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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하루전인 1월 30일 전을 부치고 있다. 명절 음식도 자꾸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긴다.
 설 하루전인 1월 3일 전을 부치고 있다. 명절 음식도 자꾸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긴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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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나 제사 날짜가 다가오면 살짝 두려움이 엄습한다.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음식 만드는 것은 둘째치고 산더미처럼 쌓이는 설거지가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명절을 전후해 언론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있다. '기획'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쏟아지는 '주부 명절 증후군'에 대한 분석기사들이다.

하지만 내 경우엔 '주부'를 빼야 할 것 같다. 우리 집은 십수 년간 명절이나 제사 때 음식장만 등의 일거리를 부부가 반반씩 나눠 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성질 급한 내가 전체 일거리 중 60~70%를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집사람이 묘하게 그 시점에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면 두려움은 더 커진다. 명절이 두려워지는 이유다.

명절 음식, 자꾸 만들다 보니 노하우가 생기네

설을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오후 2시부터 거실에 판을 폈다. 이미 한 시간에 걸쳐 여러가지 종류로 부칠 전의 재료들을 준비한 상태다. 이 상태에서 신문지를 2~3겹의 두께로 해서 한 평 정도의 넓이로 거실바닥에 깔아준다. 전을 부칠 때 기름이 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어 준비된 재료들로 각종 전을 굽는데, 우리의 경우 한 개의 전기 프라이팬으로 모든 전을 부쳐야 하기 때문에 고구마-파전-오징어-명태전 등을 부친 후 동그랑땡과 육고기류를 굽는다. 맨 마지막에 하는 것은 생선을 굽는 일이다. 비린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 순서가 좋다.

이 순서대로 전 부치는 일을 마치니 오후 6시가 가까워진다. 한 곳에 앉아 쉼없이 해야 하는 것이 전을 부치는 일의 가장 고된 부분이다. 내가 전 부치는 일을 하는 사이 아내는 나물, 탕국 등 나머지 명절 음식을 준비한다. 이 부분에선 기술이 달리니 내가 넘볼 수 없는 구역이 돼버렸다.

전 부치는 일은 큰 기술을 요하지는 않으나 뒤집을 때의 시간 타이밍과 튀김가루와 반죽의 양 조절 등은 하다 보면 일종의 노하우가 생긴다.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맛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전 잘 부쳤네"라는 말이 나오면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든다.

소위 명절 증후군을 부르는 하이라이트는 쉼없이 쏟아져 나오는 설거지감이 아닌가 한다. 특히 차례나 제사를 지낸 후, 가족들이 식사를 마친 뒤 쌓여만 가는 설거지감을 바라보는 그 심정은 실제로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설거지도 요령이 있다. 모든 빈 그릇을 한 곳에 모아서 하면 힘들다. 일단 기름기가 없는 그릇과 기름기 있는 그릇, 그리고 양념이 묻어 있는 그릇을 구분한다. 이어 세제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빈 그릇에 묻어 있는 기름과 각종 양념 찌꺼기 등을 물로 먼저 씻어 내는 것이 설거지 하기에 편하다.

명절 때나 제사 때 가장 큰 일은 음식을 만드는 일과 치우는 일인데, 치우는 일은 다시 설거지와 정리정돈으로 이분화된다. 나의 경우 양쪽 다 경험하는 것이지만 설거지가 더 힘들다. 사람의 성격 나름이긴 하겠지만 완벽하게 씻어야 안심이 되는 나의 경우 설거지에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면서 허리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차례와 식사를 마친 후 아내와 나는 누가 설거지를 할 것인가, 아니면 누가 뒷정리를 할 것인가를 두고 일순간 머리싸움을 시작한다. 업무분담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이다. 머리싸움도 힘든 일 중의 하나다.

명절 증후군을 불러오는 가장 큰 요인은 뭐니뭐니해도 타인과의 형평성 문제다. 설거지를 하면서 슬슬 허리 통증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은 다른 사람이 무얼 하나 보게 되는데, 이때 TV를 보면서 과일을 입에 넣는 가족을 보는 순간 '욱'하는 기분이 든다. "음식 만드는 사람, 설거지 하는 사람, 먹는 사람 따로 있나"하는 억하심정이 드는 순간이다.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친 후 얻는 것은 몇 가지의 교훈이다. 역지사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들에게 음식 장만과 설거지에 동참할 것을 권해본다. 자신이 해보면 당사자의 심정을 알게 될 것이다. 산에 가서 도를 닦는 것보다 깨달음이 빠를지도 모른다.

또 하나 교훈이 있다면 '설거지하면서 들었던 억울한 마음은 나의 옹졸함이었구나'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 하나의 수고로 조상님이 기쁘고 가족 여럿이 즐거웠다면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십수 년간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매번 새로운 반성을 해온 것을 보면 역시 도를 닦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명절 음식 만들다보니 아내의 심정 알게돼

사실 내가 결혼하고 처음부터 명절이나 제사 때 그 일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 후 부모님과 함께 살 때도 그랬고, 분가를 해서 명절 때 부모님을 찾아뵐 때 나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었다.

솔직히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는 아내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어머니의 암묵적인 명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아내가 음식을 만들 때 나는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모처럼 만난 회포를 풀었고, 음식 준비가 끝난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차례를 지내고 난 후 아내가 설거지를 할 때 나는 과일을 먹으면서 TV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명절이 끝나면 어김없이 내게 돌아왔던 아내의 알 수 없는 투정과 짜증. 몇날 몇일 반복되는 그 휴유증은 어쩌면 지금 겪고 있는 명절 증후군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자연스럽게 명절 집안일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후 십수 년을 해오다보니 이제 익숙해진 데 더해 이제는 점점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겪었을 아내의 심정을 알게됐으니 더 할 수 없는 깨달음이 됐다. 이 때문에 이번 설 때 영정으로 차례상을 받으신 어머니는 내심 기뻐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태그:#명절 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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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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