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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자진 퇴거 만료일에 유토피아 단지 거주 주민들을 지지하기 위해 집회에 모인 사람들.
 지난 15일, 자진 퇴거 만료일에 유토피아 단지 거주 주민들을 지지하기 위해 집회에 모인 사람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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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오후 8시께, 스페인 남부 세비야시 북쪽 산 헤로니모 지역에 위치한 한 건물로 앞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어느새 건물 앞 공터를 가득 메울 정도로 늘어났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특별한 구호를 외치지도, 그 흔한 깃발 하나도 들지 않았다. 다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삼삼오오 모여 뭔가에 대해 열심히 토론했다.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분주했다.

500여 명의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인 건물 벽에는 스페인 헌법 47조항인 '스페인 국민 모두는 적절하고 알맞은 주택을 가질 권리가 있다'란 문구와 이 문구를 불로 태우려고 하며 웃고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물도, 전기도, 그리고 두려움도 없다, 이곳이 우리의 집이다', '점거와 저항, 유토피아는 가능하다'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들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다.

오후 10시가 다 되어갈 무렵, 건물 아래층에 위치한 '유토피아 공동체'라고 적혀 있는 쪽문이 열리고, 이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들은 "이렇게 늦은 시간 우리를 지지하기 위해 모여주어 감사하다"라고 말했고, 공터 앞에 모인 이들은 "그렇다! 우린 할 수 있다!(Si! se puede)"라는 말로 화답했다.

'유토피아 공동체'라 불리는 이 건물은 36가구 70여 명의 사람들이 2년 동안 점거해온 곳이다. 이 건물은 2010년 스페인 은행인 이베르카하의 투자로 건축을 완료됐으나, 분양이 되지 않아 비어있었다. 2012년 5월 현 주민들은 이곳을 점거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을 점거중인 사람들은 대부분 은행에서 주택을 담보로 장기 대출을 받은 뒤 제때 상환하지 못해, 은행에 의해 주택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2011년 5월 15일 시작된, '15M(5월15일 마드리드 도심 점거운동)'라 불리는 스페인 대규모 시민 저항운동의 중심이 됐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스페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점거 운동'

점거 건물 외부에는 '미래는 우리의 것', '국민의 평화 없이 정부의 평화도 없다"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점거 건물 외부에는 '미래는 우리의 것', '국민의 평화 없이 정부의 평화도 없다"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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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물도, 전기도 없다. 매일 건물 근처 수도에서 물을 떠다 나르고, 발전기를 통해 최소한의 전기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점거 당시부터 2년간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아마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이런 삶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인간 존엄에 대한 의지를 뺏지는 못한다."

15M 시민운동 당시 성난 시민들 중 한 명이었던 토니(44·여)는 14살짜리 아들과 이 점거 단지에 살고 있다. 집이 없어 아들과 차 안에서 생활해야 했던 그녀에게 이곳은 최후의 희망과도 같은 곳이다.

점거단지 주민들은 합법적으로 이곳을 이용하기 위해 은행측과 협상을 해왔으나,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지난 1월 30일 거주민들에게 퇴거명령을 내렸다. 자진 퇴거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15일 밤, 이 점거운동을 지지하는 많은 시민들이 주민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후안 마누엘 (27·남)은 "현재 스페인 곳곳에 이런 미분양 주택 점거를 통해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빈 집이 늘어가는데, 집 없는 사람도 늘어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라고 말했다.

"스페인 주택 문제에 대한 저항이자 상징적 싸움"

점거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단순히 '점거'의 개념이 아닌 스페인의 주택문제에 대한 저항이며 해결책 모색을 위한 하나의 상징적 싸움"이라며 "집 없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사람 없는 집이 존재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집 없는 사람도, 사람 없는 집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택 담보 대출 피해자 연합(PAH-Plataforma de Afectados por la Hipoteca) 세비야 지부에 따르면, 세비야시에만 11만4000여 개의 빈 건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최근 2년 사이 6000여 가정이 집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비단 세비야시만의 문제는 아니다. 스페인 전역을 집어삼킨 경제위기로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해 은행에 의해 강제로 퇴거 조치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로 인해 빈집과 집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페인 전역에 미분양 주택이나 빈집을 점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이런 행동은 나날이 심각해지는 스페인 주거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찾는, 하나의 운동 형태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1월에도 마드리드의 산 파블로 지역에 위치한 은행 소유 미분양 건물을 11가구가 점거했다. 최근엔 마드리드에만 총 15곳의 점거 건물이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점거 운동에 대한 스페인 정치권의 목소리도 엇갈리고 있다. 현 정부는 점거 운동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좌파 연합(IU) 대변인은 스페인 정부 방침에 반대한다고 밝히며 "이 건물은 점거 건물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그 안에 아이들, 노인들, 아픈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점거 운동을 단순히 표면적 현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도적 입장에서 봐야한다고 강조하며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스페인 주택 문제에 대한 대안 모색을 요구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지붕 있는 집일 뿐인데..."

집을 잃은 사람들이 2년째 점거중인 스페인 세비야시의 한 건물. 점거한 이들은 이 단지의 이름을 '유토피아 공동체'라 지었다.
 집을 잃은 사람들이 2년째 점거중인 스페인 세비야시의 한 건물. 점거한 이들은 이 단지의 이름을 '유토피아 공동체'라 지었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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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의 어머니이며 유토피아의 주민인 엘레나(39·여)는 "아래층 현관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떨린다"면서 "우리를 내쫓으러 온 누군가가 아닐까하는 두려움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창문을 통해 거리를 바라보다가 '아이들과 또 어디로 가야하나'란 생각에 막막해지기도 한다"며 "우리가 원하는 건 지붕 있는 곳에서 자는 것뿐인데,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가"라고 안타까워했다.

토니 또한 "일을 해서 매달 집세를 낼 수 있는 돈을 벌고, 거기에 휴가를 보낼 수 있는 약간의 돈을 모을 수 있는 삶이라면 충분하다, 그것이 전부다"라고 말했다.

한편 현재 법원은 유토피아 주민들에게 5일간의 유예기간을 더 주었고, 주민들은 그 기간 동안 대화를 통한 긍정적인 협의점을 찾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이곳을 '유토피아'라고 이름 붙였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꿈이 있고,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곳까지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 벽을 둘러싼 무수한 글귀들 속의 유토피아가 아닌, 소박한 일상의 흔적들이 건물을 따뜻하게 두른, 유토피아의 길이 보이는 공간을 어느 날 이곳에서 보게 될까. 그러길 바란다.


태그:#유토피아,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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