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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재벌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들인지 아는가? 기름 값을 올려 받기 위해, 자기네 유조선들을 미국 영해 안과 밖으로 그때그때 이동시키는 파렴치한 행위도 마다 하지 않는 인간들이다."

조지아 주 한 시골마을의 모텔 겸 사설 야영장에서였다. 60세 안팎으로 보였던 지배인은, 초면의 외국인인 내 앞에서 석유 재벌들과 부시 미국 대통령 부자가 한통속이라며 그들을 신랄하게 공격해 댔다.

그는 7달러인가 했던 야영장 비용은 계산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나는 카운터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대략 10분간 그에게 붙들려 있어야 했다. 그는 연설의 대부분을 미국 공화당과 보수주의자들을 비난하는데 할애 했다. 그의 말 가운데는 그럴듯한 것도 있었고, 믿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한번씩 끄덕이며, 중간중간 그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줄 수 밖에 없었다. 속으로 '킥킥'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말이다. 자꾸 웃음이 나오려 한 것은, 그 지배인 말고도 이전에 공화당과 보수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미국 도처에서 익히 봐왔기 때문이었다. 늙수구레한 그 지배인 남자의 행동거지가 마치 재방송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오래 감지 않아 떡이 되다시피 한 머리, 솔솔 풍겨나는 퀴퀴한 몸 냄새, 낡디 낡은 옷을 걸친 차림새 등으로 인해 그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이미 반쯤은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게다가 나는 외국인이었다. 아무리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일상적으로 대하는 모텔 및 야영장 매니저라 하더라도, 그가 나 같은 사람을 자주 봤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인종 차이에 따른 경계심이나 거리 의식 같은 게 거의 없었다. 또 하나, 정처 없이, 기한도 정하지 않고 대륙을 떠돌아 다니는 나 같은 방식의 여행에 대해 "우와~, 챙, 나도 너처럼 해보고 싶은데" 하며 호기심과 함께 부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여행에도 진보가 있고, 보수가 있다고 하면, 뼛속까지 못된 정치의식에 절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선거 때면 어김없이 진보와 보수가 딱 절반씩으로 갈리는 미국 땅을 싸돌아 다니면서, 여행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대충 공화당 쪽인지 민주당 쪽인지를 구분해 낼 수 있음을 체험했다.

아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텍사스의 크로포드(Crawford)를 찾았을 때였다. 동네 관광센터에 들르니, 70세 안팎으로 보이는 백인 할머니 한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크로포드는 인구가 1000명도 훨씬 못 미치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 백인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만든 일종의 사설 '부시 기념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방명록에 서명할 것을 내게 권했다. 이라크 전쟁이 치열했던 시점으로, 방명록을 몇 장 넘겨봤는데 한국인의 이름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인, 필리핀인 등 아시아 출신으로 짐작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내가 처음 보는 아시아 인은 분명 아니었을 터인데, 그 할머니의 눈빛에서는 가벼운 경계 의식 같은 게 느껴졌다.

잠깐 얘기를 나눠보니, 그는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로 부시가 주도한 중동 전쟁에서 수없이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걸 알면서도 그를 옹호하는 보수파였다. 미국인들 기준으로도 집시 스타일의 내 여행방식은 보기 흔치 않은 일인데, 그 할머니는 일체 관심 같은 걸 드러내지 않았다.

칼로 두부 모를 자르듯, 보수와 진보를 명쾌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여행방식과 인종을 묶어 진보와 보수를 판단하는 잣대로 활용한다면, 그 자체로 어불성설일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잘들 생각해 보시라.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사람이 한국에 와서 거지 행색을 하고 6개월이고, 7개월이고 차를 몰며 전국을 떠돌아 다닌다면, 어떻게 볼 것인지. 또 그 사람을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나만의 막연한 짐작이기는 한데, 개개인의 정치 스펙트럼이 십중팔구는 드러날 것 같다. 극단적인 보수에서 극단적인 진보에 이르기까지. 일상을 물리치고 떠나는 여행마저도 정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최소한 미국 땅에서는 그랬다.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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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주의 한 시골마을 모텔 및 야영장 지배인. 부시 대통령과 석유재벌들을 싸잡아 신랄하게 비난했다. 텍사스의 오지에서 청소년 극기훈련을 지도하는 한 남성이 일과를 메모하고 있다(오른쪽 위). 자연 속에 파묻혀 살고 싶어서 오지의 국립공원만 전전하고 있다는 한 레인저.(오른쪽 아래) 극기훈련 지도 남성과 레인저는 대체로 진보파 성향이었다.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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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의 사저가 있는 크로포드의 방문센터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왼쪽). 부시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크로포드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던 남성(오른쪽 위). 캔자스의 시골 마을에서 만난 고등학생(오른쪽 아래). 할머니와 카센터 남성은 공화당 지지자임을 밝혔다. 고등학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보수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부시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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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크로포드 표지판.(위 왼쪽) 인구(POP)가 705명이라고 쓰여 있다. 표지판에 사저 근처에는 차를 세울 수 없다는 경고문이 쓰여 있다. (위 오른쪽). 정문에서 바라 본 부시 전 대통령이 사저가 있는 랜치. 저지대여서 바깥에서 제대로 들여다 보기 어려웠다. 이 랜치는 부시가 외국 정상들을 초빙해 회담을 가진 곳으로도 유명하다.

나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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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자스의 한 들판 초겨울 풍경.(위) 보수와 진보로 갈린 미국의 정치 지형을 보는 듯 하다. 부시 대통령을 지지하는 광고와 조형물. (아래 왼쪽). 부시 전 대통령의 사저 근처에 세워진 반전 시위대의 캠프 입구. (아래 오른쪽) 부시 대통령이 국민을 속이며, 미국 젊은이들의 희생을 불러오고 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덧붙이는 글 | 세종시 닷넷(sejongsee.net)에도 실렸습니다. 세종시 닷넷은 세종시에 관한 정보와 소식을 담은 커뮤니티 포털입니다.



태그:#여행, #보수,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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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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