기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인지 묻자 그는 "그냥 보면 안다"는 애매모호한 답을 내놨다. 당시엔 내가 영원히 터득할 수 없는 신공인 것만 같아 그 친구가 부럽기만 했다.

그런데 최근 라트비아 한 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한 달간 살다보니, 그때 그 녀석의 신통력을 어느 정도 습득하게 됐다. 사실 말로 딱 잘라 설명하긴 어려운데, 이 가게가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인지, 이 카페가 라트비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인지는 몇 번 다니다보면 알게 된다. 그곳에서 어떤 언어를 써야할지 느낌이 온다는 이야기다.

라트비아서 태어났는데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 왜?

비시민권자의 여권
 비시민권자의 여권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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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에는 라트비아어 외에는 별도의 공용어가 없어 대외적으론 라트비아어만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생활에서 러시아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따라서 한두 달 놀다가 갈 계획이 아니라면 러시아어 습득은 절대적이다. 이런 모습은 라트비아 사회가 가진 특수성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라트비아에는 라트비아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비시민권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일부는 라트비아에서 태어났음에도 '비시민권자'로 살고 있다. 대다수 나라에서 비시민권자는 법적으로만 존재하거나 소수망명자들에게만 주어지는데 반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선 이들이 사회 구성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2012년 현재 에스토니아에선 전체 인구 중 6.8%를 비시민권자들이 차지하고 라트비아에선 전체 인구 중 13.5%가 비시민권자들이다. 현재 라트비아에 거주하고 있는 러시아인 중 32.9%가 비시민권자로 분류돼 있다. 특히 전체 비시민권자의 65.7%는 러시아인인 것으로 나타났고 우크라이나계와 벨라루스계 등 과거 소련 연방 공화국 출신들과 고려인들도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시민권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제약을 받는다. 우선 관공서에서 일을 할 수 없다. 국가공무원직을 맡을 수 없고 투표도 할 수 없으며 연금 수령과 해외여행에도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 라트비아 국민들이 비자 없이 자유롭게 방문하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비시민권자들은 별도의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더러는 여행을 위해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일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차별을 받는 것일까.

비시민권자들은 라트비아에서 태어났지만 라트비아 국적 취득을 포기하거나 거절당한 사람들이다. 1992년 라트비아가 소련에서 독립한 후 라트비아 시민권법이 제정됐는데, 그 과정에 라트비아가 소련으로 복속되기 전인 1940년 전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그 후손들에게만 자동 시민권을 부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 공화국 시절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부모 중 한 명이 1940년 전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라트비아어와 역사, 문화, 헌법 등에 대한 시험을 치러야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소련공화국 시절, 고학력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은 공업지대와 유통물류가 가장 발달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로 몰려들었다. 1988년 조사 결과 에스토니아의 에스토니아인 비율이 전체 인구 중 61%로 떨어졌고, 라트비아 수도 리가도 60% 이상이 러시아인들로 구성돼 라트비아인들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아무래도 라트비아의 시민권법은 이런 위기감이 작용돼 도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러시아인들 반발에도 '시민권법' 고수하는 라트비아 정부

라트비아에서 활동하는 러시아인 인권단체에서 미 대사관에 보낸 힐러리 클린턴의 비시민권자 여권
 라트비아에서 활동하는 러시아인 인권단체에서 미 대사관에 보낸 힐러리 클린턴의 비시민권자 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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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많은 러시아인들이 라트비아의 시민권법에 반대했다. 라트비아에 살고 있었던 러시아인들 중 대부분은 라트비아를 고향으로 여겼고 소련 시절에도 라트비아어 교육이 이뤄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라트비아어를 익힐 수 있었으므로 라트비아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라트비아 태생 러시아인들 상당수는 소련의 압제에 반감을 가지며 라트비아 독립운동 당시 열성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트비아 태생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시민법이 자신들을 차별하고 있다며 시민권 취득을 거부했고 결국 국적 없는 비시민권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러시아 정부는 물론 국제 인권단체들은 '러시아인들이 부당한 차별을 당하고 있다'며 라트비아 정부에 수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라트비아 정부는 시민권 취득을 위한 나이 제한을 없애고 1991년 이후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모의 국적을 불문하고 시민권을 받을 수 있도록 개정하는 것 외엔 여전히 예전 시민권법을 고수하고 있다.

라트비아의 러시아인 인권운동가들은 비시민권 제도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2012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부부와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이름으로 비시민권자 여권을 만들어 라트비아 주재 미국 대사관에 발송하는 퍼포먼스를 벌여 관심을 끌기도 했다.

라트비아 독립 직후인 1991년에는 전체 인구 중 약 35%에 이르는 71만 5000명이 비시민권자로 분류되었으나 지난 2011년에는 약 29만 명(14.1%)으로 줄었다. 2005년 유럽연합 가입과 솅겐조약 체결 후 유럽 내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라트비아의 국가적 위치가 점차 올라가면서 더 많은 이들이 국적 취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병역이 의무였던 2006년까지는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것이 병역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이마저도 사라졌다.

이들이 라트비아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는 이유

한편 리가 시청 등 관공서에서 비시민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라트비아어 무료강좌를 개설하는 등 사회적 통합을 위한 다양한 노력도 있어 왔다. 이런 노력 덕분에 시내에서 라트비아어를 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던 1990년대 중반과 비교했을 때 상황은 훨씬 나아졌다. 현재는 해외진출과 여행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은 대부분 라트비아에서 지정하는 시험을 치르고 국적을 획득한다. 반면 국내 정치나 해외여행 등에 관심이 적거나 새로운 언어 습득에 자신이 없는 중·노년층에는 비시민권자의 비율이 아직 높다.

인터뷰에 응한 무라스콥스키씨와 그의 딸 옐레나. 그의 식구들은 가정에서 모두 러시아어로 이야기한다.
 인터뷰에 응한 무라스콥스키씨와 그의 딸 옐레나. 그의 식구들은 가정에서 모두 러시아어로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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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라트비아 난방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뱌체슬라브 무라스콥스키씨는 1954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났으나 여전히 비시민권자로 살고 있다. 그의 부인이 라트비아 현지인이어서 1991년 이전에 태어난 그의 두 딸은 자동으로 라트비아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라스콥스키씨는 물론 그의 일가친척들 중에도 라트비아 국적 취득을 원치 않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라트비아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은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자신과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의 경우, 굳이 어려운 시험을 보면서까지 귀화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무라스콥스키씨는 "나는 라트비아 국내 정치에 관심이 거의 없어서 선거나 국민투표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면서 "해외여행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직장 내 동료들과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라트비아어 구사가 가능하다"면서 "라트비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 고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의 구분은 단지 정치적 차원의 문제일 뿐 내 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별 탈 없이 잘 지낸다는 그에게도 불만은 있었다. 그는 "태어나서 줄곧 살아온 이 나라가 나에게 국적 주는 걸 거부한단 사실을 납득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듯 모든 부분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비시민권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라트비아 정부에는 시민권자들과 똑같은 수준의 세금을 내고 있다.

역사, 언어, 문화 등에 관련한 시험을 치르는 것은 라트비아뿐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귀화제도다. 하지만 비시민권자들은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자동으로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 중에도 역사와 문화에 무지한 이들이 많은데 그것을 자신들에게만 요구하는 건 문제라고 강조했다. 특히 시험에서 탈락하는 이들 중에는 지식수준과 상관없이 문법이나 맞춤법 등 쓰기와 관련된 문제에서 점수를 받지 못해 탈락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는 것. 때문에 일각에선 이 시험이 시민권을 부여하는데 정말 필요한 것이 맞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물론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라트비아 출신 러시아인들 대부분이 귀화시험을 치르고 있으니, 세대교체가 이뤄지면 비시민권자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통 없이 단지 문제를 풀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만 달달 외우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라트비아의 사례는 점차 다민족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대한민국이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기도 하다.


태그:#라트비아, #시민권, #에일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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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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