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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진 신념은 무엇인가. 그것이 출세가도를 달리기 위한 것이든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 위한 것이든, 혹은 평범한 가정을 꾸리기 위한 것이든 그 신념의 밑바닥에는 '돈'이라는 자본에의 욕망이 자리해있다. 잘 먹고 잘 사는 '평범한 삶'의 기준이 돈으로 수치화됐기 때문이다.

마리온과 톰, 캐서린과 어윈은 이사벨의 신념을 위선이라 몰아세우며 갖은 비난과 증오를 퍼부어댄다.
 마리온과 톰, 캐서린과 어윈은 이사벨의 신념을 위선이라 몰아세우며 갖은 비난과 증오를 퍼부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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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대의 도래는 '잘 사는 삶'에 대한 신념을 돈에 대한 믿음으로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불안정한 삶은, 뚜렷한 경제활동(정기적을 넘어 장기적으로 보장된 급여)이 없거나 손익을 떠나 다만 좋아서 하는 일 따위의, 그 무엇도 보장되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확실한 미래로 단정지어졌고 피해야할 삶으로 낙인찍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을 좇았고 그것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최고의 삶임을 화려하게 과시했다. 돈 자체가 신념으로 진화해버린 셈이다.

작금의 현실에서 그들의 삶은 대다수의 꿈이자 마땅히 걸어가야 할 이상향으로 취급된다. 돈을 좇는 삶이 신념으로 변모하면서 탐욕을 일종의 건강한 경쟁이자 정당한 수단으로 교묘히 탈바꿈시킨 탓이다. 이러한 시대에 이사벨의 신념은 신념이라기 보단 고집스런 괴팍함이자 전근대적 유물이다.

수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녀의 사업체나 아버지로부터 떠넘겨진 캐서린을 포용하는 이사벨의 행위는,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언니 마리온이나 면죄부 교리로 신을 섬기는 형부 톰에 이어 자본의 신념에 서서히 잠식당하는 연인 어윈의 눈에, 도를 넘어선 위선으로 보일 따름이다.

이사벨은 최후의 보루였던 어윈에게마저 배반당하며 그들의 강압적 신념에 압사당한다.
 이사벨은 최후의 보루였던 어윈에게마저 배반당하며 그들의 강압적 신념에 압사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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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이 그녀의 신념을 위선이라 몰아세우며 갖은 비난과 증오를 퍼부어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그녀의 신념이 잘못된 것이라고 닦달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야 그들이 믿어온 신념이 지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신념에는 커다란 맹점이 있다.

그 신념은 주체적 진실에 대한 믿음(태도)이 아닌, 일반화된 권위(돈)에 대한 믿음이자 확신인 까닭이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그들의 신념은 "그 신념을 전파하고 지키는 사람들의 권력이 확고부동해 보이기 때문에 믿어지는 방식"에 가깝다. 본디 그것은 "하나의 규모가 큰 집단에 가입하기 위한 입회증이며,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을 내리는 어려운 일을 면제해주는 면죄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신념은 그들의 신념 아닌 신념과 사사건건 대립을 불러일으키며 예정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마리온과 톰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내어주어야만 했던 이사벨은 최후의 보루였던 어윈에게마저 배반당하며 그들의 강압적 신념에 압사당한다. 사력을 다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이사벨에게 남겨진 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날 선 증오, 그리고 죽음뿐이다.

그러나 죽음을 담보로 그녀는 결국 자신의 신념을 지켜낼 수 있었다. 마리온으로 상징되는,  자본에 잠식당한 모든 이들이 그녀로부터 빼앗고자 했던 단 하나의 신념은 이제 완전한 자유와 함께 고결하고 거룩한 이상으로 다시금 그들 앞에, 우리의 앞에 마주선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신념은 무사하냐고. 아니, 당신에겐 아직 신념이란 게 남아있느냐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공감"에도 게재된 기사입니다.



태그:#추상미, #이명행, #은밀한 기쁨, #데이비드 헤어, #문화공감 박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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