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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철인 요즘, 스페인 남부 세비야 거리에는 오렌지 향기와 오렌지 열매가 가득하다.
 오렌지철인 요즘, 스페인 남부 세비야 거리에는 오렌지 향기와 오렌지 열매가 가득하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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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남부 세비야에 처음 왔을 때,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사람도, 음식도 아닌 도심 가로수였다. 마트나 시장에서 봐왔던, 보기만 해도 새콤함과 달콤함이 느껴지는 그 오렌지가 푸른빛을 띤 채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분명 눈으론 오렌지를 보고 있었지만, 신기한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로수에 매달린 오렌지가 노랗게 익어갈 즈음, "가로수에 달린 열매를 따먹어도 되냐"는 내 질문에 친구는 "먹어도 잡아가진 않는다"는 모호한 답을 했다. 난 그 말을 믿고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오렌지를 슬쩍 하나 딴 뒤 까서 입안에 넣었다. 하지만 이내 내 선택이 옳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됐다. 가로수에 매달린 오렌지는 우리가 흔히 먹던 새콤달콤한 오렌지가 아니라, 쓴맛의 오렌지(Naranja amarga)였기 때문이다. 사실 난 쓴 맛을 내는 오렌지 종류가 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따뜻한 봄이 오면 아사르(Azahar)라고 부르는 오렌지 꽃이 달콤한 향을 뿜어내, 온 도시를 감싼다. 이 오렌지 꽃과 향기는 세비야의 대표적 봄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고 오렌지 수확철인 요즘은 노란 오렌지들이 거리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보다 더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가로수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 법도 한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그 '낭만'에 버금가는 '애로사항'이 있다.

항상 이맘때가 되면 지역 신문에 오렌지 수거와 관련된 기사가 난다. 그리고 각 거리엔 오렌지 수거에 대한 알림 공고가 붙는다. 올해도 최근 한 달 동안 수거한 오렌지가 500톤이며 3월 중순까지 어떻게 오렌지를 수거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담은 기사도 실렸다.

가로수에 매달린 오렌지들은 아름답지만, 도로는 '엉망'

길에 떨어져 터지고 뭉개진 오렌지들...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길에 떨어져 터지고 뭉개진 오렌지들...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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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내 총 11구역에 있는 오렌지 가로수는 무려 3만1306그루나 된다고 한다. 그러니 나무에 열리는 오렌지 양도 어마어마하다. 농가 수확용 나무가 아니다 보니, 가지치기를 할 리도 없어 나무 한 그루에 열리는 오렌지 양도 수확용 나무에 비해 훨씬 많은 편이다.

이 시기, 오렌지 나무는 향긋한 냄새를 선물하는 '도시의 멋'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도시의 '골칫거리'가 된다. 바로 나무에서 떨어진 오렌지들이 터져 거리가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도심 여기저기에 떨어져 뭉개진 오렌지들로 엉망이 된 도로들은 멋들어진 가로수의 풍경 아래 또 다른 풍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매년 이맘때면 시와 각 관할지구, 용역업체가 동원되어 2개월여 동안 대규모 오렌지 수거 프로젝트를 벌인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 연례행사를 두고 '눈에 보이는 곳만 수거한다'는 불만을 터트리기도 하고, '수거에 많은 예산이 들지만 수거된 오렌지가 그만큼의 경제적 효과를 올리지 못해 노동력과 재정 낭비'라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수거된 오렌지는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쓴맛이 나는 오렌지니 시장에 내놓는다고 해도 팔릴 리 없다. 그렇다고 모두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민들이 이런 우려를 할 것이라 예상이라도 했던 걸까? 오렌지 수거 계획 기사와 함께 실리는 것이 오렌지의 사용처를 알려주는 기사들이다. 기사에 따르면 수거된 오렌지 대부분은 선별작업을 통해 오렌지잼을 만드는 영국 공장들로 수출된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는 세비야의 대표 진(술)을 만드는 회사가 구입해 세비야 사람들이 즐거 마시는 진으로 생산한다. 최근에는 폭죽을 만드는 재료로 오렌지가 사용되기도 한다고 하고, 일부 화학제품의 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물론, 수출과 재가공에 따른 경제적 이익은 그렇게 크지 않은 상징적 수치라고 한다. 가로수 오렌지가 여러 곳에 사용된다고 알리는 것에는 '가로수 오렌지가 그저 버려지는 쓰레기가 아니라'는 점을 시민들에게 인식시키고 싶어 하는 시의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잠시의 불편함 때문에 홀대 받는 오렌지 나무, 안타깝다

스페인 세비야 가로수는 오렌지 나무다. 하지만 오렌지 열매가 떨어지고 뭉개져 도로를 더럽힌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가 돼 버렸다.
 스페인 세비야 가로수는 오렌지 나무다. 하지만 오렌지 열매가 떨어지고 뭉개져 도로를 더럽힌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가 돼 버렸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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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시의 가로수는 오랫동안 도시의 풍경과 함께하며 도시의 이미지가 됨과 동시에 도시의 공기를 정화하는 고마운 동반자다. 그런데 조금의 불편함 때문에 홀대를 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에서도 은행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 때면, 예쁘다면서 앞 다퉈 사진을 찍다가도 은행나무 열매가 땅에 떨어져 고약한 냄새를 풍길 때면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지 않나.

최근 보도된 오렌지 수거 관련 기사에 댓글을 단 한 시민은 "좁은 골목들과 주요 역사지구의 경우 오렌지 나무를 보존해야겠지만, 그 외 대로변이나 외곽지구는 다른 가로수로 대체하는 걸 고려해야 한다"면서 "특히 세비야는 더운 도시니, 그늘이 될 만한 가로수로 대체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세비야에 산 지 8년이 된 이레네(여·러시아)는 "세비야에 와서 제일 처음 찍은 사진이 오렌지 나무 아래에서 찍은 독사진"이라며 "매년 이맘때 보는 세비야 풍경이 아직도 가장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과연 모든 이들의 욕구를 충족하는 알맞은 도시 가로수가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단지 도시와 공생하는 가로수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한동안 도시의 미관을 조금 해칠지라도 툭! 떨어지는 오렌지 소리가 여전히 도시를 멋스럽게 만들어주니 말이다.


태그:#스페인, #세비야, #오렌지나무, #가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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