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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종택
 농암 종택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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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천리에서 가송리로 이전된 농암 종택

점심을 먹은 우리는 농암 종택으로 향한다. 농암 종택은 현재 가송리에 있다. 그러나 농암 종택의 원래 위치는 도산면 분천리 분강 마을이다.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분강 마을이 수몰됐고, 이곳에 있던 건물들은 마을 뒷산 또는 가까운 운곡리 등으로 이전됐다. 그 후 24년이 지난 1998년, 농암의 후손들이 이들 유적과 문화유산을 한 군데로 모아 복원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2001년 종손인 이성원을 중심으로 이전 복원 기본계획이 세워졌고, 2003년 안채와 사랑채, 긍구당(肯構堂)과 사당이 먼저 이전됐다. 2004년에는 대문채와 별채가 지어졌고, 2005년에는 분강서원(汾江書院)이 도산면 운곡리에서 이곳 가송리로 이전됐다. 2006년에는 애일당(愛日堂), 농암각자, 신도비 등 건물과 문화재가 이전됐다. 그리고 명농당(明農堂)과 강각江閣)이 복원됐다. 이곳에는 또한 유물전시관이 지어질 예정인데, 아직 계획을 실현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농암 종택 건물배치도
 농암 종택 건물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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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현재 농암 종택 영역, 분강서원 영역, 애일당과 강각 그리고 농암각자 영역으로 나눠진다. 농암 종택은 다시 안채, 사랑채, 사당, 긍구당과 별채를 포함하는 본채, 별도의 담을 가진 명농당으로 양분된다. 동남방에 있는 대문채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앞으로 긍구당이 있다.

우리는 사랑채, 안채, 긍구당, 명농당 순으로 농암 종택을 살펴본다. 사랑채는 현재 고택체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선지 마루에 가지런하게 갠 이불이 놓여있다. 마루 위 벽에는 선조(宣祖)가 내린 어필이 걸려 있다. 적선(積善)이라고 썼으며, 가로 세로가 각각 1m나 된다. 이것은 농암의 아들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이 왕자사부를 할 때 받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안채도 잠깐 살펴본다, 그렇지만 내실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는 없다.

긍구당과 명농당, 당호가 정말 어렵구나

ㄴ자형의 긍구당
 ㄴ자형의 긍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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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를 나온 나는 바깥마당에 있는 독특한 건물 긍구당으로 간다. 긍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ㄴ자형 건물이다, 규모가 크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정면에 난간마루를 두어 여유와 운치를 느끼게 한다. 긍구당은 조선 중후기 건물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3년 경북 유형문화재 제32호가 됐다.

긍구라는 당호는<서경> '대고'(大誥)편에 나오는 단어를 사용했다. '집터를 닦지 않고, 어찌 집을 얽어맬 수 있겠는가?(不肯堂 矧肯構)'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긍구당이라는 편액 글씨가 아주 특이하다. 요즘 말하는 타이포그라피의 새로운 경지다. 이것은 상주목사를 지낸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이 썼다. 그렇다면 농암 생전에 이 현판이 붙어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독특한 글씨의 긍구당 편액
 독특한 글씨의 긍구당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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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은 1467년 이곳 긍구당에서 태어나고 1555년 긍구당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암은 1510년 영천군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명농당을 짓는다. 그리고 1512년 부모를 위해 애일당을 짓는다. 그렇지만 새로 지은 이 두 건물보다 그는 긍구당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 같다. 긍구당을 다음과 같이 시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농당이 내 몸을 위한 것이라면       明農爲其身
애일당은 부모님을 위한 것이다.       愛日爲其親
하지만 어찌 이 긍구당만 하겠는가?  豈若此高堂
나도 위하고 부모님도 위하는.          爲身兼爲親

명농당
 명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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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농당은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왜냐하면 명농이 '농사에 힘쓴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명농당 벽에는 귀거래도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농암은 밀양부사로 있던 1514년 겨울에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 '명농당'이라는 시 한 수를 써 붙인다. 여기서 그는 집만 지어 놓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현재 걸려 있는 명농당이라는 편액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글씨다. 

용수산 남쪽 분수골 자락에                  龍壽山前汾水隅
노후용 집 지음은 다 뜻이 있었는데       菟裘新築計非無
10년 벼슬살이로 머리털만 희어지니      東華十載霜侵鬢
쓸데없이 벽에 귀거래도만 그려놓았네.  滿壁虛成歸去圖

가사를 통해 보여준 안빈낙도의 삶

효빈가 편액
 효빈가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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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농암의 소원이 이뤄지는 것은 76세가 되는 1542년 가을이다. 그는 모든 인연을 떨치고 성문을 나와 한강에 이르러 배를 탄다. 술에 취해 뱃전에 누우니 동산에 달 오르고 산들바람 불어온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한 구절을 읊으니 흥에 겨워 저절로 미소가 생겨난다. 그리고는 <귀거래사>를 따라 <효빈가>(效嚬歌)를 짓는다. <효빈가>는 '흉내낸 노래'라는 뜻이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긍구당에서 바라 본 낙동강 풍경
 긍구당에서 바라 본 낙동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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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년 그는 또한 농부로 어부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가사로 표현했다. 이것이 유명한 <어부가>(漁父歌)다. 어부가는 고려말부터 불려오던 시가로 농암에 의해 개작됐고, 고산 윤선도에 의해 문학성이 더 풍부해졌다. 농암의 어부가는 두 종류다. 한자가 많이 들어간 장가(長歌)와 상대적으로 한글이 많은 단가(短歌)다. 장가는 9장으로 돼 있고, 단가는 5장으로 돼 있다. 그중 시조창 형태로 불리고 있는 <어부단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듕에 시름 업스니 어부(漁父)의 생애이로다
일엽편주(一葉扁舟)를 만경파(萬頃波)에 띄워 두고
인세(人世)를 다 니젯거니 날 가난 주를 알랴
(이 중에 근심걱정 없으니 어부의 생활이 최고로다.
조그마한 쪽배를 파도치는 물결 위에 띄워 두고
세상사를 다 잊었으니 세월 가는 줄을 어찌 알랴.)

농암 종택의 사랑채
 농암 종택의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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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長安)을 도라보니 북궐(北闕)이 천리(千里)로다
어주(漁舟)에 누어신달 니즌 스치 이시랴
두어라 내시람 아니라 제세현(濟世賢)이 업스랴
(한양 땅을 돌아보니 북쪽 궁궐이 천리로구나.
고깃배에 누워 있은들 잊을 수가 있으랴.
두어라, 내가 아니더라도 세상을 구할 현인이 없을 소냐.)

선조가 내린 어필 '적선'
 선조가 내린 어필 '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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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은 이처럼 고기도 잡고 향음주례(鄕飮酒禮)도 하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그는 <효빈가> <어부가> 외에 <농암가>(聾巖歌)도 짓고 <생일가>(生日歌)도 지었다. 농암가에서 그는 산천의 의연(依然)함을 노래했다. 그리고 80대에 이른 생일에 생일가를 지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천수를 누림이 임금님 은혜 때문이라고 했다. 이게 그 시대의 한계다.

농암은 이처럼 고향인 분강에서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으며 살다 1555년 6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8월 가까운 도곡리(道谷里) 선영에 묻혔다. 9월에 명종이 제문을 내렸고, 이듬 해 퇴계가 농암의 행장을 지었다. 1557년에는 그의 효성을 기려 효절(孝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566년에는 홍섬(洪暹)이 효절공 신도비를 찬했고, 그것이 지금 분강서원 옆에 있다.


태그:#농암 종택, #도산면 분천리, #도산면 가송리, #긍구당과 명농당, #어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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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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